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33) 빌라델피아 교회 유적지에 남아 있는 성 요한 기념 교회 기둥 ① 6월 6일 토요일 4일차 여정 어제 온천욕 덕일까? 아니면 시차가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서일까? 다른 날에 비해 몸이 가볍다. 아직도 식사는 나에게 곤혹스러운 일이지만 이제는 향신료 냄새도 조금은 참을 만하다. 아침 식사는 힘들어도 해야 한다는 강박감 때문에 토마토를 비롯한 과일과 우유에 타먹는 아침 콘 프레이크는 나에게 적지 않은 위안이다. 함께 성지순례 여정에 참석한 서울 모처에 있는 감리교회 집사님은 나를 만나는 인사가 이제 정해져 있다. “목사님, 어떻게 오늘은 식사를 조금 하셨나요?”(ㅎㅎ) 집사님의 인사말이 왠지 감사하게 다가온다.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도 아닌데 아무리 인사말이라도 매일 그렇게 염려하는 마음으로 챙기는 마음이 따뜻하다. 오늘 일정은 파묵깔레를 떠나 오늘의 지명으로 쉐흘라르라는 도시에 위치해 있는 빌라델피아와 사데 유적의 탐방이다. 빌라델피아로 가는 도중 가이드는 긴 이동 여정이라서 그런지 빌라델피아라는 지명에 읽힌 역사적 전설을 구성지게 엮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이야기 해 주었다. 버가모의 왕이었던 유메네스에게는 왕이 된 이후 늦게 본 동생 앗탈루스가 있었다. 남자 동생이 태어나자 신하들은 후한이 두려우니 앗탈루스를 살해하라고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동생을 너무나 사랑했던 유메네스는 신하들에게는 동생을 죽이는 것으로 가장하여 신뢰할 만한 부하를 시켜 아주 먼 곳으로 피신을 시켜 동생을 보호한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중 유메네스 황제가 병들어 죽게 되자 유네메스는 자신이 죽은 뒤에 동생의 신변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본인 죽은 뒤에 동생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결정적인 걸림돌이라고 여긴 자신의 아내와 아들을 비롯한 모든 정적들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형은 병사한다. 나라는 선왕의 뜻을 받들어 아무 것도 모르는 동생을 왕으로 추대한다. 왕위에 오른 앗탈루스는 이윽고 선왕이었던 형이 자기를 왕위에 오르게 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를 알고 대성통곡한다. 그리고 앗탈루스는 형을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도시의 이름을 바꾸었다. 그 이름이 바로 ‘빌라델피아’ 즉 ‘형제 사랑’이라는 뜻이다. 그림 같은 비극을 품은 도시가 바로 빌라델피아이다. 가이드는 이 도시에서 17명의 순교자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후에 말하겠지만 아마도 서머나에서 순교한 자들로 여겨진다. 소작농들이 많이 거주하던 가난한 도시였지만 그러나 상대적으로 믿음의 역사를 써 내려갔던 이 빌라델피아는 그래서 그런지 사도 요한이 계시를 통해 본 소 아시아의 7개 교회 중에 칭찬만 받았던 서머나 교회와 더불어 또 하나의 칭찬만 나타난 교회 중에 하나로 유명하다. 오늘의 명칭으로는 알라세히르 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빌라델피아 유적지에 도착해서 느낀 감동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칭찬의 흔적을 보았다는 점이었다. 빌라델피아에게 주신 성경 말씀을 먼저 살펴보자.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계 3:12) 빌라델피아는 유명한 포도나무 집산지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빌라델피아 쪽으로 이동하는 노정에 펼쳐진 거리에는 포도나무들이 지천을 이루고 있었다. 포도 농사를 비롯하여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이곳은 당연히 지주와 소작농들의 삶의 장이기도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 중에서도 소작농들의 삶이 거의 대부분의 헌신과 피와 땀이라는 요소를 담보하여 빌라델피아는 움직였을 것이 자명하다. 사정은 이렇지만 역사가 항상 힘이 없는 자의 편에서 기록되지 않고 힘이 있는 자의 논리로 작성되는 것을 전제할 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분명 있는 자들의 역사를 뛰어넘어 보호해야 할 ‘암하레츠’ (땅의 백성들인 힘없는 백성들의 통칭)들을 위한 장대한 서사시일 지도 모른다.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이렇게 환상을 보이시며 빌라델피아 교회에게 편지를 보내신다. 계시록 3:8절의 말씀을 다시 펼쳐보자.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이 빌라델피아 교회에 칭찬하신 핵심적인 키워드는 ‘작은 능력’ 이었다. 그렇다. 작은 능력은 참 볼품이 없다. 빌라델피아에 살고 있었던 소작농들의 능력이라고는 정말로 별 볼이 없는 능력이었다. 허나 주님이 뭐라 극찬하셨는가? 작은 능력을 갖고서도 내 말을 지켰다고 하셨다. 내 이름을 그 작은 능력을 갖고도 배반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극찬이다. 주님께서 행하신 진정성이 담보된 칭찬을 엿 본다. 이렇게 작은 능력을 갖고서 주님의 말씀을 사수했던 빌라델피아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3:12 후반절) 빌라델피아 유적지에 도착하여 보자마자 제일 먼저 들었던 첫인상은 이기는 자에게 약속하신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감동이었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나의 개인적 해석이요 적용이다. 유적지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성 요한 교회의 터전들 중에 지진으로 거의 대 부분 쓰러진 건물들의 흔적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교회를 지탱해 주던 기둥들은 무너지지 않고 아직도 그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감동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요한계시록의 그 기둥의 그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림 34) 빌라델피아 교회 유적지에 남아 있는 성 요한 기념 교회 기둥 ②
