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념이 아닌 신앙으로
서론)
몇 년 전 지인에게 미국의 진보적인 잡지인 ‘롤링스톤’ 지의 정치 기자인 매트 타이비(Matt Taibbi)가 쓴 ‘오 마이 갓 뎀 아메리카’라는 책을 추천 받고 경제적인 전문 지식이 없었던 저는 몇 번을 읽으면서 많은 공부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타이비는 이 책에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촉발되었던 2008년 발 글로벌 경제 위기의 추악한 산실을 여지없이 고발했는데 글을 읽다가 무릎을 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짧은 설교 시간을 통해 이 사건의 전모를 자세히 말씀 드릴 수 없지만 요약해서 설명을 드린다면 미국을 상징하는 그 유명한 투자 회사인 골드만삭스가 막대한 부를 얻기 위해 계획적인 금용위기를 터트렸고, 이로 인해 국제경제가 휘청거리자 아주 합법적으로 돈줄이 막힌 국가와 기업에 막대한 이자를 조건으로 돈을 뿌려 어마어마한 수익을 얻은 아주 질 나쁜 사기극이 바로 2008년 모기지 서브프라임 사태로 야기된 글로벌 경제 위기였다는 것입니다.
경제 위기가 터지자 더불어 당시 미국의 정치인들은 여야 할 것 없이 정권을 얻기 위해 골드만삭스에게 엎드렸고 수많은 자생적 능력이 없는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골드만 삭스의 덫에 걸려들어 높은 고리대금으로 돈을 구걸했고 그 결과 99%의 미국 서민들은 물론, 전 세계의 평범한 사람들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제적인 고통을 당하게 되었음을 타이비가 격렬하게 이 책에서 고발한 것을 읽었습니다.
읽다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상위 1%의 돈벌레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기막힌 현실을 알면서 천박한 자본주의의 원형이 무엇인지를 나름 다시 한 번 각성하게 된 좋은 공부의 시간을 가졌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를 던질 수있을 것 같습니다.
어디 골드만삭스만이 전 세계적인 돈벌레이겠습니까?
작금에 전 세계의 금권을 주무르는 3대 국제신용평가사가 미국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Standard & Poor's)와 무디스(Moody’s Investors Service), 피치 IBCA(Fitch IBCA)는 미국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굳건히 서 있습니다. 이 3대 국제 신용평가사가 가지고 있는 힘은 한 나라의 운명을 쥐락펴락할 정도입니다.
실례를 하나들어 보십시다.
이 평가사들이 지금 한국의 국제 신용을 AA(double A)로 설정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데로 괜찮은 평가지수입니다.
허나 만에 하나 이 평가사들이 고의적으로 그리고 악의적으로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b 단계로 하향조정 하게 되면, 모든 외국계 자본이 물밀 듯이 빠져 나가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속수무책으로 IMF 때처럼 또 다시 경제 위기에 직면하는 어떤 의미로 보면 종속 계약이 되어 있는 듯한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렇게 전 세계의 금융권과 경제권을 아우르고 있기에 이 평가사들이야 말로 21세기의 맘몬이라는 말이 과장된 표현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이 맘몬이라는 무기를 미국이 갖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전 세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이 생각이 들었습니다.
“IN GOD WE TRUST”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미국 1달러 지폐에 새겨져 있는 문구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맘몬이라는 무기로 무장하고 있는 미국은 1달러 지폐에 쓰여 있는 그들의 문구가 얼마나 허울 좋은 선전 문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영어단어 ‘TRUST’라는 단어는 번역하면 ‘신뢰하다.’ 혹은 ‘맡긴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BELIEVE’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믿는다.’는 전형적인 단어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고 유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TRUST 와 BELIEVE 의 차이입니다.
실제적으로 이 두 단어는 오늘날별 구분이 없이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두 단어의 쓰임새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먼저 TRUST 의 예입니다.
이런 문장은 우리가 아주 흔하게 쓰는 문장입니다.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정말로 좋은 문장입니다.
이 문구를 이렇게 바꾸면 어떨까요?
“나는 대한민국을 믿습니다. (혹은 신뢰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사용하는 단어로 ‘믿습니다.’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그냥 통상적인 우리나라에서는 이해가 되지만 영어단어로 표현을 할 때는 반드시 구분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경우입니다.
민족주의나 혹은 애국심을 나타내는 표현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I TRUST IN KOREA.”
왜 그렇습니까?
‘TRUST’는 ‘사상’이나 ‘신념’의 문제를 대상으로 하는 동사이기 때문입니다.
