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차정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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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새물결 플러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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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11-30 21:23: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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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식의 “시인들이 만난 하나님” (새물결 플러스)을 읽고, 2014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살아온 지도 1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고향 인천에서 태어나고 자라온 시절을 제외하고 거주한 산술적 시기로만 본다면 이곳이 나의 제 2의 고향인 셈이다. 지방 소도시에 살다보니 문화, 교육, 생활 등등의 인프라 측면에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참 많은 손해를 보고 산다. 제대로 된 연극 하나를 볼 수 있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러나 11년을 이곳의 사람들은 그런 삶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대도시 사람들이 누리고 있는 혜택들에 대하여 망각이든 포기이든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이제는 그저 그러려니 하는 습관화 된 체질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괜찮은 것처럼 여기고 있기에 참 다행스럽다. 제천에서 교회를 섬기고 있는 필자는 이런 무감각이 싫어서 그런지 아니면 직업의식(?)이 발동해서 그런지 삐딱함을 견지하며 산다. 그런 삐딱함에서 이제는 한 발 더 나아가 대도시 중심의 삶과 농촌을 포함한 지방 도시의 삶에 대하여 아주 의도적으로 어떤 것이 더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볼 때 합당한 지를 신학화 하려는 웃기지 않는 일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나에게는 지방의 도농복합 도시에서 살고 있는 피해의식의 잠재성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고집스럽게 이런 신학화를 위한 간접적 자문을 위해 이런 자료, 저런 자료 그리고 책들을 나름 관심 있게 읽다가 작년 초, 한일장신대에서 신약을 가르치고 있는 현직 교수인 차정식 박사의 ‘예수, 한국사회에 답하다.’라는 책을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치열한 담론 23가지를 성서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분석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한 책이기에 말이다. 차 박사는 보수적인 색채가 있는 사람들이 보면 소위 말하는 좌파적 근성이 농후하다. 해서 읽는 이에 따라 갑론을박이 치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서평자는 그래서 더 신선함으로 이 책을 따라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갈릴리 편애 사역을 신학적으로 정당화시켰다. 이 지적은 그냥 쉽게 넘어갈 담론이 아니다. 이유는 서울 중심으로 확립된 일체의 체제가 성서적으로 얼마나 그릇된 일인지를 처절하게 고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 교수는 예수의 고집스러운 갈릴리 집중 사역은 예수의 의도였다고 역설했다. 