그림 35) 빌라델피아 유적지에 남아 있는 성 요한 교회 터의 기둥 ③
가이드는 빌라델피아에 얽힌 감동의 전설 보따리를 또 하나 풀어놓았다.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순교를 당한 폴리캅과 빌라델피아 교회의 성도들 간에 이루어진 에피소드였다. 그의 이야기는 감동의 에피소드였다. 폴리캅이 86세에 이단적 사상이었던 로마 황제 숭배와 타협하지 않고 순교를 당하게 되자 폴리캅 감독이 외롭게 혼자 순교를 당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던 빌라델피의 신실한 형제들 중에 몇 사람들이 서머나로 건너가 폴리캅과 함께 순교를 당했다는 이야기 전언이었다. 듣다가 이런 느낌, 그래서 빌라델피아는 ‘형제 사랑’ 이라는 이름의 도시에 합당하구나! 하는 그런 감동이 밀려왔다. 성경은 말한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빌라델피아는 작은 도시의 한 복판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은 이슬람의 모스크가 바로 옆에 세워져 있는 이방의 땅이 되어 있지만 작은 능력을 갖고도 신앙의 선배들이 피 흘려 사수하려 했던 그 믿음의 울림들이 나의 귓가에 공명으로 울리는 감동을 간직한 채로 이번에는 빌라델피아와는 전혀 다른 배교의 교회 터인 사데 교회 유적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데는 소아시아의 7개 교회 중에 빌라델피아는 사뭇 정반대의 느낌을 많이 주는 교회이다. 가장 심한 책망을 받은 교회, 7개 교회 중에 가장 부자였던 교회,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교회의 정체성을 가장 많이 상실한 교회가 사데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데라는 교회를 떠올리면 2007년 고 옥한흠 목사께서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 임했던 성령 대 부흥 100주년을 기념하는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선포했던 가슴 뜨거웠던 설교가 생각이 난다. 암 투병 중이었기에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던 설교 섬김에서 한국교회를 병들게 했고, 한국교회를 약하게 만들었고, 한국교회를 이처럼 추락하게 만든 놈이 바로 나라고 통탄하며 피석인 설교를 토하여 내던 옥 목사님의 그 설교를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옥 목사께서 택하셨던 본문이 바로 요한계시록 3:1-6절이었다. 사데 교회에게 주셨던 주님의 말씀 말이다. 주님은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메시지의 환상에서 다음과 같이 엄하게 책망하셨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 3:1) 사데 교회를 향한 주님의 이 책망이 한국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책망과 너무나도 똑같았기 때문에 옥 목사께서는 사데 교회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은 한국교회를 죄를 지적하면서 본인을 비롯한 한국교회의 모든 목회자들과 지도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킬 것을 외치며 사자후를 토했던 것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는 고대 국가였던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 지역이 천연적으로 형성된 분지였기에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할 수 있었던 최적의 장소였다고 고고학자들이 분석한다. 하지만 완벽한 것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듯이 사데는 역사적으로 두 번에 걸쳐서 외세의 침입에 의해 유린되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는 지역이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과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왕에 의해서였다. 특히 후자의 전쟁에서 시리아의 라고라스 라는 장군은 불과 15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야간에 암반을 올라 성문을 열어 안티오쿠스의 군대를 입성시켜 이 성을 도시를 점령하였던 역사적 기록을 갖고 있다. 성경을 견강부회하여 해석하는 것은 아니지만 밤에 특수부대에 의해서 도둑같이 성문이 열려져 전쟁에서 패배한 사데의 이 사건을 두고 볼 때 계시록 3:3절 말씀 중에 ‘내가 도둑같이 이르리니’ 라는 말씀의 의미가 크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주님은 이렇게 강하게 역설하셨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3:3) 또한 사데는 사금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해서 이 지역에는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들이 광산을 많이 개발하였던 지역이라고 한다. 사데는 우리로 말하면 도시에 위치해 있지 않고 전형적인 농촌으로 보이는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림 36) 사데 지역에 도착하자마자 마을에 입구에서 볼 수 있었던 돌감람나무 유적지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이런 곳에 과연 고대 도시의 유물들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한적한 시골 깊숙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림 37) 사데 유적지임을 알려주는 이정표 허나 사데 유적지에 도착을 하자 나름 많이 놀랐다. 이유는 간단하다. 규모 때문이었다. 지진으로 무너진 곳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위용을 갖추고 있는 아르테미 여신을 섬기는 신전 터,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추앙하던 신전 터 등의 규모에 충격을 받을 정도였다.
