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메시지 중에서 우리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지 약 3년 정도가 된 어느 지체가 소 그룹 모임에서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맨 처음에는 설교가 좋았습니다. 상투적이지 않고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계속 설교를 들으면서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불편해 진 정도가 아니라 막 저항하고 싶어졌습니다. 설교가 비수가 되어 나를 찔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나와 싸우던 어느 주일에 목사님이 전한 메시지가 그날은 부드러운 위로의 메시지 성격의 메시지였습니다. 불편하지 않은 설교를 목사님이 한 것입니다. 그 설교를 듣다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부담되고 불편한 설교를 들어 저항하고 싶었던 나였는데 그 편안한 설교를 듣는 날 너무나 아이러니 하게도 더 짜증이 나고 더 불편해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날, 속으로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로 외쳤습니다.” “하나님, 이건 아니잖아요. 이건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말씀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독백했습니다. “어, 내가 왜 이렇게 되었지!” 지체의 이 치열한 고백을 듣다가 참 감사했습니다. 이제 그 지체에게 주 예수께 붙잡힌바 된 그것을 붙들기 위한 사유함과 생각함과 고민함이라는 몸부림이 시작되었기에 말입니다. 철저한 무신론 작가인 무라야마 겐지가 ‘나는 길들지 않는다.’ 에서 이렇게 독설을 표했던 글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없는 자는 목적이 있는 자에게 죽임을 당한다.”(p,132) 치열한 무신론자도 이 정도의 사유함의 정신을 갖고 사는 데 그리스도인으로 잘 걸어가고 있는 지조차도 질문하지 않는 둔감한 삶을 살면서 무력하게 살아간다면 그가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교우들과 함께 나눈 주일 설교의 내용을 복기하다가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걸어가신 그 삶의 궤적에서 이탈하지 않고 잘 걸어가고 있는가? 를 자문하며 다시 한 번 성찰하고 질문하는 목사가 되겠노라고. 은혜에 잠겼던 주일을 보내는 늦은 밤, 서재가 참 고요합니다. 한 주간도 페친들이 그리스도께서 살아내셨던 그 삶을 살아내는 승리가 있기를 중보해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