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5일 토요일 묵상 지팡이만 있었는데 뭐가 아쉽지? 오늘의 성서일과 시편 121편, 시편 119:97-104, 창세기 32:3-21, 예레미야 31:15-26, 마가복음 10:46-52 꽃물 (말씀 새기기) 창세기 32:10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마중물 (말씀 묵상) 불교적인 용어로 공수래공수거라는 단어가 있음을 우리는 너무 잘 안다. 인간이 자라면서 무언가를 인지할 능력이 생기면서 생기는 본성적인 태도가 있다. 내 것 만들기이다. 소유에 대한 집착이다. 야곱이 에서를 속인 뒤에, 밧단아람으로 피신해야 했다. 다혈질적이고, 용사였던 에서에게 살해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피신할 때 건넜던 요단강에서의 추억을 야곱이 피력한 부분이 왠지 절절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지팡이 하나만 갖고 건넜던 요단, 그런데 20년이 지난 뒤, 이제는 다시 고향을 향해 나아가던 야곱은 20년 전 건넜던 그 강을 역으로 건너면서 이렇게 술회한다. 지팡이 하나가 아니라 가축의 두 떼를 소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야곱은 이렇게 물질의 복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받았지만 행복하기는커녕 두려움 백배다. 강을 건너고 날이 새면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탄한다. 이 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의 행복이 소유에 있지 않고 존재됨에 있다고 말한 에릭 프롬의 갈파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간이 되어감(being)에서 인지된다고 말한 칼 야스퍼스의 성찰은 지당한 정의다. 지팡이 하나만 갖고 있는 것이 인생이고 이것은 누구나 예외 없이 적용된다. 70이요 80인 인생의 여정인데 소유에 집착하면서 사는 인생이야말로 너무 초라하지 않을까 싶다. 헌데 무얼 더 바라고 갖고 싶단 말인가! 다시 한 번 나도 각인한다. 두레박 (질문) 나는 소유형 목사인가? 존재형 목사인가? 손 우물 (한 줄 기도) 인생 육십 평생을 넘어섰는데 전자 인생 되지 않도록 치열하게 살게 하옵소서.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게 하소서.
나비물 (말씀의 실천) 들음과 앎, 그리고 행함 사이의 간극을 최대한 좁히는 발걸음을 오늘은 한 발만 더 떼어 보자. 하늘바라기 (중보기도) 주님, 왜 이렇게 주일은 빨리 오는지요? 참 버겁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이라는 시간 속에서 번 아웃되어 예배당에 나오는 교우들을 굶기지 않고 보내는 주일이 되게 하옵소서. 저들에게 하늘 소망을 허락하시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