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9일 수요일 성서일과 묵상 멀리 섰던 날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92편, 잠언 11:23-30, 마태복음 13:10-17, 시편 142편, 오바댜 1:10-21 꽃물 (말씀 새기기) 오바댜 1:11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마중물 (말씀 묵상) 지금 수요 예배 시간에 창세기 강해를 진행하고 있다. 공교롭게 오늘 설교하게 될 텍스트는 창세기 32장이다. 야곱과 에서의 20년만의 재회라는 극적인 사건을 설교를 통해 풀어야 한다. 어떤 측면으로 보면 야곱은 에서에게 있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대상이다. 자신의 아름다워야 할 전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버린 극악의 동생이 야곱이기에 그렇다. 에서는 분명 희생양처럼 여겨지는 삶의 부분이 있다는 것에 나는 동의한다. 일반적인 몰아세움은 에서는 자신의 입지와 장자권을 온전히 지켜내지 못한 경솔한 자였기에 본인이 당해야 하는 수모는 어쩔 수 없는 심판의 결과요 몫이라는 싸늘한 결론이다. 그가 범했던 경솔함에 비해 조금 과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게 내 성서의 이해다. 대세를 거스른다는 말이냐고 공격해도 뭐 그러려면 그러라지! 정도로 가볍게 여기면 된다. 하지만 오늘 성서일과는 조금 의미가 다르다. 야곱에게 밀려난 에서다. 이스라엘에게 언제나 밀려난 에돔이다. 에돔이 이스라엘에 대해 좋은 감정이 있을 리 만무다. 하지만, 오늘 성서일과의 배경이 되고 있는 오바댜 예언서의 상황을 전제할 때, 아무리 에돔에 대해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싶어 하는 나지만, 오늘은 묵상 본문은 에돔에게 호의적으로 다가설 수 없다. 유다의 멸망을 바라보는 에돔은 형인데, 그래도 최악의 비극을 당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보인 반응이 너무 가혹했다. 오바댜 1:10-11절은 이렇게 고발한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아픈 구절이 보인다. ‘멀리 섰던’ 그랬다. 유다가 짓밟힐 때 에돔은 뒷짐 졌다. 뒷짐뿐만이 아니라 박수도 쳤다. 그리고 동조했다. 시집살이 혹독하게 시키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가 더 미운 건 인지상정이다. 다시 ‘멀리 섰던’ 나는 이 단어가 너무 아프다. 시대의 비극은 무관심이 아무렇지 않다고 여기는 무감각으로 자리매김했다는 비극이다. 요즈음 핫한 단어로 바꾼다면 방관이라는 악귀다. 궁평 지하차도에서 우리의 이웃들이 속절없이 죽어갔다. 인재가 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보이면 누구보다는 민감하게 대처해야 할 유관기관의 관료들은 사태가 벌어지자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관료주의적 권위를 갖고 아픔을 외면하고 있다. 멀리 서서 뒷짐 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요동하지 않는다. 방관은 언제나 악의 선두에 서 있는 사탄의 궤계다. 나는 형으로서 모든 것을 빼앗겼던 에서의 마음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래도 형인데, 창세기 32장에서 20년 만에 만난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야곱을 먼저 안아주었던 에서라는 선조의 미덕을 후손들이 보여주었더라면 오늘 예언자 오바댜의 저주가 그들에게 임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크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에게 호의를 보이던 자들과 어깨동무하는 것만을 원하시지 않는다. 힘든 일인 것은 알지만 내 반대편에 있는 자들을 보듬는 것이 주님의 소원이다. 다시 복기하지만 나는 이사야 19:23-25절의 세상이 몹시 그립다. “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멀리 서 있지 말고 가까이 있어 함께 하자. 두레박 (질문) 나는 목양의 반대편에 있는 자를 보듬고 있나? 성찰하자. 손 우물 (한 줄 기도) 따스한 하나님, 멀리 있는 목사가 아니라 가까이 있는 따뜻한 목사가 되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무관심하고 있는 일체의 것들과 싸워보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주님,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해 주십시오. 고통 중에 있는 자와 함께 해 주십시오. 고독흔 자들과 함께 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