갈릴리를 업신여기는 것, 갈릴리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것, 갈릴리를 소외시키는 것은 비성서적이요, 비신학적인 행태임을 여지없이 비평하면서 갈릴리 중심의 사역을 감당했던 예수의 본(本)을 전도(顚倒)시킨 오늘의 한국교회가 돌이켜야 함을 강조한 것을 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대변한 것 같아 대리만족의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말머리가 길었고 장황했다. 작년에 나에게 적지 않은 위로를 주었던 차 교수를 금년 여름에 아주 색다른 책에서 색다른 색깔로 만나는 행운을 만났다. ‘예수 한국 사회에 답하다.’에서 작년에 조국의 사회학적인 문제를 신학자의 고견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한 글을 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면 금년에는 신학적 스펙트럼으로 문학적 지식을 펼쳐준 선물을 그에게서 받았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새물결 플러스에서 간행한 ‘시인들이 만난 하나님’이라는 차정식 교수가 쓴 기독교적인 인문학적 서적을 예기치 않게 만났다. 신학교 후배이자 같은 독서 여행 동반자인 사모님이 정성으로 보내준 책이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아주 고즈넉하게 행복한 여행을 떠났던 기억이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운을 띠었다. “이 세상의 한 시절을 가장 치열하게 살아간 시인들이 꿈꾸고 만난 하나님, 어쩌면 낯설고 희한한 미지의 신과 그 신의 나라에 대한 신학자의 보고서이다.” 나는 그의 고백을 책 전체에 걸쳐 그가 분석하고 있는 숨김없는 고통의 보고서를 통해 재확인했다. 필자가 고통의 보고서라고 논한 것은 시인들의 하나님은 통상적으로 오늘의 보수적 틀에 젖어 있는 한국교회에서 가르친 전형적인 하나님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불신자보다 더 치열하게 하나님께 시인들을 도전한다. 그러나 그 도전에 나는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근래 들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소위 말하는 안티 기독교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몸부림을 시인들을 통해 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지만 필자는 도리어 시인들이 독설하고 있는 모양만 있는 외형적인 교회에 대한 비수가 통쾌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동시에 그들 중에 일부가 토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반기는 하나님께 대한 반기가 아니라 본질을 떠난 교회에 대하여 어쩌면 침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께 대한 울부짖음이었기에 나는 그들에 토설에 공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측면의 시선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시인들의 설파들이 필자를 깨우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차 박사의 이 책은 적어도 한국교회를 위해 아파하는 지식인들이라면 그 중에서 좌우로 편중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목사들에게는 꼭 한 번 읽었으면 하는 양질의 도서임에 틀림이 없다. 저자는 근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대표적인 시인 36명의 시들을 책에서 소개하며 분석했다. 그는 시인들의 테마를 초월과 방랑, 역사와 자연이라는 첫 틀을 기점으로 하여 치열한 대결의 장인 거룩한 세속의 장으로 글을 잇고 있다. 더불어 시인들이 포기할 수 없는 관조의 결과를 성찰이라는 초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런 유희 뒤에 시인들이 노래한 생명의 아름다움을 창조의 섭리로 해석하는 뛰어난 혜안을 저자는 보여 준다. 이 정도의 계관은 인문학적 내공이 없는 한 도무지 뚫어낼 수 없는 지성의 산물이다. 더군다나 신학자의 눈으로 풀어낸 시인들의 속마음 들추기는 마치 수줍은 처녀가 숨기고 있는 속살을 보기 좋게 드러내놓게 하는 영적인 카타르시스까지 부여해 준다. 책 자체의 방대함으로 인해 전체를 서평 하는 것은 어떤 문고에 기고하는 전문적인 상황이 아니고서야 미련한 일임을 알기에 필자가 느꼈던 몇 가지의 감동만을 공개함을 용서해 주기를 바란다. 