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차준희 박사의 『예레미야의 영성』 논찬 자료2025-02-26 16:10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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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희 박사의 예레미야의 영성논찬 자료

발표일: 2025320

장소: 서부성결교회

논찬자: 서울신학대학교 81학번 한울회 회원 제천세인교회 이강덕 목사

 

들어가는 말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 작가다. 너무 적절해서 그녀가 말한 토설을 내 뇌의 한편에 저장해 두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아파서요. 책을 읽으면 좀 덜 아프거든요.”

 

이 문장을 맨 처음 만났을 때, 영적 오르가슴(orgasme)을 느껴 너무 행복했다. 누구든지 이 정도의 갈파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가야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이다. 목사라는 직을 별칭으로 삼아 인생을 산 지 33년이 지났다. 어떻게 버텼지?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책 때문에 버텼다.”

 

목사가 기도로 버텼다든지, 은혜로 버텼다고 말하는 게 정상이지, 경건하지 못하게 책 때문에 버텼다는 게 정상이냐고 힐문해도 뭐, 어쩔 수 없다. 사실이니까.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말을 인용해 보자.

 

책은 그 속의 글을 통해 느껴지는 일종의 정신-발견이라는 감각, 어느 소재의 독창성이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주고, 이를 통해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감각을 갖게 해준다.”

 

필자는 오에 겐자부로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기에 목회라는 질곡의 터널을 지나며 위기가 임할 때마다 책 안으로 들어갔기에 버텼다.

 

이상한 현상과 만나는 것은 인간이 건전한 적응 능력을 기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지성계의 큰 별인 다치바나 다카시가 쓴 책에 나오는 글이다. 이 글을 읽다가 그가 가지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내공을 발견하고는 할 수만 있으면 일본을 폄훼하려 했던 한국인으로서 무척이나 자존심(自存心)이 상하는 것을 느꼈다.

이제 양심고백을 해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신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절치부심하며 집중했던 시기에 대해 논한다면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Th.M 과정을 이수할 때부터였다고 말해야 정직할 것 같다. 너무 무지했던 신학의 동굴에서 빠져나오겠다고 발버둥을 친 때가 그때였으니 그렇다. 학부 시절, 신학 공부는 학점 잘 받기 위한 수단이었다. 구약에 대한 접근도 매일반이다. 구약학에 대한 흥미와 매력을 느껴 공부한 적이 없었기에 구약에 대해 일천(日淺)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하다. 늦게 철이 든 셈이다. 늦깎이 공부한 구약을 흥미롭게 만든 동력은 책 읽기였다. 그중에서도 학위 과정에서 만난 두 권의 책은 압권이었다.

그때로부터 관심을 둔 구약은 필자에게 흥미의 대상으로 떠 올랐다. 공부하다 보면 욕심이 생긴다. 더군다나 설교 준비 때는 그 욕심을 잉태하기까지 한다. 그럴 때, 내게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 준 이가 오늘 북토크의 주인공인 차준희 박사다. 그가 옆에 있어서 나는 조금 더 성장할 수 있었다. 선생님이 되어 준 걸 빌미(?)로 자신이 책임을 맡고 있는 구약학회 이사로 섬기라고 협박했고 꼼짝없이 저자의 노예가 되어 지금까지 끌려왔다. 하지만, 노예로 산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도리어 구약학의 지성적 진보를 이루게 해준 차 박사에게 깊은 감사를 전한다.

필자는 시골 목사의 행복한 글 여행, 동연 간이란 제목으로 세상에 수줍게 내놨다. 목양의 현장에서 3년쯤 독서하며 감동했던 300권 중에서 선별한 36권의 책에 대한 북-리뷰를 320쪽에 걸쳐 쓴 글이다. 처녀작이기에 정성을 많이 들였는데, 차 박사가 추천의 글을 보내주어 졸저를 빛내 주었다. 글 추천자가 내게 했던 말이 있다.

두 번째 책을 출간할 때는 300페이지를 넘지 않게 써라.

글 문장을 장문으로 쓰지 말고 단문으로 써라.

 

반골 기질이 있는 필자는 친구의 조언을 100% 반영하지만 않았지만, 가급적 그 조언을 생각에 두고 글을 쓰려고 노력한 끝에 25번째 출간 책에 반영했다. 작년 말, 저자가 본서를 보내주었다. 보내주면서 영성과는 무관하게 협박(?)했다. 예레미야의 영성이었다. 아이러니다.

미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책이다. 더 웃기는 건 미치지 않으면 절대로 읽지 않을 책이다.

 

지성적인 성찰이 담겨 있는 서평을 써서 보내라.”

