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7일 토요일 성서일과 묵상 눈에 보이는 것이 뭐지?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00편, 출애굽기 6:28-7:13, 마가복음 7:1-13, 시편 116:1-2, 12-19. 창세기 24:10-52 꽃물 (말씀 새기기) 마가복음 7: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마중물 (말씀 묵상) 범상치 않은 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던 예수의 소문이 인근 주변으로 퍼져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유대 종교 기득권자들에게는 대단히 불편했을 것이 자명하다. 유대 종교의 대중적인 여론이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었을 때였기에 예수가 행하는 이적과 기적, 그리고 그가 던지는 살아 있는 메시지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자들에게는 매우 불쾌하고 당혹스럽고 불편하게 다가왔음은 이상하지 않은 현상이리라. 가뜩이나 눈엣 가시 같은 예수인데 그의 제자들이 행한 반 율법적인 시도는 예수를 공격하기에 좋은 먹잇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고 있는 제자들 책잡기가 벌어졌다. 제자들을 공격했지만 예수를 공격한 셈이다. 종교권력자들의 공격에 예수께서 반응한 것은 소극적 방법이 아니었다. 도리어 대단히 공격적이고 능동적인 반응이었다. 종교지도자들이 자행하고 있는 ‘고르반’의 위선을 터뜨리고 직격탄을 날리셨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막 7:8) 결국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치명적 범죄는 이사야의 말대로 입술로 한 몫 했지만 마음은 전혀 동하지 않는 싸늘하게 식어버린 송장 같은 믿음에 대한 비난이었다. 이들은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중간기 400년 시대에 나름의 율법적인 사수와 야훼 신앙의 고수라는 긍정의 발걸음으로 시작된 이들 유대 종교주의자들의 잘못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일까? 나는 오늘 성서일과의 교훈으로 ‘보는 것’에서 시작되었음을 발견했다. 제자들이 떡 먹는 것을 보는 것은 철저히 외형이었다. 외형을 중요시 여기는 종교는 타락한다. 크기를 자랑하는 종교성은 반드시 타락한다. 영적인 알갱이는 외형이 아니라 본질을 꿰뚫는 영성이다. 나는 오늘 무엇을 보고 있는가? 외형이라는 껍데기인가? 아니면 본질을 보려는 내면의 고갱인가? 보는 것을 잘 보는 훈련이 영성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두레박 (질문)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보기를 원하실까? 손 우물 (한 줄 기도)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나의 영적 수준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은 것은 조금도 허락하지 않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던 토마스 아켐피스의 기도가 내 기도가 되게 하옵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체의 것들에 눈을 감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내일이 주일입니다. 목사에게는 대단히 부담스러운 날이지만, 교우들에게는 삶에서 희망을 얻는 날이 되게 하옵소서. 전무했던 은혜가 임하는 날이 되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