그림 38) 사데 유적지의 아르테미(성경에서는 아데미) 여신전 터
그에 반해 사데 교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의 보잘 것 없음과 초라함에 못내 속상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을 정도의 마음이 상했다. 교회로 들어가는 문의 초라함이 이것을 증언했다. 성전을 휘황찬란하게 만들라는 독려가 아니다. 나는 지금 가장 부유했던 교회가 세속적인 타락과 신앙의 유전을 업신여김으로 교회를 방치한 것에 대한 유감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버려지게 만든 교회, 그래서 세인들에게 깔봄을 당하여도 괜찮은 교회의 위상을 오늘 우리는 한국교회를 통해 여실히 보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런 한국교회의 현상을 나는 사데에서 보았다는 점이다. 왜 사데와 한국교회는 이렇게 닮은 점이 많은 것일까? 심히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림 39) 사데 유적지에 있는 교회 터 추정 장소 전술했듯이 사데는 엄청나게 부유한 도시였다. 사금이 흐르는 강이 있었기에 금광 산업으로 유명했고 염직 공업과 양털 염색 공업이 발달되어 의류 업이 번창했을 뿐만이 아니라 산과 물이 수려하고 풍부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상업이 발달하다보니 그로 인하여 막대한 부를 사데에게 안겨주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로 인하여 사데 교회 역시 세속적인 잣대로 보면 성경이 말한 대로 부유한 교회였다. 그러나 성경이 말한 그대로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는 것을 중명해 보인 교회가 사데 교회이기도 하다. 사치와 부도덕 그리고 아르테미 여신을 섬기는 우상이 교회로 들어와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게 됨으로 이름은 살았다 하니 완전히 영적으로 죽은 교회로 변질되기에 이른 것이다. 재강조하지만 나는 사데 교회를 보면서 옥 목사께서 갈파했던 것처럼 한국교회의 그늘을 본다. 전 세계적으로 단기간 내에 전 국민의 25%까지 복음이 전해졌던 민족이 우리 대한민국이다. 수없이 많은 교회들이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는 곳이 이 땅이다. 지리산 노고단까지 교회가 세워진 곳이 이 땅이다. 전 세계에서 단일교회로는 가장 큰 교회가 이 땅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렇게 엄청난 부흥을 경험한 교회인 이 땅의 조국교회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 속도를 멈출 수 있는 것이 이 땅에는 작금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치열한 영적 전쟁의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로서 받는 자괴감과 참담함은 이론적으로 설명이 안 될 정도이다.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나는 성경에 있는 사데 교회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이름은 살았다고 하지만 싸늘하게 죽은 교회였던 사데 교회가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정년 아닐까? 그래서 주님이 사데에게 주셨던 교훈이 예사롭지 않게 들린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 3:3) 깨어나야 한다고. 회개해야 한다고 교훈하시는 주님의 명령을 말이다. 요한계시록 3:3절만 보면 우울하고 암울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3:4절에서 희망을 본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 몇 명이 있다고 하셨다. 