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로워십(followership)이 먼저다. 이번 여름에 목표를 세웠다. ‘리더십’에 대한 일체의 책들과 씨름하겠다는 목표다. 가을 학기에 모 신학대학원 목회학 석사 과정 강의를 맡았기 때문이다. 서재에 소장되어 있는 리더십 관련 도서들을 보니 대학원 시절 코스워크로 수강했을 때 구입했던 책들 약 10여 권이 추려졌다. 먼저 이 책들을 다시 들쳐보는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최근 출간되었거나 이미 출간되어 있는 도서임에도 미처 섭렵하지 못한 책들을 발췌해 보니 약 20여권 정도로 집약되어 빠르게 구입해 놓고 보니 약 30여 권의 책들이 필자를 노려보고 있어 지금 열심히 씨름 중에 있다. 회상해 보니 나이 40대 대학원 시절 접했던 리더십에 대한 강의의 여백은 젊어서 그랬는지 리더십에 대한 노하우, 그리고 카리스마틱 한 리더십의 스킬 등등에 천착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게 그때는 왜 그렇게 매력적이었는지. 해서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던 한 홍 목사의 ‘거인들의 발자국’(두란노간, 2000)을 다시 펼쳐보니 밑줄 거의 대부분이 전술한 노하우, 스킬 쪽에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며 당시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민낯을 들킨 것 같다는 생각에 실소했다. 이제 50대 후반, 나름 산전수전공중전까지 겪으며 목회 현장에서 30년을 부대낀 지금 다시 펼쳐보는 리더십 관련 책들의 복기 과정에서 필자에게는 상당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느껴짐을 스스로 체감해 놀랐다. 리더십에 대한 얍삽했던 지식 습득의 눈 돌림이 아닌 나도 모르게 팔로워십 쪽으로 이동했다는 점이 체휼의 온도다. 몇 년 전, 숙명여대 김응교 교수의 책을 읽다가 무릎을 친 적이 있었다. “예수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포월적인 존재이다. ‘기어갈 포’, ‘넘어갈 월’ 이라는 뜻의 포월(匍越)이란 갑자기 형이상학 단계로 초월하는 것이 고투를 거듭하며 기어가고 기어가다가 이전 단계로 넘어간다는 말이다.” (김응교, ‘그늘’,pp,122-123.) 이 글에 필이 꽂힌 이유는 필자가 주관적으로 받아들인 나만의 자위적인 해석에 스스로 만족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대체적으로 인간의 본능적인 구조 안에는 언제나 ‘포(匍)’가 아닌 ‘월’(越)의 욕망이 일순위로 똬리를 틀고 있다. 반면 예수의 삶을 깊이 반추하고 곱씹어보면 ‘월(越)’앞에 먼저 반응하신 것이 ‘포’(匍)라는 점에 필자는 고개를 숙인다. ‘匍’가 없이 ‘越’이 존재하지 않음을 삶으로 보여주신 분이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에 눈물겨운 감사가 있다. ‘越’은 궁극적 리더십의 목표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越’이라는 리더십의 결론을 얻기 위해서 ‘匍’라는 팔로워십이 전 단계로 선행되어야 함을 잊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유감스럽고 아쉽다. 며칠 전, 성서일과로 신명기를 읽다가 벼락처럼 다가온 말씀이 있다. 신명기 1:31절이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신명기(申命記)라는 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에게 이미 주셨던 토라의 명령들을 되풀이 하여 다시 새긴다는 의미의 율법서이다. 이 말은 이미 모세가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패역함을 지난(至難)하게도 뼛속까지 경험한 이후에 다시 그들을 향하여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심정으로 하나님의 토라를 되새김질한 유언과도 같은 설교라는 말이다. 바로 이 사전 지식을 전제할 때 1:31절의 한 구절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너희를 안으사’ 안을 만한 이유보다는 내칠 만한 이유가 훨씬 더 많은 지난 40년의 세월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솔직한 표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그렇게 안고 40년 동안이나 함께 걸으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필자에게는 리더십의 카리스마가 아닌 ‘匍’를 겪으신 뒤 ‘越’이라는 은혜의 자리로 이끄시는 팔로워십으로 느껴지니 주님의 그 먹먹한 사랑 때문에 다시 한 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래서 그런가! 리더십에 대한 적절한 연구를 해야 하는 글 읽기 시간인데 자꾸만 팔로워십이 리더십이라는 역발상의 감동이 진하게 새겨진다. 이러다가 신대원생들과 함께 하는 학기 중에 리더십 강의가 아닌 팔로워십 강의로 주제가 바뀌는 것은 아닐까 싶다. 