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월요일 성서일과 묵상 성경 참 어렵다. 오늘의 성서일과 사무엘하 24:1-15 꽃물 (말씀 새기기) 사무엘하 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을 치시려고 다윗을 격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사무엘하 24:14-15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고통 중에 있도다 청하건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아니하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전염병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명이라 마중물 (말씀 묵상) 성경이 참 어렵다. 특히 내게 사무엘 역사서의 부록 부분이 그렇다. 다윗의 인구 조사에 얽힌 불편한 진실이 못내 나를 괴롭힌다.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격노하셨다는 뜬 구름 잡는 이야기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의 질문부터 시작이다.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 것은 다윗의 의지적 결단이 아니라 성서일과 텍스트를 문자적으로 읽다보면 하나님의 작품이다. 결국 하나님의 의도대로 인구조사를 행한 다윗은 천하의 죄인이 되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이 제시한 세 가지 심판의 옵션 중에 세 번째 안이었던 3일 동안 퍼진 전염병 재앙을 선택함으로써 애매한 7만 명의 인명이 희생당한 것도 상식의 차원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권력자의 폭력으로 비추어 지기 때문이다. 더 곤혹스러운 것은 야훼 하나님이 이 일의 효시였다는 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이다. 각종 주석(진보적, 보수적 성향의 학자들을 총망라하는)을 참고해 보았지만, 내겐 별 소득이 되지 않았다. 더 솔직하게 설득당하도록 한 글을 읽지 못했다. 어떤 목회자가 1절에 대한 설교했던 이렇게 한 글을 읽었다. “분명히 하나님이 다윗을 격동시키셨고 인구 조사를 하라고 명령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막 격동시켜서 인구 조사를 하라고 해놓고는 그다음에 ‘네가 잘못한 거다.’라며 모든 죄를 다윗에게 뒤집어씌우시는 겁니까? 그렇게 오해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다윗이 이렇게 된 건 하나님이 시키신 게 아니냐고 하면 오해입니다. 이것은 수사적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이렇게 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막지 않으시고 놓아두셨다는 겁니다. 지켜보셨다는 말입니다. 이미 다윗의 마음은 유혹의 덫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은 ‘그래? 너는 그런 마음 갖고 있구나? 그럼 한 번 해봐.’라고 하시는 겁니다.” 수사적인 표현이라는 그의 설명이 대단히 낯설게 여겨졌다. 성경을 이현령비현령 式으로 접근하려면 거기에 합당한 신학적, 성서학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제시 없이 막무가내 몰아가기 식의 종용은 궁색하기 짝이 없기에 말이다. 역대기 역사서의 병행 구절인 역대상 21:1절은 역대기사가의 글이니까 야훼 하나님의 자리를 사단으로 둔갑시킨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일 수 있기에 뭐 그렇게 대입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다. 하지만 사무엘하서는 신명기 역사서 기자의 글이니까 조금은 더 정직하게 신중해 져야 하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다윗의 인구 조사 담론이라는 보고가 역사적 팩트에 진정성이 있는 보고라고 믿기에 그렇다. 성서일과를 묵상하다가 다윗을 야훼 하나님이 격동시켜 인구조사를 하게 했다는 이 팩트에 대해 소위 진보적 구약학자에 들어간다고 하는 F, 스톨쯔, 월터 브루그만 등이 직설한대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음’, ‘야훼께서만 유일한 원인이 되시는 세계에서만 일어나는 합당한 일’등등으로 단발마적인 규정 짓기를 한다면 차라리 정직해 보이는 접근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그렇다고 인구조사의 주체인 야훼 하나님의 의도, 또 그로 인해 파급된 여러 비극들을 납득의 수준에서 종결 지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본문으로 내일 아침 큐티를 해야 하는데 고민스럽다. 평신도 회중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이니 뭐, 이런 복잡한 성서해석에 대해 관심이 없을 터이고, 해서 너무 대중적이고, 루틴 한 그대로 이 텍스트를 공로주의에 대한 경계 정도로 해석함으로 매듭지을 요량이다. 문제는 사무엘하 24장은 여전히 내게 숙제로 남아 있을 것 같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두레박 (질문)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예초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인가요? 손 우물 (한 줄 기도) 하나님, 당신이 특별히 계시하신 말씀에 대한 무지가 어떤 때는 많이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어디까지 현현하셔서 조명해 주실 것인지도 매우 두렵고 떨립니다. 상황이 이러하기에 다만 하나님을 왜곡하지 않도록 적절한 조명을 허락해 주십시오. 젊은이들이 많이 회자시키는 영적 양아치는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비물 (말씀의 실천) 할 수 있는 한 말씀 앞에 정직해 지자. 그게 어려우면 묻기라도 하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어제 교회 공동체에 첫 발걸음을 내디딘 지체들이 많이 낯설 것입니다. 저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저들의 마음을 만져 주시고 우리 세인 공동체는 최선을 다해 저들을 품게 해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