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주일 성서일과 묵상
왜 우리는 언제나 이스라엘을 응원해야 하지?
오늘의 성서일과
예레미야 20:7-13, 시편 69:7-10,(11-15),16-18, 로마서 6:1b-11, 마태복음 10:24-39
창세기 21:8-21
꽃물 (말씀 새기기)
창세기 21:14-16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가져다가 하갈의 어깨에 메워 주고 그 아이를 데리고 가게 하니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을 관목 덤불 아래에 두고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마중물 (말씀 묵상)
아주 오래 전에 대학원 은사이셨던 김중기 박사께서 집필하신 『약자에게 일어난 신앙사건』에서 하갈을 이렇게 표현한 것을 보았던 적이 있었다.
“최초의 여성 혁명가”
이유가 있다. 하갈의 도주(선생님은 하갈이 도주한 것으로 해석)는 당시 시대적인 정황으로 간주할 때 혁명 그 자체였다는 점 때문이다. 하갈은 주인의 아들을 낳았지만, 노예의 신분이었는데 그녀가 아브라함의 본거지를 탈출하여 떠난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르짖으며 반항할 줄 아는 여성이었다고 높이 평가한 것이다. 과유불급이다. 선생님은 탈출이라고 해석했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하갈은 도주가 아니라 부인할 수 없는 추방(내쫒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갈이 아이를 낳게 된 것도 전적인 타의였다. 여주인이 먼저 제안했고 남자 주인은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이스마엘이다. 나쁜 용어지만 분명 ‘씨받이’가 하갈이었다. 더 동기가 순수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브라함이다. 훗날 사라가 이삭을 낳자 이미 장성해 있었던 이스마엘은 이복동생이 편하게 보일 리 없었고, 이삭에게 좋지 않게 대하는 이스마엘을 본 사라는 대노하여 남편에게 여종과 이스마엘을 내쫒으라고 압박했다. 순간의 고민은 했지만, 아브라함은 사라의 압박에 굴복하여 첫아들과 하갈을 추방한다. 떡과 물 한 가죽부대를 이어주고 애굽으로 향하는 사막 길로 추방하였다고 성서일과는 보고한다. 아브라함이 하갈에게 준 떡과 물 한 가죽 부대는 12리터 정도다. 이 정도의 물과 떡은 최소의 식량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알고도 하갈과 첫아들을 사지로 내 몬 셈이다. 어떻게 이렇게 아들의 애비로 무책임할 수 있단 말인가? 성서일과를 읽다보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아브라함의 무책임함은 분노를 자아낸다. 아브라함의 행태에 대한 성경의 내증이 더 이상 설명하지 않기에 아브라함의 질 나쁜 행위에 대해 무언가 방어논리로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은 비겁할 것 같아 중단한다. 다만 이스마엘의 죽음 앞에서 절규하는 하갈에 오신 하나님을 말할 수 있다. 소리 내어 우는 하갈에게 오신 하나님은 그녀에게 물을 주고, 이스마엘을 보살피셔서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게 하신 하나님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고 싶다. 이렇게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 사랑이다.”
구속사의 계보에 들어가 있는 톨레도트(족보) 만을 챙기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그 반대편에 행해진다. 성서일과 창세기 21:20절은 감동이다.
“하나님이 그 아이와 함께 계시매 그가 장성하여 광야에서 거주하며 활 쏘는 자가 되었더니”
참 많은 동역자들이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아랍은 이스라엘을 돕는 주변 도구로만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 중보 해야 하고 무슬림이 대부분인 아랍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런 폭력이 또 어디에 있나? 왜 이스라엘은 항상 이겨야 하고, 팔레스타인은 항상 져야 하나?
알렌 파페가 『팔레스타인 비극사』에서 보여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자행한 만행들은 인간이면 하지 못하는 악행의 극치였다. 아우슈비츠에서 당한 민족의 아픔을 팔레스타인에게 준 집단이 이스라엘이다. 사정이 이런데 왜 언제나 이스라엘은 선하고 팔레스타인은 악하다는 데에 사인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이지 갈라치기 사랑이 아니다. 나는 이사야 19:25절을 만날 때마다 열광한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
이래야 말이 된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편적이다. 딴지 걸지 말라.
두레박 (질문)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편적임에도 불구하고 한쪽으로 치우쳐 있는 기울어져 있는 운동장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을 공평하게 느끼는 세상이 되도록 인도해 주시고, 어떤 일이 있어도 유불리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갈라치기 하는 자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아픈 자, 약한 자가 더 많고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도록 쓰임 받는 도구 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