 

저자가 보낸 사족이다. 책을 받아 보는 순간, 아연실색했다. 총 분량이 645쪽이다. 대학교수가 이렇게 앞뒤가 다르면 안 된다. 4년 전부터 저자가 출간한 또 다른 역작 시인의 영성 ,,Ⅲ』 (새물결플러스 간, 20212023)487, 559, 647, 즉 총 1,693쪽에 달하는 작품이다. 이때도 저자가 명령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수준 높은 서평을 써서 보내라.”

 

이 정도면 부탁이 아니라 협박이다. 필자는 저자가 쓴 세 권의 책을 읽다가 순교하는 줄 알았다. 저자가 은퇴를 2년여 앞둔 건 적어도 내겐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다. 할 수 없이 수준 높은 북-리뷰는 아니더라도 순교적 각오로 읽은 이렇듯 웬수 같은 예레미야의 영성을 읽고 필자가 느낀 몇 가지의 글 소회를 덧붙이고자 한다.

 

본말

 

1) 예레미야의 영성은 이제까지 출간된 예레미야 예언서 중에 기념비적 자료가 될 수 있는 수작이다.”

 

본서를 작년 연말에 섭렵했다. 하지만, 숙제를 맡았기에 다시 손에 들고 첫 번 독서 때보다 조금 더 정독했다. 필자는 구약학자들이 야심 차게 내놓은 예레미야 예언서에 관한 도서를 거의 빼놓지 않고 읽으려고 노력했다. 구약학자들이 내놓은 책을 섭렵할 때마다 지극 감사가 있다. 학자들의 수고가 곳곳에 배어 있음을 알기에 그렇다. 정말 수준 높은 책들을 세상에 소개해 준 학자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를 전한다. 읽은 책들은 목사로 사는 내게 지금도 예언서 예레미야를 본문 텍스트로 삼아 설교를 준비할 때, 너무 귀한 자료로 사용한다. 해서 자료들을 서고에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진열해 놓았다. 하지만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이들 책에서 공통으로 보이는 불편함이다. 현장 목회자이자 설교자가 느끼는 건조함이다. 구약학자가 아닌 필자가 전문가들의 성서 해석에 대해 논평하는 것은 시건방진 일임을 안다. 하지만 예레미야 예언서 텍스트를 기초로 해 회중들에게 전해야 하는 컨텍스트로 그 외연을 확장할 때는 조금은 내 입장에 변화가 있다. 2%의 부족함이 언제나 나를 아쉽게 하기에 그렇다.

나에게 있어서 성서 텍스트에 대한 상황 중심적 해석은 불온한 일이나 위험한 일이 아니라, 너무 소중한 일이다. 현장 목회자가 상황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없이 캐리그마를 선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 삶의 정황을 외면한 성서 해석은 무의미하다. 건조하다. 해서 언제나 학자들이 개진한 텍스트 주석을 볼 때마다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어떻다는 건데?’이다. 소위 말하는 ‘so what? 의 제문제(諸問題). 저자 이야기를 해야겠다. 차 박사가 출간한 책을 읽다 보면 필자의 이런 건조함이 부분 해결되는 쾌감을 느낀다. 예레미야의 영성에는 신학자가 본 예레미야 예언서에 대한 대단히 치밀한 석의적 해석(Exegetical interpretation)이 수록되어 있다. 뭐 당연한 일이다. 이것은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칭찬받아야 하는 또 다른 면이 본서에 있다. 본문에 대한 철저한 구약적 석의를 바탕으로 한 상황적 해석(Contextual interpretation)이 돋보인다는 점이다. 본 서는 이 두 개의 지성적 영성을 충족해 주는 병행된 균형이 담겨 있는 걸출한 책이다. 책의 면면에 친구가 보여준 이런 차원의 균형적 해석이 돋보인다. 참 뛰어난 재능이다. 텍스트와 컨텍스트의 교차점에서 조명하시는 성령의 레마’(ῥήμα)다바르’(דְבַ֖רָ)화 시키는 차 박사는 이런 면에서 뛰어난 돌연변이다. 그러니 645페이지라는 미친 분량이지만, 이 책은 읽으며 순교 당해도 좋을 법한 책이다. 준비어천가가 아니라, 실로 그렇다. 신학자이기에 범할 수 있는 건조함을 설교자의 영성으로 쏟아낸 사자후가 이 책에 있다. 이런 책은 흔하지 않다. 그러기에 박수를 보낸다.

 

2) 예레미야의 영성은 예언서만이 담고 있는 시대적 영적 혜안을 등장인물의 조명을 통해 탁월하게 해석한다.

