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사기 6:24 제목 : 여호와 샬롬 출애굽기 19:3-6절을 주목하여 보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성서 일과로 읽은 이 구절을 읽다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감동이 저에게 임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부르셔서 직접 십계명을 제정하시기에 앞서 다음과 같이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대언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온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다. 그러기에 내 말을 잘 듣겠느냐? 내 언약을 잘 지키겠느냐?”를 물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평범해 보인 이 구절이 저에게 감동으로 다가온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430년 동안 계속해서 명령만을 받았던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백성들은 명령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보다 명령을 듣는 것이 오히려 더 익숙한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십계명을 제정하시기에 앞서 모세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고지하셨습니다. “내 백성들이 내 말을 따라 주겠는가?” 이것을 물으라는 것입니다. 전율하는 감동과 은혜가 아닙니까? 430년 동안 노예근성으로 굳어져 있었던 당신의 백성들에게 동의를 구하시는 하나님, 감동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전인격적으로 대우하며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들과 평강의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인이 드린 제물을 올려놓은 곳에 불로 응답하신 하나님의 표징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기드온은 바로 거기서 단을 쌓았음을 사사기 기자는 증언 합니다. 본문 24절 전반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샬롬이라 하였더라” 제단의 이름을 번역하면 ‘여호와는 평강이시다.’라는 의미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할 은혜가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대목입니다. 본문 하반절입니다.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주목할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까지’ 입니다. 여러 주석 책을 글을 쓰기위해 찾아보았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오늘까지’의 ‘오늘’ 이 정확하게 언제인지를 밝히고 있지 못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다만 상식적으로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 오늘의 시기는 이 글을 읽고 있는 후대라는 사실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주셨던 그 평강의 메시지에 대한 감동이 이스라엘 공동체 후손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보관되었다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므낫세의 작은 지파에 속한 아비에셀의 오브라 지역에 살고 있었던 기드온의 계보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평강의 메시지는 아마도 그 후손들에게 적지 않은 감동과 자부심으로 여겨졌기에 여호와 샬롬의 제단이 소중히 보전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은 이타적 관계 안에서 이어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샬롬의 하나님은 개인적 평안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 때에만 가능한 그리고 임하는 샬롬입니다. 이것이 ‘샬롬’ 신학의 중요한 담론입니다. 적용한다면 이웃의 샬롬은 무시한 채로 나만의 샬롬을 추구하는 자는 이미 샬롬에서 제외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샬롬은 무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가족만의 샬롬을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비성서적인 사람임을 알려줍니다. 지인 목사께서 예일 대학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는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중증 장애아 시설인 라르쉬로 들어가 한 명의 장애우를 돌보며 삶을 마감한 그의 봉사처가 보고 싶어 경유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한 노파의 말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노파는 헨리 나우웬의 흔적을 보고 싶어 온 지인 목사께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우웬 신부, 우리들을 위해서 수고했지. 그런데 특별하지는 않았어!” “He's not special.”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오직 주의 사랑으로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다가 간 헨리 나우웬의 삶이 어찌 특별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적어도 우리들의 가치관과 문화 이해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캐나다의 한 노파는 그를 특별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그를 폄훼했기 때문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녀가 그렇게 말한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니까,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 그렇게 말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진정한 하나님이 주시는 샬롬을 맛보고 싶으십니까? 은행 통장의 잔고에 목숨 걸지 마십시오. 이웃과 나누십시오. 아파트 평수가 넓혀지는 것과 집 안에 화장실 개수가 많아지는 것과 자동차 배기량이 커지는 것으로 행복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내 이웃과 지체들과 나누십시오. 그 때 비로소 여호와 샬롬의 진정한 평강을 얻게 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