애국심이나 민족주의는 사상이고 신념의 개념이지 신앙의 개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정의한다면 사상이나, 이념이나 가치에 동의하여 그것을 따라가는 것을 신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념은 엄격하게 신앙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신앙이라는 개념은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영적인 면을 온전히 드릴 수 있는 대상에게 표현하는 신앙적 행위이며 믿음의 차원입니다.
이 때 사용하는 단어는 바로 ‘BELIEVE’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표현해야 합니다.
“I TRUST IN GOD.” 가 아니라 “I BELIEVE IN GOD.”라고 말해야 합니다.
‘BELIEVE’는 다음의 세 가지를 포함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크로스웨이 성경 공부 교재의 저자인 해리 웬트 목사는 적어도 BELIEVE’라는 단어를 사용하려면 세 가지의 필요충분조건이 있어야 함을 강조했는데 동의했습니다.
⓵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지식 (KNOWLEDGE)
⓶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동의 (AGREEMENT)
⓷ 예수가 그리스도 되심에 대한 확신 (CONVICTION)
그렇다면 신념이 아닌 신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면 그 신앙의 대상이 원하는 삶에 대하여 세 가지를 전제하면 그 삶을 바르게 살아내야 합니다.
역으로 이러한 신앙의 대상이 원하는 삶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산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신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미국 1달러 지폐에 새겨져 있는 문장의 동사가 BELIEVE 가 아니라 TRUST인 게 천만 다행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지폐는 이렇게 바뀌는 것이 정상입니다.
“IN MONEY WE TRUST.”
저는 오늘 본문에서 신앙과 신념에 대한 분명한 구분을 시도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 욥기 18장은 욥의 친구 빌닷이 욥이 말한 내용에 대하여 반격하는 두 번째의 담론입니다.
엘리바스가 욥에게 회개하지 않는 너로 인하여 하나님이 계속해서 너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고통이라는 굴에서 머물게 될 것이라는 저주에 가까운 성토를 15장에서 퍼부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조금도 물러섬이 없이 엘리바스의 말에 동의하지 않고 16장에서는 거기에 따른 반론을 제시했지만 17장에서는 갑자기 그와의 설전도 피곤하다는 듯이 대꾸하지 않고 하나님과 담판을 지으려고 했음을 지난 강해를 통해 살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는 자는 무서움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들던 욥의 무기는 죽여 달라는 생떼였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기에 차라리 이 고통을 안긴 분이 하나님이니 죽이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나님께 내놓았음을 17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대들던 욥을 보면서 친구 빌닷은 욥이 괘씸해졌습니다.
자기들의 말을 무시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본문 1-4절을 읽겠습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깨달으라 그 후에야 우리가 말하리라 어찌하여 우리를 짐승으로 여기며 부정하게 보느냐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주석이 필요한 대목입니다.
2절에 기록된 대명사는 ‘너희’ 입니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라는 말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빌닷은 욥이 끈질기게 친구들의 말을 무시하는 것에 화가 났습니다.
해서 이렇게 언변(言辯)한 것입니다.
엘리바스와 소발 두 명의 친구들을 가리키며 말한 것입니다.
“너희들은 이제 욥에 대하여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친구가 우리들의 충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태도라는 성토를 먼저 꺼낸 것입니다.
그러면서 직접적으로 상당한 감정의 분을 포함하여 3절에서 이렇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짐승으로 보는가?”
이 빌닷의 말은 12:7절에서 욥이 언급한 말에 대한 공세적 반응입니다.
“이제 모든 짐승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네게 가르치리라 공중의 새에게 물어 보라 그것들이 또한 네게 말하리라”
소발의 첫 번째 고발에 대하여 욥이 항변하여 던진 말을 기억하고 있었던 빌닷의 재 반응인 셈입니다.
뒤끝 작렬입니다.
그러면서 빌닷은 아주 교묘하게 욥에게 역전 펀치를 날립니다.
4절을 다시 봅니다.
“울분을 터뜨리며 자기 자신을 찢는 사람아 너 때문에 땅이 버림을 받겠느냐 바위가 그 자리에서 옮겨지겠느냐”
‘울분’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프’는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상태를 표시하는 노함’의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욥이 대단히 분노하여 친구들에게 눈살을 찌푸리며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자기 몸을 찢었다고.
흔히 구약성경에서 참담한 일을 경험하면 자기의 옷을 찢는 행위로 본인의 감정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빌닷은 욥의 상태가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태임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옷이 아닌 몸을 찢었다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욥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진단입니다.
역발상으로 몸을 찢는 일은 짐승들이나 하는 일이기에 우리가 짐승이 아니라 너 욥이 짐승이라는 빌닷 본인 딴에는 대단히 통쾌한 반격이었습니다.
이렇게 욥에게 카운터펀치를 날린 빌닷은 이어지는 본문 5절 이하에서 설교자인 제가 보기에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을 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빌닷의 발상을 보십시다.
