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목요일 첫 날 약 13시간에 걸친 장시간의 비행, 도착하자마자 또 다른 터키 국내선으로 1시간 30분의 비행 그리고 4시간 정도의 장거리 버스 이동의 여독으로 인해 넉 다운이 된 상태라 그런지 호텔에서의 첫 날 거의 가사 직전까지 간 상태로 잠을 청했습니다. 6시간의 시차도 육체적인 고통을 더했습니다. 둘째 날 아침 호텔 조식은 거의 입에 대지 못하고 콘프레이크로 적당히 때운 뒤에 비몽사몽으로 비시디아 안디옥 유적지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렇게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바울 사도의 여정으로는 첫 번째 들린 비시디아 안디옥을 본 소감은 헛헛함이었습니다. 먼저 이 여정을 경험한 지인들의 말대로 기대 보다 실망이 크다는 말이 그대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관점으로 보면 돌무덤들처럼 보이는 버려진 땅들이 육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물론 이 땅이 기독교를 폄훼하는 이방 종교의 땅이고, 단지 관광객 유치라는 목적의 돈벌이를 위해서 모양새라도 남겨놓아야 하겠다는 터키당국의 속내를 감안하지 않으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정도로 방치된 바울의 유적지 비시디아 안디옥을 보면서 바울 당시 아주 역동적으로 사역했던 바울의 여정에 관한 성경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사도행전 13:13-14절에서 누가는 이렇게 보고합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바울이 제 1차 전도여행을 통해 사역을 시작했던 비시디아 안디옥은 지금 얄바치라는 터키 중부에 위치한 소규모 도시입니다. 들어가는 길목에 세워진 이정표만이 이곳이 바울 사도가 사역했던 비시디아 안디옥임을 외롭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림 8. 성서상 지명 이고니온(오늘의 지명: 콘야) 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 유적 이정표) 제 1차 전도여행을 시작한 바울은 버가를 거쳐 이곳에서 바나바와 더불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을 비롯한 안디옥 사람들에게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증언하기에 이릅니다. 그 내용의 중심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그 지방에 주의 말씀이 두루 편만하게 퍼지자 그곳이 이미 정착해 있던 유대인들이 바울을 핍박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이고니온으로 쫓아내었다고 누가는 증언합니다. 이후 비시디아 안디옥은 헬라 시대에 셀류시드 왕조에 편입되었고 로마가 이 땅을 정복하였을 때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이 곳에 강력한 군대를 주둔시켜 시리아 안디옥과 또 다른 차별성을 두기 위해 비시디아 안디오키아라고 이름을 명명했다고 이정표는 설명합니다. 유적을 보기도 전에 이정표를 보며 안타까웠던 것은 바울은 이정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St, Paul one of the twelve apostles of Jesus Christ” 이방 종교의 땅에 비쳐진 바울의 모습은 여과 없이 그리고 진단 없이 예수의 12명의 제자 중 한 명으로 정의될 지경입니다. 또 하나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이방 땅 터키에 남겨져 있는 기독교의 현주소입니다. 이정표를 거쳐 드디어 비시디아 안디옥의 유적 터 안으로 들어가자 로마 시대의 흔적들이 펼쳐졌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회당의 흔적, 로마 시대 건축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왕의 거리 카르도의 흔적, 사람들이 물건을 팔고 샀던 아고라 광장, 음악과 로마의 귀족들을 위해 펼쳐진 연극 마당인 오데오 극장, 그리고 신으로 추앙받던 아우구스투스의 신전의 흔적을 눈으로 보면서 바울이 황제 숭배와 유대 종교 신봉자들과 맞서서 이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며 사역했던 그의 외침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캠코더를 들고 회당 안 한 복판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교우들을 위하여 흔적들을 담을 때 바울이, 외쳤던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행 13:32-33)
(그림 9. 비시디아 안디옥 유적지 흔적들_ 아고라 광장 길과 아우그스투스 신전으로 가는 길)
(그림 10. 비시디아 안디옥의 바울 교회 터)
