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울리세요?
강해 설교로 설교의 패턴을 바꾸고 나서는 대체적으로 지성적 설교로 굳어지는 경향이 있어 설교자인 저 스스로 건조할 때가 있어 항상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인 감성 터치의 내용도 삽입할 때가 있지만 그것도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감성을 터치하는 설교자가 부럽고 또 부러운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3월 15일 오늘 주일 설교는 저의 이런 건조함을 조금이나마 극복할 수 있는 설교였던 같아 주일 저녁의 감회가 남다릅니다.
26년의 목회 여정 중에 만났던 귀한 지체들을 뒤돌아보며 은혜가 아니었던 것이 없었던 지난날들의 추억들이 가슴을 찡하게 설교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그 때는 진한 여운이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던 부분도 뒤돌아보니 넘치는 은혜였고 터질 것 같았던 사랑이었고 미친 둣이 사랑했던 종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너무 감사했는데 설교를 준비하며 또 선포하며 더 선명하게 보였던 은혜와 감동은 그 보다 더 중요한 나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터질 것 같았던 '이미'의 사랑이었습니다. 나를 미칠듯이 사랑하신 주님의 눈물겨운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에게 팔 벌려 안아주셨던 터질 것 같은 주님의 사랑의 호흡이었습니다.
3월 15일 설교를 선포하면서 저는 주님의 이 눈물겨운 사랑을 조금이나마 전하며 울었습니다. 이 설교가 교우들에게는 오랜 만에 전하는 담임목사의 감성적 설교를 들렸나 봅니다. 예배 내내 여기저기에서 흐느낌을 들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손수건을 꺼낸 든 지체들이 보였습니다. 1부 예배를 마치고 교우들과 인사를 나누는데 지체 한 명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왜 울리세요. 너무 많이 울었잖아요."
듣다가 주님이 골고다로 올라가실 때 울고 있는 여인들을 향해 하셨던 말씀이 오버랩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네 자녀를 위해 울라“
그래서 그 지체를 향해 그 주님의 따뜻한 음성을 소박하게 담아 축복하며 마음으로 화살기도를 드렸습니다. 권사님, 한 분이 2부 예배가 마치고 인사를 하는데 다짜고짜로 저에게 오셔서 손을 덥석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이런 설교를 준비하실 수가 있었습니까?......"
말문을 잇지 못하셨지만 저는 그 권사님의 심장이 울고 있다는 것을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훤화하지 않는 세태를 살고 우리들이지만 다시 한 번 종도 울고 성도들도 울 수 있는 우리 공동체가 된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소망하심과 기대감을 만족시킬 수 있는 중단되지 않는 은혜가 똬리를 틀고 있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일을 아름답게 드린 이 저녁, 주일 오후 예배에 드린 찬양처럼 은혜가 흐르고 흘러 또 흘러넘치는 영광이 가득한 서재입니다. 이 영광과 축복이 너무 넘쳐나 교우들에게 주일의 은혜를 보고합니다. 좋은 밤, 행복한 밤이 되시기를 담임목사가 두 손 모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