욥에게 앞으로 임할 저주에 가까운 예언입니다.
5-19절까지 영어성경을 보면 계속해서 이어지는 표현을 나타내는 표식(‘,’ 즉 콜론, ‘; ’ 즉 세미콜론)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쉽게 말하면 5-19절까지 소발이 역정하면서 내뱉은 말은 한꺼번에 이루어지되 계속해서 이어지는 일들임을 강조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빛이 꺼지는 것, 스스로의 꾀에 빠지는 것, 올가미에 걸려드는 것, 덫에 치이고 몸이 올무에 얽히는 것, 함정이 길목에 있는 것, 무서운 것이 사방에 존재하는 것, 재앙이 기다리는 것, 피부에 질병이 떠나지 않는 것, 의지하던 것들이 뽑히는 것, 밑으로 그의 뿌리가 마르고, 위로는 그의 가지가 시드는 것, 이름이 지워지는 것, 세상에서 쫓겨나는 것, 후손도 없고 후예도 없는 것 그리고 남은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 등등입니다.
약 15가지에 해당하는 왜 이 많은 것을 일부러 열거했는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빌닷이 욥에게 퍼부은 저주가 무엇이었습니까?
신념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5-19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지만 빌닷의 말은 전혀 신앙과는 관계없는 본인의 신념이었습니다.
본인이가지고 있는 그냥 생각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욥기 강해를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은 신앙이 아니라 신념에 불과하다는 교훈입니다.
시편을 보면 다윗이 퍼부은 저주시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시가 109편입니다.
시편 109:7-15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무시무시한 저주기도입니다.
이 시의 배경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단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략적으로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윗이 당한 어려움과 억울함은 역사서 여기저기에 보고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의 저주기도시를 놓고 설교자의 해제를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아멘해서는 안 됩니다.
이성적으로 이해는 되지만 그렇다고 다윗이 드린 이 기도에 맹목적으로 아멘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저주는 자신의 주관적인 신념이지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저주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9:51-56절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시니라”
여기에 기록된 ‘꾸짖다’의 헬라어 단어 ‘에피티마오’는 멱살을 잡는 꾸지람입니다.
기억해야 하는 은혜가 있습니다.
신앙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저주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부연합니다.
확고한 신념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성향에 따른 고집이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속성입니다.
마태복음 13:24-30절을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가라지와 알곡을 끝까지 같이 놔두라는 것입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이 같이 상할까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또 하나,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얻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13:6-9절입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한 해의 기회를 더 주는 것이 주님의 마음이며 그 마음을 갖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제는 우리는 본문 마지막 부분인 20-21절을 읽을 차례가 왔습니다.
“그의 운명에 서쪽에서 오는 자와 동쪽에서 오는 자가 깜짝 놀라리라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욥에게 철저하게 저주를 퍼부은 빌닷의 마지막 모습은 서늘하기까지 합니다.
어느새 빌닷은 하나님이 해야 할 말씀을 본인이 주저 없이 전하는 월권을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꿰찬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떤 사람이 알고 모르고는 하나님 판단의 몫이지 사람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위해 중보 할 따름이자 옥석을 가릴 위치에 있는 자가 아닙니다.
왜요?
나도 하나님을 모르는 자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을 알고 구원의 은혜까지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우리는 신념대로 살면 안 됩니다.
왜 신념은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하나 본 뒤에 설교를 맺겠습니다.
카라바조의 대표작인 ‘의심 많은 도마’입니다.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을 역임한 김상근 박사가 보내준 책에서 발췌한 그림입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위대한 작품입니다.
신념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흉터 자국에 손을 집어넣은 뒤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무엇입니까?
보지 않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아무나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념이 아닌 신앙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경우에 따라 최고의 불신앙이 될 수 있는 확고한 신념이 아닌 확고한 신앙으로 살아가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외롭고도 쓸쓸한 모습
말없이 홀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을 다 버린 나그네
정녕 그 분이 내 형제 구원했나 나의 영혼도 구원하려나
의심 많은 도마처럼 물었네 내가 주를 처음 만난 날
내가 다시 주를 만났을 때 죄악으로 몹쓸 병든 몸
조용히 내 손 잡아 이끄시며 병든 자여 일어나거라
눈물 흘리며 참회하였었네 나의 믿음이 뜨거웠었네
그러나 죄악이 나를 삼키고 내 영혼 갈 길을 잃었네
내가 이제 주를 만남으로 죽음에 길 벗어나려네
변찮는 은혜와 사랑 베푸신 그 분 만이 나의 구세주
주 예수 따라 항상 살리로다 십자가 지고 따라가리라
할렐루야 주를 만난 이기쁨 영광의 찬송을 돌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