주일낮예배

제목그릇된 열심2024-02-27 10:58
작성자 Level 10

2019년 6월 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갈라디아서 25번째 강해)

 

본문갈라디아서 4:17-18

제목그릇된 열심

 

서론)

 

예수회 사제이자 영성 학자였던 헨리 나우웬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봉사만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충돌하는 것은 없다.”

이 글을 접한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걸작인 잊혀진 제자도에서 이렇게 맞장구를 치고 있습니다.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어쩌면 과장일 수도 있다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선의의 봉사가 하나님을 보는 비전을 방해하는 성향이 아주 강한 것이 사실이다.”(p,139)

이 의미를 실제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두 경험을 소개하겠습니다.

언젠가 부활절 연합예배가 제천에 소재해 있는 모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저 역시 그 집회에 오랜만에 참석하다보니 집회가 열린 장소에 주차장 시설을 잘 알지 못하여 10분 정도나 헤매게 되어 늦은 시간에 예배당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본당 출입문이 닫혀 있어 할 수 없이 2층으로 올라가야 했는데 그 길목에 그 집회의 헌금 봉사위원들로 보이는 수십 명이 일사분란하게 한 곳에 모여 본인들의 사역으로 분주하게 왕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문제는 이미 예배는 시작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허나 그들은 예배 위원이었지만 전혀 예배와는 상관없이 헌금 통을 하나씩 들고 예배당 밖에서 설왕설래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보다가 참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예배 위원으로 봉사를 하게 되었지?의 반문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본질이지의 반문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경험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직전 교회에 막 부임했을 때 참 이상한 교인들을 보았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식사 담당을 하는 봉사자들이었습니다.

전자에 해당하는 인물들에게 주일학교 예배가 주일 낮 예배였습니다.

후자인 식사 담당자들 중에 혹여 1,2부에 참석하지 못한 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곧바로 식당 주방으로 가서 식사를 준비하는 봉사자로 주일을 보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내가 주일에 나왔는지를 전혀 고민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내가 하는 일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냐는 식이 직전 교회에 관행적 습관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갖고 있는 기득권적인 관행과 무려 6개월을 싸웠습니다.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주일 1,2,3부에 나와서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않은 자들은 식당 봉사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교회 교사들 중에 주일 낮 예배를 드리지 않고 주일학교에서 선생을 하는 자들은 교회학교 교사에서 탈락시켰습니다.

전통적인 교회에 부임한 목사가 싸우기에는 버거운 일이었지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제 나우웬의 갈파가 이해가되셨습니까?

그리스도를 향한 봉사만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충돌하는 것은 없다.”

저는 오늘 신앙이라는 이름을 도용하여 성도가 저지를 수 있는 중대한 착각을 지적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것 중에 단연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내용이 그릇된 열심입니다.

 

본론)

 

본문 17-18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이 구절의 선명한 이해를 위해 공동 번역 성경 해석을 소개하겠습니다.

공동 번역 갈라디아서 4:17-18절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성을 보이는 것은 결코 선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나에게서 떼어내어 여러분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열성을 품도록 하려는 술책입니다그들이 좋은 동기로 여러분에게 열성을 보인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통해 암시를 받을 수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유대에서 내려온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 공동체에 침투하여 제일 먼저 행한 것이 열심이었는데 그 열심은 선한 뜻을 갖고 있었던 열심이 아니라 그릇된 열심이었다고 바울은 회고합니다.

열심이라는 이 단어가 주는 맹점을 지금부터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교회의 신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열심을 다했다고 전언합니다.

어떤 열심이었을까?

클레몬트 신학대학의 신약학 교수인 한스 베츠 교수는 여기에 등장하는 단어 열심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젤로오(열심)는 사랑하는 자가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제어하기 위해 계략을 묘사하는 성적인 어휘이다.”(국제성서주석, “갈라디아서”, P,470)

무슨 말입니까?

달콤한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유혹하는 말이었을 것을 가늠하게 하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달콤할 정도로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맥을 못 추게 한 그 진상이 무엇이었을까 궁금해집니다.

존 스토트 목사의 말로 답해보겠습니다.

사람에게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첨하는 일’(존 스토트갈라디아서 강해,p,146.)

왜 그렇습니까?

그는 이 열심이라는 단어를 바울이 전한 16절의 선언과 대척점에 있는 단어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참된 말의 대척이 되는 말이 무엇이었을까?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첨하는 거짓의 말입니다.

설득력이 있는 접근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지역에 들어와서 그들을 자기들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행한 것이 바로 아첨하기였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을 받아들기를 잘했다는 표면적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닦달하지 않았습니다.

표면적인 칭찬 끝에 율법 교사들은 바울의 주장에는 2%의 부족이 있다고 공략한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이 환심 사기에 성공합니다.

그 다음은 거짓 복음을 설파한 것입니다.

결국은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의 영혼을 유린하는 목적을 달성하게 됩니다.

바로 이 점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망가뜨리는 최악의 무기라는 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둑질 중에 가장 악질적인 도둑질은 사람을 도둑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15:2-6절입니다.

압살롬이 일찍이 일어나 성문 길 곁에 서서 어떤 사람이든지 송사가 있어 왕에게 재판을 청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을 불러 이르되 너는 어느 성읍 사람이냐 하니 그 사람의 대답이 종은 이스라엘 아무 지파에 속하였나이다 하면 압살롬이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 하고 또 압살롬이 이르기를 내가 이 땅에서 재판관이 되고 누구든지 송사나 재판할 일이 있어 내게로 오는 자에게 내가 정의 베풀기를 원하노라 하고 사람이 가까이 와서 그에게 절하려 하면 압살롬이 손을 펴서 그 사람을 붙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니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우리가 잘 아는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을 일으키기에 앞서서 대중적인 인기몰이 즉 포플리즘을 이용한 대세잡기를 위하여 행한 악한 행위입니다.

