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제이미 스나이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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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규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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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14-12-03 16:5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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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미 스나이더의 ‘리얼’(규장)을 읽고 서평자는 이 책을 읽으며 두 가지 화두에 몰입했다. 첫째는 “만일에 주일이 존재하지 않으면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있을까? 둘째 나는 창문으로 다른 사람을 보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거울로 나를 보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전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는 타자에게 보여주고 있는가의 문제였기 때문이고 후자는 나는 나를 나에게 어떻게 보여주는 삶을 살고 있는가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둘 중 그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는데 제이미 스나이더는 미국적인 문화와 우리의 문화와는 이질적인 갭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21세기의 언어로 그 간격을 좁혀 가며 공통의 분모를 찾아 적시하고 있음에 공감을 표했다. 저자는 이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날마다의 정직한 자기 성찰과 예수께서 성경에서 권고하신 삶을 살아내야만 답할 수 있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재 강조하지만 날마다의 성찰과 살아냄이다. 21세기 진짜 크리스천의 모드는 주일 중심적 모드가 아니라 날마다 모드의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지천에서 내내 강조한다.
총신대에서 후학을 가르치셨던 김의환 총장께서 쓰신 칼럼 묶음집 중에 ‘월요일의 하나님’이라는 책을 아주 오래 전에 읽었다.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가 한국교회를 진단한 글이었는데 한국에는 그렇게도 주일에 많던 크리스천들이 월요일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에두름의 비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이 기록될 당시는 옷 로비 사건으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크리스천 두 여인이 공영방송국에서 난타를 벌일 때였으니 말이다. 그의 진단을 받았을 때 부인할 수 없는 화끈함이 있었는데 스나이더는 미국의 크리스천들을 향하여 바로 이 직구를 미국교회에 날리고 있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다. 책 제목이 ‘리얼’이다. 책을 읽기 전에는 ‘REAL’의 의미가 무엇을 말하는 지 생소하지만 책을 놓고 나면 저자의 리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명해 진다. 이 책에 나오는 'REAL'을 전문 번역자인 배응준은 공히 ‘진짜’로 번역했다. 해서 ‘진짜’라는 어휘가 지천에 깔려 있다. 읽다가 ‘진짜’라는 단어가 많이 상용되는 그 시대는 비극의 시대임을 재확인했다. 너무 ‘가짜가 많아서’ 이기도 하지만 ‘진짜로 둔갑한 가짜’가 진짜로 대변되는 영적 무감각과 무 분별력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자는 진짜 제자가 되는 길을 제시한다. 미국 문화와 한국 문화의 이질성을 감안하고 전제한다고 할지라도 저자의 강한 일설은 한국의 독자들 특히 오늘을 사는 조국교회를 대오각성하게 한다. 제일 먼저 두드러진 진짜의 모습은 소유권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둔다. 내 것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자, 그는 단언건대 진짜가 아니라는 것임을 강조한다. 어떤 의미로 보면 무시무시한 전제이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맘몬을 섬기는 현대 크리스천들 혹은 주일 지상주의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거침이 없다. 내 삶의 후함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적인 만족과 충족을 위해 후하게 살아가는 자는 자기의 소유권 가치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발성 도구로 생각하는 자임을 분명히 한다. 둘째, 진짜는 내 삶이라는 것이 어디에 목적하고 있는가? 를 물을 때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공통분모가 있음을 알려 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다시 말해 바울의 고백처럼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고 밝힌다. 해서 저자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알파벳 철자로 표현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을 f-a-i-t-h 가 아니라 r-i-s-k 라고 진단하는 것에 동의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위험이 없는 곳에는 믿음도 없다는 지론을 굳히지 않는다. 그래서 저자는 질문한다. 믿음의 여정이 험한 여행인가? 편안한 산책인가? 를. 그리고 답한다. 날마다 전자의 여행을 떠나고 있는지를 살피라고. 몇 가지만 내친 김에 더 리얼을 리얼하게 추적해 보자. 하나님을 위한 험한 여행을 마다하지 않는 자들은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분’에게 집중하는 자들임을 소개한다. 아무리 이 땅에서 험한 일을 당해도 ‘어떤 분’에게 희망을 건다. 그것이 리얼 크리스천이다. 기도원에서 토마스 롱이 쓴 ‘고통과 씨름하다.(새물결 플러스 간)’를 씨름하고 있는 데 무지 행복하다. 