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사기 9:7-15
제목 : 똑바로 보고 싶어요.
오늘 본문에 기록된 우화는 필자가 주일학교를 다녔을 때, 연극의 줄거리로 많이 사용될 정도로 익히 알려진 스토리입니다. 아비멜렉이 이복형제 70여 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된 비극을 비꼰 가시나무 우화입니다. 아비멜렉이 그렇게 잔인하게 형제들을 살해할 때 막내 요담은 기적적으로 숨어 생명을 유지합니다. 이윽고 이복형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그리심 산에 올라가 아비멜렉을 왕으로 만드는 데 협조한 세겜 사람들에게 그 유명한 가시나무 예를 공포하기에 이릅니다. 등장시킨 나무의 종류는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그리고 아비멜렉을 상징하는 가시나무입니다. 나무의 나라에 살고 있는 나무들이 앞에 언급한 세 나무들 즉 감람, 무화과, 포도나무 등에게 찾아가 나무들의 왕이 되어줄 것을 요청했지만 모두다 거절을 합니다. 그 나무들이 거절한 공통점은 각기 자기들이 해야 하는 각기의 사명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명은 좋은 기름을 내는 것, 아름다운 열매를 내는 것, 그리고 맛있는 포도주를 만들어내는 것 등이었습니다.
이 나무들이 이렇게 본인들이 해야 할 사명에 천착하기로 마음먹고 나무들의 간청을 정중하게 거절하면서 이구동성으로 사용한 단어를 사사기 기자는 ‘누아’라는 히브리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를 ‘우쭐대지 않겠다.’(9,11,13)로 개역개정판은 번역했지만, 이전 버전인 개역 판 성경 번역이 저는 더 마음에 듭니다. 왜? ‘요동하지 않겠다.’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아비멜렉을 상징하는 가시나무와는 달리 평범한 신앙의 경주를 달려가고 싶어 하는 모범적인 신앙인들의 태도와 공통분모가 분명해 보입니다. 왕이라는 세속적 권력의 유혹이 아무리 크더라도 내가 가야하는 신앙의 여행에서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독자들에게 주고 싶어 했던 사사기 기자의 영적 내공이 필자에게는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통해 오늘 우리들이 배워야하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 자기를 바로 보는 것이 올바른 믿음이라는 교훈입니다.
가시나무는 내가 왕이 되어 줄 테니 내 그늘로 와서 피하라고 말하며 우쭐대는 장면이 15절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까? 가시나무는 가시가 많고 바늘이 있는 초목입니다. 가시나무는 작은 잎사귀가 3-5개 정도 달려 있는데 아주 날카로워서 그늘이 생기지 않습니다. 또 하나 가시나무는 봄에는 꽃이 피지만 그 열매는 식용으로는 쓸 수 없는 열매입니다. 환언하면 별로 쓸모가 없는 나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가시나무는 내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온 나무들 앞에서 우쭐되었습니다. 요동했습니다. 인간은 자기에게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어 하는 것이 본능이 있습니다.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집니까? 자기를 올바르게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목회를 하면서 흔들리지 않고 달려가려고 했던 나름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해석은 신중하게, 나에 대한 평가는 냉정하게, 타인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소설가 조정래는 본인이 글을 쓰면서 항상 가슴의 벽에 새긴 구절을 그가 쓴 ‘황홀한 글 감옥’에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돌은 단 두 개. 뒷돌을 앞으로 옮겨 놓아가며 스스로, 혼자의 힘으로 강을 건너가야 한다. 그게 문학의 징검다리이다.”
얼마나 엄격한 잣대입니까? 얼마나 아름다운 신중함입니까? 조정래가 조정래인 이유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처음 접했을 때, 아주 강력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소설가와 소설은 그냥 만들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위대한 소설이 탄생하려면 소설가 자신의 피나는 노력과 자기를 쳐서 복종하는 냉정함을 토대로 본인이 살았던 삶의 진한 향기들을 체득되어진 이후에나 가능합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필자는 한국교회를 너무나 사랑합니다. 그래서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아픈 공격들을 만날 때마다 심장이 터져나가는 통증을 느낍니다. 그러나 그런 고통을 겪지만 고통을 겪는 것을 끝나지 않기 위해 이런 동통(同痛)의 느낌으로 내 사랑하는 교회들을 위해 이렇게 화살기도를 드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하나님, 내 사랑하는 교회와 그 안에 있는 당신의 백성들이 나 자신을 똑바로 보는 은혜를 주옵소서.”
바울이 고백이 오늘 따라 크게 공명되어 저에게 들립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고전 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