처음으로 책에서 만난 백석은 그가 잉여 인간의 신세로 남신의주의 유동에 있는 박시봉씨네 집에서 세를 들어 살던 시절을 추억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을 만났다. 정말로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백석은 자신이 세를 들고 있었던 집주인에게 편지 형식으로 글을 썼다. 그는 당시의 회한을 이렇게 기술한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어느 인간이 풍요로움 속에서 탄생하고 또 죽어 가는가? 그것은 일반의 예가 아니다. 어떤 의미로 보면 우리 모두는 습내 나고 춥고 누긋한 방에서 삶을 시작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곳에서 삶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일반일진대 중요한 태도는 백석이 시의 연 끝에서 말 한 대로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는 희망을 갖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아주 오래 전에 쇼생크 탈출을 보다가 막 울었던 적이 있다. 마치 내가 팀 로빈슨이었던 착각 때문에. 나는 그 때 그가 말했던 대사를 잊지 않고 간직하고 살아간다. “희망이란 좋은 것이야. 사라지지 않는 것이기에.” 저자는 김지하 시인의 ‘새 교회’라는 자연신학의 통찰을 담은 시를 소개한다. 시인은 이 시에서 고정화된 공감적 개념의 교회가 아닌 그 공간을 초월하는 교회의 새 모델링을 제시하고 있다. “풀잎들 신음하고 흙과 물 외치는 날 나 오랜 만에 교회에 간다. 산위에 선 교회 벽만 있는 교회 지붕 없는 교회 해와 달과 별들이 나와 함께 기도하고 혜성이 와 머물고 은하수와 성운들 너머 온 우주가 내려와 춤추고 여자들이 벌거벗고 웃는다. 흰 수건 흔들며 노래한다. 유혹인가? 나의 새로운 교회 풀잎의 흙과 물의 교회 새 예수회 교회 꿈인가?” 나는 시인의 이 시어들을 읽으며 잠시 동안 침잠했다. 이유는 시인이 원하는 새 교회와는 너무 이질적인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김지하의 교회가 이 땅에서 가능할까? 를 생각하면 심히 고통스럽고 힘이 든 것이 사실이다. 이유는 저자의 해석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교회는 인간에 의한 인간만을 위한 교회였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우주 만물이 지붕 없이 열린 하늘을 향해 예배하는 교회를 꿈꾼다.” 시인의 소망을 분석한 저자는 또 다른 자연신학에 의거한 시인의 꿈꾸고 있는 교회론을 제시한다. “풀잎의 흙과 물의 교회로서 이 땅의 환경오염과 생태 파괴로 신음하는 풀과 흙과 물의 건강을 회복하는 데 복음의 관심이 미치는 장소를 지향한다. 비록 ‘나의 새로운 교회’ 수준에 머물고 있지만 그 사적인 공간은 ‘우리의 교회’로서 공적인 장소로 진화해야 할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듯하다.” 이 시와 해석을 접하면서 전술했듯이 침잠했다. 이질감의 괴리 때문에. 아, 오해는 마시라. 필자 역시 전통적인 교회의 측면에서 보는 것과 같이 철없는 유토피아주의자들의 넋두리라고 치부하면서 괴리감을 표하는 것이 아니기에. 필자가 침잠한 이유는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조국교회의 무기력에 기안한 괴리감 때문이다. 방법은 없는 것일까? 29세의 나이에 안타깝게 요절한 기형도 시인의 시로 들어가 보자. “읍내에서 그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철공소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는 양철 홈통을 반듯하게 펴는 대장장이의 망치질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자전거 짐틀 위에는 두껍고 딱딱해 보이는 성경책만한 송판들이 실려 있었다. 교인들은 교회당 꽃밭을 마구 밟고 다녔다, 일주일 전에 목사님은 폐렴으로 둘째아이를 잃었다, 장마통에 교인들은 반으로 줄었다, 더구나 그는 큰 소리로 기도하거나 손뼉을 치며 찬송하는 법도 없어 교인들은 주일마다 쑤군거렸다. 