(그림 11. 바울과 바나바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외쳤던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 터) 비시디아 안디옥 견학을 마치고 얄비치 읍내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데 충북지방에서 같이 사역했던 5명의 목사 부부와 반갑게 조우를 했습니다. 함께 사역 하던 시절, 같이 주의 복음을 위해 달려간 지인 목사들이 찾아와 인사를 나누면서 참 세상이 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억 만 리 외국 땅에서 그들을 만날 것이라고 상상이나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반가움은 반가움이고 점심 식사 메뉴로 나온 케밥은 역시 나를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아내와 나는 양고기가 체질에 맞지 않는데 터키에 온 이후 계속 양고기 파티가 이어지고 있어 난감하던 차에 가이드와 현지 가이드가 우리 부부의 고통을 알고 본인들이 시킨 양고기보다 훨씬 더 저렴한 닭고기 메뉴와 바꾸어서 식사를 제공해 주어 무한(?) 감사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이 버가에서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전도의 여정을 감당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순례 팀은 일정상 그 반대의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 성서상의 이름은 버가로 알려진 지금의 안탈리아로 이동한 것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럽 사람들이 죽기 전에 꼭 한 번 가기를 원할 만큼의 아름다운 자태를 가지고 있는 지중해가 보이는 안탈리아 항구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험준한 산맥이 있습니다. 타우루스 산맥입니다. 안탈리야로 가는 여정에서 새록 경험한 두 가지의 이야기를 나누어 볼까 합니다. 첫째는 양귀비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양귀비를 재배하는 경우, 처벌의 이유가 됩니다. 마약 관리법을 위반하는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찔끔 보았던 양귀비를 안탈리야로 가는 길에 빈번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양귀비는 자연산입니다. 사람이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자라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 사람들은 이 양귀비를 마약화 시키지 않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궁금하시지요? 간단합니다. 이 양귀비는 마약 성분이 없는 개양귀비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복통과 설사에 특효가 있어 귀한 약재로 사용되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림 12. 안탈리야로 가는 길에서 본 개양귀비 꽃)
두 번째는 타우루스 산맥입니다. 해발 3,500m 고산지역을 휘감고 있는 타우르스(현지명 토로스) 산맥은 험준하기로 유명합니다. 안탈리야로 가는 길은 이 길이 첩경이기에 반드시 넘어야 하는 이 산을 약 3시간의 이동 여정을 통해 넘어가면서 느꼈던 감흥은 놀라움 그 자체였습니다. 6년 전, 출애굽 여정을 위한 성지 순례 길에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 요르단의 암만으로 향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풍광의 아름다움이 아닌 아픔의 추억이 저에게는 있는데 멀미의 고통이었습니다. 좀처럼 멀리를 하지 않는 체질인데 그 날은 대관령 옛날 골짜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곡선 도로가 끝없이 펼쳐져서 그런지 심한 멀미에 많이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소아시아를 출발하기에 앞서 사전 정보로 인지한 사항은 타우르스 산맥이 아르논 골짜기에 버금간다는 정보였기에 아내와 저는 미리 멀미약을 복용한 상태였기에 곤한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간 중간 바울이 도로로 세 번을 넘었던 이 길을 잠으로 완전히 망칠 수 없다는 의지를 갖고 의도적으로 깨어 타우르스 산맥을 느껴보았습니다, 험준한 산세, 구불구불한 도로 사정에도 불구하고 신기에 가깝게 대형버스를 운전하는 아비(터키어로 큰 어른을 지칭하는 말) 우전 실력에 감탄하며 소위 말하는 왕의 길이었던 이 길을 무례하게도 버스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본인이 복음을 전하는 어간, 당했던 수많은 고통을 다음과 같이 피력하지 않았습니까?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6-27) 바울의 여정을 추적하는 나는 이 구절 앞에서 초라해집니다. 버스로 이동하는 안락함 속에서 멀미를 걱정하며 약을 먹는 내가 순례자입니다. 바울은 이 타우르스 산맥을 넘으며 수많은 강도의 위험을 넘었거늘. 당시 안탈리아 항구에서 해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수많은 패거리들이 영역 싸움에서 실패한 뒤 안탈리아 항구에서 쫓겨났는데 배운 것이 도적질 말고는 없어 그들 중 상당수가 타우르스 산맥으로 들어와 산적이 되었다는 가이드를 이야기를 들으며 강도의 위험을 당했다는 바울의 말이 얼마나 피부로 와 닿든지.
