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못하고’ 와 ‘안 하고’ 본문: 사사기 1:16-21 제가 참 좋아했던 고 박완서 선생님이 쓰신 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에 참 의미 있는 글이 실려 있습니다. 글을 원문 그대로 소개하겠습니다. “숙명여고 2학년 시절 국어시간에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물으셨다. ‘포도주를 만들 때 너희들 무엇이 필요한지 아니?’ 포도, 설탕, 소주, 항아리요. 라고 대답을 하면 선생님께서는 '또?'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포도주는 포도를 땅에 버린 것이 땅에 고여 시간이 지나 발효하여 술이 된 것임을 발견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포도가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단다.’라고 하셨다.” 필자는 이 글을 접하면서 진정성으로 갖고 아멘 했습니다. 왜냐하면 선생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고자 했던 것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핵심가치를 보려고 노력하고 공부하라는 교훈이었을 것이고 목회 현장에서 자칫 잘못하면 얼마든지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걸고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것이 목사의 삶이기에 이 글은 저에게도 정말로 중요한 가르침으로 다가와 저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본질적 핵심가치에 때한 깨달음, 영적인 시각에서 냉정하게 판단해 볼 때 신앙적 승리의 삶을 사는데 이 보다 더 중요한 지침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본문은 바로 이 점을 아주 적절하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이미 이전 연재 글에서 살핀 것처럼 유다 지파는 가나안 정복 전쟁 중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헤브론, 드빌, 기럇 세벨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기세를 몰아 유다는 가나안 남쪽으로 진군합니다. 이윽고 유다 지파는 아랏을 점령하기에 이르는데 아랏은 유다 혼자의 힘으로 점령한 것이 아니라 모세 때부터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겐 족속의 도움으로 함께 그 땅을 도모하는 데 성공을 했습니다. 이 기사를 소개한 사사기 기자는 갑자기 화제를 스밧 지역의 승리로 돌립니다. 스밧은 유다와 시므온 연합군이 점령한 뒤에 가나안 족속들을 내쫓는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던 장소임을 밝힙니다. 이어 연합군은 지중해 연안에 살고 있었던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남서쪽에 살고 있었던 블레셋을 통칭되는 가사와 아스글론, 에그론을 접수하였다고 보고합니다. 이렇게 사사기 기자는 승승장구한 유다 공동체의 가나안 정복 전투를 기록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의미 있는 대목을 본문에 남겨 두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블레셋의 주요 거점도시였던 이 세 도시를 점령함에 있어서 산악지대에 있는 가나안인들은 쫓아내는 데 성공을 했지만, 아쉽게도 평지에 있는 거민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보고한 점입니다. 또 한 가지는 본문 20-21절에서 갈렙은 노구의 몸으로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헤브론을 완전히 차지한 반면,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던 여부스 족속을 완전히 쫓아내지 못했음을 기술했다는 점입니다. 바로 본문에서 의미심장하게 남겨둔 두 가지 보고에서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영적 교훈을 찾아내야 합니다. * 순종하지 못한 것과 안 한 것은 결코 같지 않다는 도전입니다. 왜 유다와 시므온 지파의 연합군이 블레셋을 접수하는 싸움에서 평지에 있는 그들 거민들을 쫓아내지 않았고, 베냐민은 여부스를 쫓아내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은 오늘 본문 다음에 기록된 1:28절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 무슨 말입니까? 쫓아내지 않은 이유는 노동력의 확보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가나안의 지리적인 특성과 기후적인 상황을 잘 모르는 이스라엘에게는 거민들을 노예화시키는 것이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익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단지 하나님의 명령 때문에 그들을 쫓아내는 것은 인간적인 해석으로, 이론적인 해석으로 유다 공동체에게는 말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도적 무시입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비극은 시작된 것입니다. 이 불신앙에서 이스라엘의 멸망의 서곡은 시작된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해석되고 선포된 말씀 그리고 심지어 육화된(incarnated)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는 불신앙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필자는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logos)은 해석하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서신학적 도구로 분석도 해야 합니다. 더불어 어떤 경우에는 철저한 지성으로 도전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기까지입니다. 로고스 일 때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되었습니다. 해석된 말씀이 이제 성도의 삶으로 육화되어 거했습니다. 그 육화된 말씀(incarnated Word)이 나에게 영적 감동으로 다가온 레마는 이제부터 결코 해석의 차원이 아닌 절대적인 순종의 차원으로 굴복해야 하는 하나님의 절대 핵심 가치입니다. 이 하나님의 절대가치에 대한 순종은 하고 못하고의 차원이 아닙니다. 이번 글의 제목은 ‘못하고’와 ‘안 하고’입니다. 어느 경우에 레마를 연약함으로 인해 못할 수는 있겠지만 ‘안 하고’의 불신앙으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훗날 이 두 사안을 반드시 셈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이 복되기를 중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