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16일 금요일 성서 일과 묵상 (사순절 셋째 날) 주님에게 쓰러지게 하소서 오늘의 성서 일과 마가복음 14:66-72 꽃물 (말씀 새기기) 마가복음 14:72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마중물 (말씀 묵상) 세족 목요일, 베드로는 장담했다. 이렇게. “베드로가 힘있게 말하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막 14:31) 예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나를 부인할 것이라는 주님의 예고에 거세게 반발하며 선포한 어깃장이다. 하지만 주님의 예고는 빗나가지 않았다. 오늘 성서일과에 대한 부분이 짙고 짙은 색깔을 더한 채로 독자인 내게, 그리고 베드로와 별반 다름이 없는 나에게 다가왔다.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68절) “또 부인하더라”(70절) “베드로가 저주하여 맹세하되” (71절) ‘맹세하다’로 번역한 ‘옴뉘오’의 어원적인 의미는 ‘협박하다’다. 그냥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제자라고 지적하는 이들을 향하여 협박하듯 으름장을 놓고 주님을 부인한 셈이다. 나는 베드로의 이 민낯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왜? 나는 더 심한 놈이기 때문이다. 겸손을 가장한 포장된 고백이 아니다. 진짜로 그렇다. 그런 내가 무슨 자격으로 베드로는 비난한단 말인가! 오늘 성서일과는 어떤 의미로 나를 비추는 자화상이다. 하지만 말씀을 묵상하면서 도저히 울컥하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은 72절 성서일과다.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공동번역을 보니 이 구절의 번역 단어 중에 가슴을 때리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그 때에 닭이 두 번째 울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는 땅에 쓰러져 슬피 울었다.” 나는 이 구절에 앞에서 엎드린다. 쓰러졌다는 단어 때문이다. 시대의 참극은 죄를 죄라고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든 재앙이 잠식했다는 점이다. 누구도 쓰러지지 않는다. 쓰러지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성서일과에 담긴 ‘쓰러져’라는 이 단어 때문에 목이 멘다. 다혈질이었고 실수투성이었던 베드로였지만, 베드로에게 남아 있는 가능성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는 영적, 정서적 동의가 내게 임했다. 그래, 주님 앞에서 한없이 쓰러지자. 주님께 쓰러지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 희망이요, 소망이다. 두레박 (질문) 나는 맘몬에게 쓰러지고 있는가? 주님 앞에 쓰러지고 있는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조금의 주저함이 없이 주님께 쓰러지게 하옵소서. 그게 최고의 복임을 믿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사순절 셋째 날이다. 오늘도 주님께 엎드리고 쓰러지자. 그리고 주앞에서 울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주님, 항암 투병 중인 지체의 병상에 함께 하옵소서. 주님 만이 소망이며 지탱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