 

필자는 25개의 꼭지로 풀어나간 예레미야의 영성은 전술했듯이 예레미야 예언서라는 대단히 중요한 구약 예언서를 탁월한 균형을 갖고 석의적(釋義的) 해석과 더불어 본문을 현장화시킨 해석이 담겨 있는 책이라 했다. 필자가 이렇게 언급한 것은 특별히 6, 21강에 담은 저자의 혜안 있는 접근을 근거로 한다. 6강은 이미 목회자들이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 익숙하게 주지하고 있는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담론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예레미야 7장의 성전 설교는 예레미야 활동 기간에 속한다. (주전 608-597) 예레미야의 예언 활동에는 주전 622-608년까지의 공백기가 있다. 따라서 그는 요시야의 종교 개혁이 시작하는 해인 주전 622년부터 침묵기에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주전 609년 요시야의 죽음과 608년 여호야김의 즉위는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재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4년간의 침묵기를 깨고 처음으로 행한 설교가 예레미야 7장의 성전 설교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이 설교로 인해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계속해서 박해를 당한다.” (132)

 

예레미야는 장기간의 침묵을 깨고 왜 역사의 수면 밑에서 수면 위로 다시 서게 되었던 것일까? 원인 제공이라는 동기가 부여됐기 때문이다. 예언자가 굳이 예언하지 않아도 되는 영적 궤도가 올바른 시기가 종말을 고하고, 예언의 소리를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적 절망이라는 동기가 부여됐기 때문이다. 요시야와 여호야김이라는 역사적 무대는 이런 롤러코스트를 타는 변곡점의 시대였다. 여호야김 시대가 보여준 대단히 질 나쁜 영적 붕괴는 야훼의 성전이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자들의 수단으로 거침없이 변질된 망령됨의 극치로 치달았다는 점이다. 대세요, 꺾을 수 없는 종교적 판에서 그 판을 전도시킨다는 건 목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다윗 왕조 불패 신앙시온 불패 신앙이 도그마로 자리 잡은 남 유다의 종교성은 하나님이 참을 수 없었던 극한의 임계점이었다. 야훼께서 분노하신 것이 예레미야가 다시 무대 위로 올라선 가장 분명한 이유다. 예언자는 그때의 시대적 정황을 전제할 때 건드리면 안 되는 금기어와 터부의 제한적 마지노선을 무너뜨렸다.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메시지다. 하나님의 성전 문에 서서 이 메시지를 전하여라. 들어라, 하나님을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오는 너희 모든 유다 백성들아. 만군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행위를사는 방식과 하는 일을깨끗게 하여라. 그래야 내가 이 성전을 내 집으로 여기고, 너희와 함께 지낼 수 있다. 이곳에서 전하는 거짓말을 터럭만큼도 믿지 마라. 이곳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다. 이 말은 거짓이며 터무니없는 소리다.”

 

저자는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를 총평하며 이렇게 진단했다.

 

교회에 와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기도 소리를 높이는 것보다 먼저 일상에서 자신의 행위를 바로 잡아야 한다. ‘일상에서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한다.’ ‘일상에서 정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일상에서 약자를 돌보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일상에서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일상이 바로 서야 예배가 바로 선다.” (141)

 

신앙의 항상성’(homeostasis of faith)을 생각할 때는 언제든지 필자는 예언자 예레미야를 떠 올린다. 본말에서 흔들리지 않는 시대의 소리였기에 말이다.

 

성공을 바라지 않고 복음 자체를 위해 복음을 전파하려 애쓰고 나자, 성공은 이루어졌으며 언제나 그랬듯이 일단 성공이 이루어지면 성공에 대한 갈망이 생겨났고, 그리스도인은 성공에 대한 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스도인이 비난받을 수 있는 점은 바로 이 성공 뒤에 무엇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과 그래서 사회가 기독교에 의해 뒤집히기는커녕 오히려 사회가 기독교를 바뀌었다는 것이다.”

 

사역 현장에서 본질에서 희미해지거나 타협하려는 마음이 들 때마다 다시금 내 옷을 여미게 만든 쟈끄 엘륄의 촌철살인이다.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가 뜨겁게 다가온 이유, 쟈끄 엘륄의 촌철살인을 현대적 언어로 옷 입힌 저자의 일갈이 죽비로 내게 임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해석이 자끄 엘륄과 닮아 있다.

 

3) 예레미야의 영성21세기 목사는 누구일까를 다잡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과서로 손색없다.