세월호로 인하여 금년 한 해 목사로서 참 무능하고 형편없는 나에게 실망하던 중이었는데 롱 교수가 상투적인 고통에 대한 해석으로 설교자를 위한 책을 쓰지 않고 그 동안 금기시 되던 내용까지 까발리며 신정론에 대한 무거운 짐을 한 결 가볍게 해주어 너무 감사하다. 책을 함께 읽는 기간이라 그런지 롱 교수의 고통에 대한 신정론적인 접근을 접하면서 아이러니하지만 제이미 스나이더가 말한 리얼한 크리스천이 얼마나 깊은 내공을 갖고 담론했는지 겨뤄볼 생각이었는데 크게 엇나가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정리한다. 성도에게 임하는 고통의 연속성들은 결코 상식적이지 않다는 점을 전제하면서 그래서 더 더욱 리스크에 대한 계산하지 않는 성도의 몫이 리얼한 크리스천의 현실적인 상태임을 알고 그것을 극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궁금하신 분들은 토마스 롱의 책을 꼭 읽어보시기를. 그래서 리얼의 대전제는 우리들의 희망이 산술적인 계산으로서가 아닌 분명한 신앙고백이 요구된다는 것임을 저자는 재확인한다. 어떻게?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분에게 천착해야 함을.” 또 다른 하나는 ‘시몬 콤플렉스’의 탈피를 감당하는 자가 리얼임을 적시한다. 교회 안에는 물론,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 교만의 바이러스가 바로 시몬 콤플렉스이다. 이것을 갖고 있는 자는 리얼일 수 없다. 그렇다면 시몬 콤플렉스의 증상이 무엇인가?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깨끗하게 하고 구원하여 변화시키기에 충분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고 변화시키는 데에는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믿게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한계선을 정하기 시작한다.”(P.175) 향유를 깨뜨린 여인을 못마땅하게 여김은 물론 그녀를 칭찬한 주님까지 싸잡아 비난하던 시몬이어서는 결코 리얼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저자는 강하게 역설한다. 시몬 콤플렉스를 경계하는 저자는 고든 맥도널드의 한 촌철살인을 소개하며 도리어 이렇게 살아야 함을 반증한다. “세상은 교회가 할 수 있는 무슨 일이든지 거의 다 할 수 있다.(중략) 하지만 세상이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세상은 은혜를 내놓지 못한다.” (p.177) 리얼은 은혜의 사람이다. 그 은혜를 보편화시키는 자이다. 서평자도 뜨겁게 동의한다. 정죄가 보편화되고 분석이 인정받고 섣부른 이성에 열광하는 이 시대에 진정한 리얼이야 말로 은혜를 내놓는 사람이지 않겠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내가 구원받았으니 당신도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고 저 사람도 구원의 은혜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리얼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또한 저자의 의도였으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은 많으나 지면상 이제 서평의 글을 맺으려고 한다. 서평자는 이 글의 후반부에 기록된 글에 극도로 천착했다. 가슴에 깊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성경에서 읽으면 제일 먼저 느껴지는 감흥을 저자는 소개한다. 무엇일까? “아, 하나님 감사해요. 나는 저 바리새인과 같지 않아서요.” 역설 중의 역설이지 않은가? 이 역설의 주인공이 당신이나 저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임을 부인할 수 있겠는가? 이런 류의 저급함을 갖고 있으면서 우리가 어떻게 주일이 없다고 가정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리얼 크리스천이다. 라고 선포할 수 있단 말인가? 창문으로 다른 사람을 보는 시간이 있으면 거울로 나를 보는 삶을 날마다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선포한 저자의 일침을 가슴에 새긴다. 진심으로 리얼이 되기 위해서. 기독교 저널리스트인 필립 얀시의 ‘그들이 나를 살렸다.’를 보면 19세기 위대한 기독교 저술가이자 해박한 변증론자인 G.K 체스터턴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그는 19세기 영국의 기독교계의 정신적인 리더십을 갖고 있었던 걸출한 스승이자 수많은 영국인들의 멘토였다. 해서 당연히 당시 여론은 그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별히 19세기 기독교계 안팎으로 불던 과학 이성주의 그리고 휴머니즘적인 계몽주의의 흔적들이 아직도 서슬이 시퍼렇게 교회를 공격하고 있던 때라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적지 않은 기독교계의 위로와 방어막이 되던 시절이었기에 그에게 주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때 마침 런던 타임스에서 그 신문에 기고하는 여러 필자들에게 동시에 영국이라는 나라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여러 상황들 중에 가장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묻는 그래서 제목이 ‘무엇이 문제입니까?’라는 제하의 원고 청탁을 한다. 그러자 당대의 석학들이 아주 우수한 필채로 19세 영국 사회의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분석하여 글을 기고했다. 그런데 체스터턴은 마치 성의가 없는 것 같은 가장 간단한 문체로 글을 이렇게 써서 보낸다. 다음과 같이. “편집장 귀하, 바로 내가 문제입니다. G.K 체스터턴 드림” 리얼한 크리스천은 성경이라는 기막히게 선명한 거울로 나를 보고 내가 문제의 근원임을 아는 자이지 않을까 싶다. 기도원 숙소에서 바라 본 산야에 설경이 그림 같다. 금년 들어 내린 첫 눈이 한국교회의 서설이기를 소망해 본다. 사족 하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읽고 제일 먼저 느끼는 감흥이 무엇일까? “하나님, 감사해요. 나는 저 바리새인과 같지 않아서요.” 아들아, 어떻게 생각하니? 어마어마한 역설이지 않니? 제자로 산다는 것은, 리얼의 실체로 살아가는 제자는 누군가와 상대적인 평가로 우쭐대지 않아야 한다. 다만 하나님 앞에서 전인격적인 남아짐을 사는 것이라고 스나이더가 강조하고 있구나. 아들아. 선지동산에서의 4학년이 시작되었구나. 대견하고 자랑스럽다. 끝까지 분투하며 리얼 디사이플십을 견지하는 훈련 기간이 되기를 아빠가 기도한다. 2014년 9월 2일 오후 10시 14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