학생회 소년들과 목사관 뒤터에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은 적도 있었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집사들 사이에서 맹렬한 분노를 자아냈다, 폐렴으로 아이를 잃자 마을 전체가 은밀히 눈빛을 주고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에 그는 우리 마을을 떠나야 한다. 어두운 천막교회 천장에 늘어진 작은 전구처럼 하늘에는 어느덧 하나둘 맑은 별들이 켜지고 대장장이도 주섬주섬 공구를 챙겨들었다. 한참동안 무엇인가 생각하던 목사님은 그제서야 동네를 향해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저녁 공기 속에서 그의 친숙한 얼굴은 어딘지 조금 쓸쓸해 보였다.” 저자는 이 시를 소개하는 본인의 책에서 시를 분석하는 내내 여타 앞선 다른 시들과는 달리 행복감을 표출하고 있다. 현직 신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목사로서 마음 놓고 본인의 신분을 드러내 놓지 못하는 목사로서의 자존감 상심의 기저에서 마음껏 본인의 속내를 표출할 수 있는 시를 오랜 만에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는 시를 통해 10년 체증으로 막혀 있는 위장이 속 시원하게 뚫린 것 같은 감흥으로 이 시를 해석하고 있다. 원 저자에게로 시선을 돌려보자. 시인은 ‘우리 동네 목사님’ 이라고 시 제목을 썼다. 이것은 파격이다. 기형도 시인은 죽은 뒤에 천주교 공원 무덤에 안장되었고 그 무덤가에 영세명으로 ‘그레고리’라고 쓰인 것을 보면 그가 천주교인의 흔적을 어렴풋이 갖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거듭난 천주교인으로 확실하게 증언할 만한 그의 작품 속에서의 영성이 보이지는 않는 것을 전제할 때 그가 그의 유작인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고 호칭한 것은 그가 직접 시의 주인공으로 발탁한 개신교회의 성직자인 동네 목사님을 비극이지만 보기 드문 진짜 목사님(?)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리라. 기형도 시인은 이 시에서 주인공 동네 목사님에 대하여 아주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먼저 이 시의 주인공 목사는 별로 부흥이 되지 않는 전통 교회의 목사였음을 밝힌다. 천막 교회의 보잘 것이 없는 교회를 맡았고 읍 단위 농촌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그래서 그는 경제적으로 아주 척박한 삶을 살아야 하는 목사였음이 저자에게는 더욱 호감이 가는 대목처럼 여겨진다. 그런데도 동네 교회 목사는 미자립을 탈피하는 수단인 교회 부흥을 목적으로 삼는 목회를 하지 않는다. 그는 교인들로 하여금 박수를 치게 하고 통성으로 기도하게 하는 전통적인 목양을 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동네 교회 목사는 둘째 아들이 폐렴으로 죽고 만다. 장마가 났을 때 농사를 짓는 교인들은 상심하여 교회를 떠나 반 토막이 나는 사단이 일어났다. 그런데도 목사는 긴장하지 않고 설교를 할 때 이렇게 설교를 한다.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고. 동네 교회 목사는 사정이 이런 데도 교회 텃밭에서 학생들과 함께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지각을 한 적도 있음을 소박하게 토로한다. 이제 교인들은 서로가 눈으로 은밀한 눈빛을 보내며 무언의 동의를 한다. 무능한 목사, 성장에는 관심이 없는 목사, 이상한 설교만 하는 목사, 그래서 하나님의 징벌로 인해 아들까지 잃은 목사로 치부하여 교인들은 그를 내쫓기로 결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천막 교회를 목회하는 목사로서의 직도 잃게 되었다.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이번 주에 교회에서 쫓겨나는 신세인데 그는 읍내 철공소에 자전거를 타고 나가 대장장이 망치질을 유심히 본다. 본 뒤에 해가 질 무렵이나 되어 다시 동네를 향하여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고 시인은 독백한다. 이유는 뭔가 허접하기는 하지만 본인이 떠나야 하는 교회에서 끝까지 텃밭에 필요한 시설들을 마무리하고 떠나려고 하는 우리 동네 목사님의 일화를 따뜻하게 그러나 서슬이 시퍼렇게 변하지 않고 교리의 틀 안에 박혀 있는 교회 신자들과 공동체를 향하여 비수를 꽂고 있다. 시인은 시의 주인공 목사를 ‘목사님’이라고 호칭한다. 더 큰 따뜻함은 ‘우리 동네’의 목사님이다. 