나는 조국교회에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이 사데 교회처럼 있다고 믿고 싶다. 이기는 자는 그 옷을 입으라고 명령하시는 주님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본다. 하루에 양극단의 교회 유적지를 보았다. 제발 한국교회가 빌라델피아 교회의 길로 돌이키기를 소망하는 화살기도를 드리고 버스에 몸을 싣는다. 이제 에베소로 이동해야 한다. 이동하는 시간이 약 3시 30분-4시간에 걸친 장거리이기에 에베소로 가는 도중 터키에 남아 있는 그리스 사람들의 마을로 유명한 쉬린제 마을을 들려 터키가 그리스의 통치를 받았을 때에 만들어진 터키의 그리스 흔적들을 경험해보는 색다른 시간을 갖는다는 가이드의 설명이 있다. 약 4시간을 옮겨야 하는 장거리 이동 시간에 가이드는 졸고 있는 여행객들을 위해 말로 서비스하지 않고 찬양을 틀어준다. 한국에서 자주 듣는 찬양 메들리라고 할까 연이어 귀에 익은 찬양들이 흘러나온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바울의 전도 여정을 추적하러 온 나, 나는 이 편안한 버스 안에서 관광객의 모습으로 바울이 도보로 수없이 많은 죽음의 위기를 극복하며 걸었던 그 길을 순례라는 명목으로 가고 있다. 소향 자매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빌려 나오는 찬양에 갑자기 너무 부끄럽고 송구스럽다. 주님과 바울에게. 아주 오래 전, 바퀴달린 십자가를 지고 서울 시청 광장을 횡보했던 당시 단일 개신교 단체로는 가장 큰 단체장의 개그보다 못했던 종교 쇼가 머리를 스쳐 지나쳐 간다. 나는 나의 달려 갈 길과 주 예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조금도 나의 생명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는 바울의 고백 아래에서 갑자기 머리가 백지가 된 것 같은 멍함이 엄습한다. 이럴 때는 눈감고 자는 것도 나를 방어하는 일인 양 싶어 나도 눈을 감았다. 참 비겁한 나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처럼 느껴질 때 즈음, 가이드의 마이크 소리에 비겁하게 호사하던 복도 끝이 난다. “차창 옆을 보세요. 좌우에 있는 산들을 보세요. 올리브 나무 끝이 안보이지요?”
그림 40) 쉬린제로 가는 산야에 펼쳐진 올리브 나무들 (이런 광경이 끝이 없이 보인다.) 정말로 쉬린제로 가는 길, 터키의 드넓은 산야에 펼쳐진 셀 수가 없을 정도로 육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전부 올리브(감람나무)다. 가이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터키 사람들은 유목민 출신들이기에 음식이 상하지 않도록 대체적으로 음식이 짜다고 한다. 동시에 양고기와 같이 기름진 음식들로 주식을 삼다보니 성인병들이 만연해 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길거리에서 본 여성들 중에 상당수가 비만 여성들이 보인다. 터키의 아름다운 여성상은 뚱뚱한 여자라고 한다. 왜냐하면 남성들이 그들의 부의 상징은 여성들이 잘 먹고, 편안하게 사는 살도록 해 주는 것이라 해서 여성들은 너나 할 것이 없이 풍만미를 자랑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기대 수명이 터키는 짧다. 올리브는 그래서 이들에게 생명을 단축시키는 해로운 음식 문화에 대한 중요한 대항식품이다. 정책적으로 올리브 나무를 대량생산하는 것이 그래도 저들에게는 나름 위안이다. 현지 식을 먹을 때 고유한 향신료 냄새로 고충이 심한 것 플러스 짠 음식도 나에게는 스트레스였는데 그 이유를 알게 된 셈이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쉬린제에 도착했다. 마을을 보니 가이드의 말대로 그 동안 보았던 터키의 가옥들이나 형태들이 완연히 다르다. 이번 성지 순례의 두 번째 방문 국가인 그리스에 도착하여 본 그리스 사람들의 생활상을 미리 엿 본 느낌이라 할까 하는 감흥이 생긴다.