이 악한 압살롬의 행위를 사무엘하기자가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훔치니라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하기 위해 압살롬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거짓으로 아첨한 것입니다.

뭐든지 OK 해 준 것입니다.

환심을 사기위해 입에 발린 말을 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에 침투한 유대 율법 교사들도 매일반이었습니다.

유대 율법의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기 위하여 행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환심을 사기위한 아첨하기였습니다.

바울은 이 사람의 비위에 맞는 아첨하기를 그릇된 열심이라고 명한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다시 읽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이에 반한 바울의 사역은 어떠했습니까?

참 많이 강조했던 메시지인 갈라디아서 1:10절을 다시 선포하겠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특별히 신앙인들이라면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주일 아침에 가지고 가야 하는 교훈이기도 합니다.

 

※ 그릇된 열심이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캐치하고 있는 17절의 뼈대가 정확하다고 믿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 근거는 바울도 이미 경험한 자기 삶에 대한 비평적 성찰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도행전의 기사를 동원해 보겠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순교 여행을 위해 올라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오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체포하여 즉결 심판에 넘기고 영내 장소로 끌고 가서 심문을 합니다.

바로 이때 바울이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된 회심 사건을 그들에게 간증하는 장면이 사도행전 22:1-21절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사도행전 22:3-5절을 읽어드립니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눈에 띠는 단어를 찾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열심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명명한 헬라어 단어와 동일한 어근을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신도 그릇된 열심을 갖고 살았던 자임을 간증한 것입니다.

본인도 이 열심이 올바른 신앙을 가진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허나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신앙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자기 신념이었고자기만족이었고자기 성취에 불과한 것이었지 신앙이 아니었음을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의 열심은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녀의 열심을 신앙이라고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 마르다의 열심을 신앙으로 인정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소중한 것은 일이 아니라 주님과 가장 가까운 지근거리에 있음이라는 본질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0:39절과 42절을 읽습니다.

39절입니다.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2절입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유진 피터슨은 발치라는 헬라어 단어 푸스를 바로 앞에서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이 본질입니다.

주일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주방의 일을 하는 것말씀의 사모함이 없이 교회의 일을 도맡아 하는 것말씀의 능력이 배제된 채로 교회 직분을 갖고 열심만 내는 것이 신앙이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오류에 우리 교우들은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장로권사안수집사집사 등등의 자리에 서는 것이 우선순위인 사람이 혹시 우리 교회에 있습니까?

상당히 위험한 생각을 갖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 열심이 도리어 교회를 어지럽게 하거나 망하게 합니다.

불의 사자였던 레오나르 레이븐힐이 이렇게 사자후를 선포했습니다.

어떤 직무를 수행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다.”(하나님의 방법으로 부흥하라,p,70)

누가 하나님의 교회의 일을 하기에 합당한 자격이 있는 자입니까?

우선순위로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입니다.

근래 주일 예배 기도 담당자들의 기도 내용에 적지 않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김명한집사가 그랬고장진영집사가 그랬고최종환집사가 그랬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준비된 것이기에 더 그러했습니다.

지난 주 기도자가 이렇게 회중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이 땅 많은 예배처소에서 말씀들이 선포되는 오늘거룩한 욕심 하나 아룁니다제천 세인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주님의 가장 가까이 두시기를 바랍니다그리고 선포된 말씀을 성령으로 보증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도를 듣는 순간울컥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제천 세인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주님의 가장 가까이 두시기를 바랍니다그리고 선포된 말씀을 성령으로 보증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마르다와 마리아 사건에 가징 걸 맞는 기도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세인교회 지체들이 이 정도의 자존감을 갖고 말씀의 능력을 사모하는 것을 제일 우선순위로 삼는 교회를 목회하는 담임목사에게는 전율하는 감동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을 열정을 다해 해야 합니다.

교회 봉사를 최선을 다해 해야 합니다.

교회의 후미진 곳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역의 열정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의 사모함이 배제된 열심과 열정은 그릇된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본문에 기록된 대로 거짓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사가 되든지 아니면 그 거짓 복음에 넘어가 구원의 반열에서 이탈되는 불행한 자가 되든지 하나가 될 것이기에 경성해야 합니다.

열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열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18절에서 이렇게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은 것입니다.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지난 주간 새벽예배 시간에 벼락으로 다가왔던 말씀이 있습니다.

이사야 9:7절입니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앞으로 새벽에 보게 될 또 한 구절을 더 봅니다.

이사야 37:32절입니다.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내 열심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자는 본질을 꿰뚫지 못합니다.

본질 근처에 가지 못합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그랬습니다.

거기에 현혹된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십자가의 흔적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 외 다른 것을 추구하는 자들은 결국 할례를 선택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오늘 주일에 심비에 새기고 가야할 교훈을 전합니다.

내 열심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도구로 사용되려면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열심을 알기 위해 말씀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제천 세인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주님이 가장 가까이 두시기를 바라는 영적 자존감으로 무장하여 여러분 모두가 말씀을 받고 사모하는 바른 열심이 강력하게 임하는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우리 오늘 눈물로 한 알의 씨앗을 심는다

꿈꿀 수 없어 무너진 가슴에

저들의 푸른 꿈 다시 돋아나도록

우리 함께 땀 흘려

소망의 길을 만든다

 

내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던 저들

노래하며 달려갈 그 길

그날에 우리 보리라

새벽이슬 같은 저들 일어나

뜨거운 가슴 사랑의 손으로 이 땅

치유하며 행진할 때

 

오래 황폐하였던 이 땅 어디서나

순결한 꽃들 피어나고

푸른 의의나무가 가득한 세상

우리 함께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