시인은 자기 동네의 목사님을 통해 적어도 목사라는 성직의 표상을 요즈음의 일탈된 목사의 표상으로 보지 않고 정말로 아름다운 목사로 인정하고 있다. 우리 동네 목사님은 40일 금식기도 3회를 마친 불의 사자도 아니다. 병자들을 벌떡 벌떡 일으켜 세우는 신유의 종도 아니다. 자기가 마음을 먹으면 방언의 은사도 팍팍 만들어 주는 성령 사역자도 아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선 후보에게 표를 던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워버릴 수 있다고 소리치는 해석 불가능 목사는 더 더욱 아니다. 조금만 불리하면 신자들을 동원하여 방송국으로 쳐들어가 데모하게 하는 유치한 목사도 아니다. 기형도는 시 속에서 등장하는 목사를 교회 텃밭에서 푸성귀를 심다가 저녁 예배에 늦는 대책이 안서는 목사로 지칭한다. 설상가상으로 교회 부흥과는 담을 쌓았다. 전통적 가치관에 붙들려 있는 성도들에게는 성경이 아니라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생활에 밑줄을 치면서 살라고 말하는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는 목사로 소개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런 무능하고 이상한 목사의 무능함을 심판하셔서 둘째 아들을 치셨다는 신자들로 하여금 확신까지 하게 한 무능하고 실패한 목사로 등장한다. 그래서 드디어 교인들에게 배척까지 당한다. 헌데도 시인은 이 형편없는 목사를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고 지칭한다. 기형도 시인은 왜 이렇게도 동네 교회 목사에 대하여 호의적이었을까? 아마도 시인이 이렇게 인정한 것은 전통적 교회 가치관과 조직체 안에 있는 자기 아집으로 굳어져 있는 신자들과는 달리 그는 주인공 목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주목하며 본인도 욕심내지 않고 성실하게 그리고 소박하게 교회를 섬겼던 이 시대에 정말로 개신교적인 성직을 잘 감당해 주고 있는 신실한 목사라고 인정했기 때문은 아닐까! 자연을 아름답게 사랑한 목회자, 그래서 아이들에게 자연의 귀함을 가르쳐 주었던 목회자, 천막 교회에서 드리워진 전깃줄을 교체할 수 없을 정도의 경제적인 곤란함이 있는 교회이었지만 그 교회에서 묵묵히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 이런 정도라면 삶을 위해서라도 인위적인 부흥을 노래해야 하지만 교회의 역할이 부흥이 먼저가 아니라 성도들의 실천적인 성경적 삶임을 가르쳐 주며 사역한 목회자, 결국은 교회에서 배척을 당해 사역지를 잃게 되었지만 끝까지 본인의 사역을 인식한 목회자로 보였기에 시인이 그를 우리 동네 목사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오늘 기형도가 그린 우리 동네 목사님은 얼마나 될까? 그립다. 이제 아쉽지만 한 명만 더 소개한다. 안도현 시인의 나라로 가보자. 시인은 2008년에 ‘간절하게 참 철없이’라는 기막힌 산문시집을 출간했다. ‘기막힌’ 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 시집을 읽지 않고서는 이해 불가이기에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 먹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에 패스트푸드로 망가져 있는 우리네 식탁을 고향집의 외할머니의 맛깔스러운 토종 음식의 추억으로 시인은 되살린다. 그의 산문시를 몇 가지 보자. 무말랭이 외할머니가 살점을 납작납작하게 썰어 말리고 있다 내 입에 넣어 씹어 먹기 좋을 만큼 가지런해서 슬프다 가을볕이 살점 위에 감미료를 편편 뿌리고 있다 몸에 남은 물기를 꼭 짜버리고 이레 만에 외할머니는 꼬들꼬들해졌다 그 해 가을 나는 외갓집 고방에서 귀뚜라미가 되어 글썽글썽 울었다 매생이국 저 남도의 해안에서 왔다는 맑은 국물도 아니고 건더기도 아닌 푸른 것, 다만 푸르기만 한 것 바다의 자궁이 오글오글 새끼들을 낳을 때 터뜨린 양수라고 해야 하나? 숙취의 입술에 닿는 이 끈적이는 서러움의 정체를 바다의 키스라고 해야 하나? 뜨거운 울음이라고 해야 하나? 입에서 오장육부까지 이어지는 푸른 물줄기의 폭포여 아무리 생각해도 아, 나는 사랑의 수심을 몰랐어라 수제비 비 온다 찬 없다 온다간다 말없다 처마 끝엔 낙숫물 헛발 짚는 낙숫물 개구리들 밥상 가에 왁자하게 울건 말건 밀가루반죽 치대는 조강치처 손바닥 하얗게 쇠든 말든 섰다 패를 돌리는 저녁 빗소리 갱죽 하늘에 걸린 쇠기러기 벽에는 엮인 시래기 시래기에 묻은 햇볕을 데쳐 처마 낮은 집에서 갱죽을 쑨다 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죽 훌쩍이며 떠먹는 밥상 모서리 쇠기러기 그림자가 간을 치고 간다 저자는 시인의 토속적인 음식의 나열과 예찬을 예수께서 베푸셨던 식탁공동체의 향유라는 신학적 의미로까지 그 뜻을 확대하고 있다. 