(그림 13. 타우르스 산맥이 저 너머 보인다.)
타우르스 산맥을 넘어 도착한 곳은 버가 (현지명 페르가)였습니다. 누가는 그의 글에서 이렇게 바울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행 13:13-14) 버가는 터키에서 스스로 보물이라고 할 정도로 아끼는 유적지 중에 하나임을 버가 출입구에 붙어 있는 배너가 순례자에게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들어가기 전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를 거쳐 버가로 먼저 들어갑니다. 성경은 버가에서의 바울 사역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비시디아 안디옥을 가기 위해 위해서 이곳을 거쳐 타우르스 산맥을 넘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버가 유적지에 들어섰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 비해 그 규모가 상당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유적지에 비해서는 조금은 작았지만 그래도 로마 시대에 이곳 버가가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흔적들이 상당수 지금도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로마 시대의 유적지임에도 불구하고 헬라 시대의 탑문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점입니다. 헬라 시대의 아치형 출입문을 통과하는 데 헬라시대에서 마치 로마 시대로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제국과 또 다른 제국이 맞다있다는 그런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이드는 그 문을 헬레니스틱 도어 즉 헬라시대의 문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의미가 있었습니다. 헬라의 시대를 뒤로 하고 문지방을 넘어 서니 장대한 로마의 건축물들의 흔적들이 펼쳐졌습니다. 지진으로 인해 말 그대로 돌무더기이지만 로마 시대에 귀족들이 살고 있는 집성촌과 같은 지역에 항상 그 위엄을 보여주는 장대한 대리석 기둥들과 그 기둥 사이에 나 있는 당시의 시대적 감각으로 말하면 대로의 형식을 갖고 있는 왕의 도로(길)가 아직도 그 위용을 보여줍니다. 선명한 것은 아고라입니다. 그 대로를 중심으로 양편에 만들어져 있었던 시장의 터들 역시 버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였는가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버가는 골로새나 비시디아 안디옥에 비해 지금도 복원 작업이 활발했습니다. 아마도 국익에 상당한 도움을 줄 것을 기대한 터키 당국의 정책적인 입김이 들어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때마침 적지 않은 젊은이들(나중에 물어보니 안탈리아에 있는 대학생들)이 유적지 곳곳에 앉아 데생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글을 쓰는 것을 눈 여겨 보았습니다. 그들은 아주 진지하게 버가의 유적지에서 그들의 역사를 다시 살리고 있었습니다.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나는 대한민국의 아픔들을 곱씹었습니다. 여행 기간 중에 호텔에 비치되어 있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리랑 방송국의 뉴스를 통해 본 조국은 메르스 공포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초기 대응의 실패로 인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은 물론 그 여파로 인해 피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는 염려 어린 보도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은 지금 조국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88만 원 세대로 점철된 우리나라 20대의 젊은이들은 내 나라의 역사에 대하여 어떻게 진단하고 있을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단골메뉴는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우리나라의 방패막이적인 슬로건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나라 스스로가 그 말에 대답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착잡했습니다. 버가의 또 다른 볼거리는 목욕탕이었습니다. 찬물과 더운 물을 동시에 공급받도록 만들어진 과학적인 건축구조가 볼거리였습니다. 동시에 목욕탕은 귀족들의 쉼터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에 삶을 말했고, 죽음을 토론했을 것입니다. 나름 그들은 그 당시 누리는 혜택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그들은 스스로 즐기던 목욕문화로 인해 망했다는 역사의 증언입니다. 