그림 41) 쉬린제 마을의 풍경 자유롭게 쉬린제에서의 여유를 허락해 준 가이드의 배려로 쉬린제의 구석구석을 살필 수 있었다. 그림에서 보이는 500년 이상 된 마을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로 말하면 동네 시장을 통과해야 했다. 쉬린제가 관광지이다 보니 관광객들을 겨냥한 가게들로 즐비했다. 신기한 것은 장사하는 사람들의 한국어 구사 능력이었다. 한 가게를 지나치는데 호객을 하는 상인이 이렇게 말한다. “코리안? 한국사람? 나 울산 잘 알아요. 거기에서 3년 살았어. 한국 사람에게는 싸게 팔아요. 좋으니까. 디스카운트 해줘.” 문법도 어색하지만 그래도 한국말을 유창하게 쓰는 그가 정겹다. 8,000KM 나 떨어져 있는 이방의 나라를 기억해 주는 그의 장사치레 인사말조차도 정겹다. 올라가다보니 그리스 고유의 가옥은 갑자기 두 번째로 밀려나고 교회가 있다는 이정표가 있어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 42) 쉬린제 마을의 교회 이정표 모스크가 아니라 교회란다. 중간 지점에서 장사를 하는 여성에게 교회가 어느 쪽에 있는지를 묻자 친절하게 손짓하여 알려준다. 그녀가 알려준 대로 옮기자 정말로 교회가 있다. 이슬람으로 뒤덮인 한 복판에 교회가 있다는 것은 무조건 반가운 일이었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가 본 교회는 아뿔사 공사 중이라 가려져 있었다. 분명히 공사 기간 만료일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공사 중이어 유감스러웠다. 이것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교회라서 그런가... 다만 이 교회가 요한의 기념교회라는 레테르가 있었지만 그래도 마리아 상과 예수 상 앞에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들(가톨릭 처치의 멤버십을 갖고 있는 신자들)이 보여 마치 이슬람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는 것 같은 대리만족의 희열을 느껴보았다.
그림 43) 쉬린제 교회 앞에 있는 촛불 제단
그림 44) 공사 중이라 가림막이 되어 있는 쉬린제의 성 요한 교회당 터
공사 중인 교회를 보지 못하고 팀원들과 약속된 장소로 내려오는 길에 노점상 중에 교회 관련 성물들을 팔고 있는 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무슬림 신자가 95% 이상인 나라, 그런데 그런 라에서 교회 관련 성물들을 팔고 있는 가게가 생소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싶어 한 컷했다. 허나 씁쓸하다. 비잔틴 시대에 그토록 휘황찬란한 기독교 문화를 꽃피웠던 이 땅에서 이제는 예수와 관련된 일체의 것들이 박제화 되거나 상품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몹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림 45) 쉬린제 마을의 교회 성물 판매 가게 이제 셀추크(에베소)로 이동한다. 소아시아의 가장 큰 유적지인 에베소를 보기위해서이다. 이 일정은 내일 (6월 7일)로 잡혀 있다. 가이드가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셀추크로 가는 도중 패션쇼를 보게 될 것이라고 광고한다.
그림 46) 셀축으로 이동하는 노정에 경험한 패션쇼 양가죽으로 만든 옷들을 판매하는 옵션에 있는 판매장을 가는 것이다. 패키지로 이루어지는 여행이 다 그렇듯이 빠질 수 없는 여행사의 옵션이다. 나 원 참! 살다가 보니 패션쇼를 다 보고 하는 마음으로 가볍게 마음을 먹으면 될 것인데 왠지 불편하다. 그래도 명목이 성지순례인데. 셀추크로 이동하는 중간에 들린 패션쇼 장에서 1시간 동안 이방인으로 서성댔다. 목사로 살아온 세월이 26년이나 되어서 그런지 이제는 세속의 스펙트럼 안에 있을 때는 완전히 바보가 된 느낌이다. 빨리 숙소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패션쇼 장소에서의 시간은 참 느리게 간다. 모델들이 갖기 양가죽으로 만든 가죽 옷들을 걸치고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워킹을 하며 옷들을 광고한다. 모델들이 입고 나온 옷들이 화려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양가죽 옷을 입고 나온 모델들, 왠지 고깃덩이를 하나씩 둘러메고 나오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렇다. 우리 인간의 육체는 아무리 치장을 하고 또 치장을 해도 고깃덩이가 아닌가? 반드시 썩어질 고깃덩이 말이다. 그래서 창세기에 기록된 말씀이 다시금 나를 경성한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4:26) 히브리어 ‘에난’은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이다. 기막힌 통찰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사실이 말이다. 목사는 별 걸 가지고 다 영적으로 적용한다. 목사도 직업병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오늘 일정은 정말로 강행군이었다. 이동 거리가 살인일정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가이드가 이렇게 말하랴! “성지순례 팀의 일정처럼 여행하는 코스는 세계 어느 나라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신앙은 위대하기는 위대한가 보다. 이 엄청난 살인일정을 은혜로 받아들이니 말이다. 하기야 바울은 이 길을 도보로 감당했으니 두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소아시아 성지순례는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와야 한다는 것! 특히 양고기를 못 먹는 사람은 신중하게 결정할 것, 내일은 주일이다. 저녁에 숙소에서 먹는 햇반과 김치찌개 맛이 눈물을 나게 한다. 키리에 엘레이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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