저자가 본 향유(香油)에 대한 신학적 조망은 하나님의 창조 회복이란 차원에서 우리 시대에 전방위적으로 퍼져 있는 물화(物化)를 경계하는 대안으로 분석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음식은 분명히 예수께서 사역하시는 동안 주목하셨던 가치였다. 이런 차원에서 저자가 안도현 시인의 토속적인 음식예찬은 단순히 음식만의 소개나 나열이 아닌 예수 믿는 자들에게 태초의 원시적인 음식에 대한 영적 감각을 회복시키고 식사에 대한 경건한 전통을 되살릴 수 있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 것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외할머니가 만들어준 무말랭이 무침은 눈물 나게 그리운 추억과 사랑의 조미료가 담긴 언어였다. 매생이국의 끈적거림을 바다의 자궁에서 터트린 양수라 했다. 바다의 키스라고도 했다. 얼마나 진한 원초적인 그리움을 지닌 맛인가? 고향의 냄새가 그윽한 찬 없이 먹는 수제비를 보고 밀가루 음식은 살을 찌개 하는 원흉이라고 누가 감히 타박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로 가난한 시절, 똥구멍이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시절, 밥알보다 나물이 많아서 슬픈 갱죽을 먹었지만 그러나 그 고향에서 우리는 미래를 꿈꿔왔다. 그렇다면 고향의 음식은 예수님의 밥상 공동체를 생각나게 하는 삶의 본질과 희망이 아니겠는가? 이런 감성적 표현의 주인공이 박근혜씨가 대통령을 있는 한 시를 쓰지 않겠다고 절필토록 한 이 시대는 분명 우울의 시대임에 틀림이 없다. 필자는 차정식 박사의 본 책을 통해 두 가지의 도전을 받았다. 첫째 어휘력이다. 우리글의 대한 어휘 구사는 내공이다. 글 내내 백기완 선생께서 쓰셨던 어휘들을 다시 보게 된 것은 기쁨이었다. 김기석 목사의 글 중에서 만난 어휘들의 재음미를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은 공감의 기쁨이라고 할까! 차제에 다시 한 번 우리글에 대한 공부를 소홀하지 말아야 함을 각인시켜 주었다. 둘째는 왜 신학자와 목회자가 인문학의 꾸준한 공부가 필요한지를 여실히 보여준 도전을 주었다. 목회자인 내가 모든 이해와 해석의 지평을 신학적 카테고리 안에서 머물려고 할 때 얼마나 무지한 지를 보여줄 수 있는 것임을 저자는 이 책에서 알려주었다. 지면상 전체의 시인들을 아우르는 것이 녹록한 일이 아니라 몇 편의 작품만을 소개한 것이 아쉽다. 언젠가 네이버 블로그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시인은 안 보이는 나라를 사랑하는 자이다.” 몇 번이고 이 책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한 명언임을 재삼 느꼈다. 그러고 보니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7)는 고백대로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진정한 시인으로 이 땅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멀리 사는 후배이자 독서 여행 친구가 보내준 ‘시인들이 만난 하나님’ 은 2014년 내가 읽은 랭던 킬키의 ‘산둥수용소’와 더불어 베스트에 들어가는 수작이었다. 후배 사모님께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사족 하나) 아들, 시문학의 통전적 이해가 없이 인생을 관조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든 일인지를 저자가 알려주었다. 앞으로 아들이 펼쳐 나갈 목양터가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시와의 정기적인 만남이 필요함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아, 그리고 우리글에 대한 어휘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기를. 2014년 8월 29일 오후 5시 29분 서재에서 아들을 사랑하는 아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