뉴질랜드 출신의 리더십 전문가인 오스왈드 샌더스 박사가 말한 이 말은 상투적인 권고가 아니다. “가장 성공적인 지도자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의 애착을 자기 자신에게 두기보다는 그리스도에게 두도록 하는 사람이다.”(영적 지도력, 요단 간,p,250.) 작고한 신영복 선생의 ‘담론’을 보면 ‘성찰(省察)’ 대한 의미 있는 가르침이 오롯이 기록되어 있다. “‘성찰’은 자기중심이 아니다. 시각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자기가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다.”(p,72.) 그렇다면 자신을 처절하게 성찰하는 자는 분명히 팔로워십으로 무장한 자임에 틀림이 없다. 더불어 이 성찰의 의미를 실천하는 자가 그래서 결국은 한 공동체의 리더로 서야 한다는 도식적인 도전이 필자에게는 강하게 다가온다. 이런 면에서 팔로워십이 리더십보다 먼저다. 오늘 내가 사는 사회에 리더가 되려는 자는 산재해 있다. 허나 적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자, 외부와의 관계 안에서 내가 지금 어떻게 서 있는지를 냉정하게 성찰해보려는 팔로워들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비극이다. 교회가 무엇 하는 곳인가? 필자의 짧은 생각으로는 리더들을 세우기에 앞서 팔로워들을 세우는 곳이어야 한다. 목사는 무엇 하는 사람인가? 리더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의 노하우를 습득하고, 스킬을 배워 나가는 사람이기 전에 공동체를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팔로워가 된 사람이 목사다. 언젠가 교계 주간 신문을 보다가 아연실색한 일이 있었다. 한 공동체에서 실시하는 연합 행사에 대회 조직도를 보다가 든 웃픈 생각 때문이다. 지면에 소개된 조직도를 보니 부대회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사람이 정확하게 20명이었고, 총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다양한 직책이 25개가 적시되어 있었다. 물론 소속 단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배려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다만 필자가 제기하는 논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조직의 틀이 지성적 그룹들과 젊은이들에게 비쳐질 때 갖게 될 참담함이다. 세속적 관점에서 언급한 이런 괴물 같이 보이는 조직은 개그계의 소재에서나 보일 법하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감스럽다. 교회 공동체에서 이등이 되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고 갈파했던 중국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의 말은 그래서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할 가르침이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에 참 격려해 주고 싶은 지체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는 아무리 새겨 보아도 리더의 자질이 있다. 헌데 그의 자리는 언제나 팔로워의 자리다. 거기에 먼저 서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같지 않다. 몸에 배어 있는 삶의 태도와 성향 자체가 그를 그렇게 서게 한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필자는 알게 되었다. 분명 팔로워의 자리를 언제나 늘 항상 지키고 있는 그를 공동체의 지체들이 리더로 인정하고 있다는 선명한 감동 말이다. 그를 보면서 떠올린 글이 있다. 사하라 사막의 가톨릭 선교사인 샤를르 드 푸코의 좌우명이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거하고(Present to God) 사람들과 함께 거하는 삶(present to people)”(고든 맥도널드, 리더는 무엇으로 사는가?, p,19) 푸코의 이 좌우명을 맨 처음 접했을 때, 스스럼없이 필자에게 다가온 영적인 소회는 이것이었다. “무엇이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정확하게 통찰한 팔로워의 삶” 팔로워십에 천착하는 삶은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21세기 작금의 오늘, 가장 시급한 교회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섬기는 모든 성도들의 최우선의 미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내가 영원히 사랑할 대상이신 주군이신 예수께서 하신 이 말과 삶은 그래서 필자의 삶이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달려간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