귀족들을 위한 목욕을 위해 24시간 더운 물이 공급되어야 했고 노예들은 주변에 있는 산에 있는 삼림들을 벌목하여 땔감으로 사용했고 벌목의 난개발은 산사태를 일으키고 기후 변화를 초래했고 그 지역은 말라리아와 같은 전염병이 창궐하여 그 도시 전체를 몰락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안락함을 위해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의 피조물을 인위적으로 손댈 때 그 재앙이 인간에게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것을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의 고대 도시들을 통해 서슬이 시퍼렇게 알려줍니다. 이번 소아시아 성지 순례의 결론적인 교훈 중에 하나를 가는 곳곳마다 동일하게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유지하라’ 이것을 파괴할 때 인간은 그 파괴의 대가를 고스란히 받게 되어 있다는 살아있는 교훈을 저는 공부했습니다. 4대강 사업은 우리나라 역사 이래 최고의 저주스러운 사건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처럼 정치의 문외한인 사람이 이 4대강 사업을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월권이라고 여기기에 가타부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의 지형과 형태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프로젝트를 그대로 보기에 좋게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일 해놓으심을 파괴한 것이 4대강 사업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재도 그 톡톡한 아픔의 대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더욱 우려스럽고 두려운 것은 훗날 우리 자손들이 짊어져야 할 혹독한 대가가 눈에 그려진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것 외에는 안전하고 완벽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버가에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로마의 휘황찬란한 신전 기둥들, 찬란하게 빛났던 왕의 대로, 수많은 귀족들이 안락함과 편리함에 빠져 있었던 각종 기구들 그것들이 영원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휘황찬란함은 돌무더기로 바뀌어 있습니다. 바울이 목도한 2,500년 후의 버가를 그리며 당시에는 소리 없는 힘없는 아우성과도 같았지만 오늘 우리들에게는 벼락같은 생수의 말씀인 고린도후서 4:18절은 그래서 날마다 묵상해야 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그 날 늦은 오후 성지순례의 보너스로 안탈리아 항구의 아름다운 지평선과 하드리안 문에서 본 지중해의 일몰은 두고두고 기억할 것 같은 또 하나의 볼거리였습니다.
(그림 14. 버가 유적지 출입문 앞에 설치된 배너: 터키의 보물이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그림 15. 버가 유적지: 목욕탕)
(그림 16. 헬레니스틱 출입문)
(그림 17. 버가의 아고라 대로)
(그림 18. 버가의 신전터로 가는 길)
6월 4일 오후 늦은 시간
그림 19) 안탈리야의 하드리안 게이트 유럽 사람들이 한 번은 죽기 전에 가보기를 원한다는 안탈리아의 지중해 배경은 고즈넉하고 넉넉해 보였다. 오후 늦은 시간, 호텔로 들어가기에 앞서 둘러 본 구시가지는 고대 건물 중에 하드리안 문으로 연결되는 2층 고택들과 유럽 사람들이 많이 방문하는 장소라서 그런지 유럽풍의 각종 레스토랑들이 즐비했는데 특히 길거리에서 만난 터키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호의는 특별했다. 6.25 동란 때 연합군 병력으로 참전해 준 혈맹(?) 다운 인연이 있어서 그런지 만나는 사람마다 ‘짝짝짝짝 대한민국’ 을 연호해 주어 8,000km 떨어져 있는 이국 땅에 있는지 아니면 시청 앞 광장에 있는 것인지 착각을 할 정도였다. 바다 내음 물씬 풍기는 안탈리야 항구의 이면 도로를 가로 질러 구 시가지를 관통한 뒤 신시가지로 연결되는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방문하여 세웠다는 하드리안 문은 그 위풍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시내 관광을 마치고 피곤한 육체를 달래기 위해 호텔로 들어가 짐을 풀고 대충 샤워를 한 뒤 아내와 함께 저녁 식사를 먹기 위해 호텔 레스토랑으로 내려가 즐비한 음식들을 대했지만 역시 나는 고문 중에 고문을 당했다. 먹을 수 있는 과일 사냥만 하고 다시 룸으로 들어와 준비해 간 햇반과 컵 라면으로 저녁 식사를 하고 나니 행복감이 밀려왔다. 나는 역시 뼛속까지 한국 사람이구나 하는 뭐 그런 느낌, 역시 이른 시간 오후 8시가 갓 넘었을까 하는 초저녁인데도 내일을 위해 짐을 싸는 아내에게는 정말로 미안하지만 넉 다운되어 잠을 청하고 나니 모닝콜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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