 

21예레미야와 하나냐를 숨죽이며 읽었다.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유대인 철학자 부버(M. Buber)가 언급했듯이 예레미야 일생의 최대 위기는 하나냐라고 하는 동료 예언자와의 격돌이다. 이 격돌은 생명을 담보해야 했다. 만약 의로운 자와 사악한 자의 싸움이라면 두 진영의 갈등을 목격하고 있는 백성의 입장에서 옳고 그름을 쉽게 분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상황은 다르다. 항상 외톨이로 고립되어 이상하게 보이며 한편으로는 대다수에게 불신까지 당했던 예레미야와 공인된 예언자들 가운데에서도 존경받는 지도자로 보이는 하나냐와의 대결이다. ‘왕따인기 짱’, ‘비주류주류’, ‘아싸인싸의 맞대결이라 할 수 있다.” (474475)

 

예레미야도 스스로 하나냐를 거짓 예언자라고 지칭하지 않고 다만 그가 전한 예언이 참 예언인가? 거짓 예언인가? 기준만 제시했다고 저자는 해석했다. 이 말은 예언자 예레미야 역시 이 충돌과 대결이 녹록하지 않은 영적 싸움임을 인정한 셈이고, 버거운 대결이 될 것임을 전제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 물론 독자들은 이 치열한 싸움의 결말이 어떻게 끝나는지에 대해 성경 내증(內證)을 통해 명백히 알고 있다. 하나냐에 대한 야훼의 신탁을 예레미야는 전했고, 그 신탁대로 하나냐는 신탁을 받은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는 예레미야 28:17절의 보고 때문이다. 거짓 예언자가 아니라, 거짓 예언을 전하는 자로 초점을 맞춘 예언자끼리의 맞대결은 이런 차원에서 대단히 싱겁게 그 결말을 가져온 듯 보인다. 28장의 결론은 허무할 정도로 예레미야의 완승으로 끝난 담론처럼 여겨지지만, 필자가 주목한 건 저자가 내놓은 하나냐가 갖고 있었던 구약신학적 허점을 지적한 해석이었다.

 

하나냐의 선포는 그의 선언 자체가 이사야의 시온 신학을 무분별하게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사야 당시와 자신 앞에 놓인 현재의 역사적이고 실존적인 상태 간의 심오한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당시 신앙공동체가 처한 현 상황에 대해 비판적 렌즈를 사용하지 않고 분별없이 기존의 전승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484)

 

저자가 갈파한 이 해석이 깊은 인상을 준 이유는 오늘날 목회자에게도 설교 해석의 현재성이 얼마나 중요한 공부인지를 유감없이 발휘해 준 발군(拔群)의 지성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굳어진 타성, 이미 알고 있다는 식의 교만, 진보하지 않으려는 고정 관념, 다수의 여론에 의지한 매너리즘, 치열하게 공부하지 않음으로써 나타나는 도태됨 등등 하나냐가 갖고 있었던 문어발식 구태가 야훼와의 현재적 교제를 단절하게 한 원흉으로 작용했고, 교제가 끊어진 하나냐는 굳어진 종교적 신념이 도구마와 이데올로기로 변질됨으로써 예언자가 가장 민감해야 할 영적 조명에서 멀어지는 재앙을 맞게 되었다고 접근한 저자의 해석에 필자도 동의했다. 이렇게 교제가 끊어진 하나냐는 70년의 조명을 2년의 신념으로 갈아치우며 대중적 인기에 눈이 먼 아쉬움을 남긴 예언자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나가는 말

 

35년을 설교하는 목사로 살아왔다. 설교는 목사에게 가장 무거운 짐이지만, 이론으로 형용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사역이다. 이렇듯 설교 사역은 칼날의 양면과도 같다. 극히 개인적인 사견이지만, 두렵고 떨리는 설교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목사에게 하나냐는 반드시 살필 반면교사의 대상이다. 반면, 예레미야는 진면교사의 주체다. 시분초마다 야훼께서 조명하시는 말씀에 민감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하나냐 신드롬에 빠져 말씀의 조명 없이 설교하는 본말전도의 범죄자가 될 수 있다.

예레미야의 영성은 평생 구약을 전하기 위해 주군에게 받는 조명에 게으르지 않았던 구약 전도사가 내놓은 역작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목사가 학자에 의해 은혜를 받는 아이러니 말이다. 목사가 신학자에게 은혜를 받는 쪽팔림(?)을 당하지 않도록 필자도 더 노력하려 한다. 강단에서 내려올 때까지 끝까지 공부하는 목사가 되어야 할 이유를 신학책에서 발견했으니, 은혜요 수수께끼다.

설교의 기술은 기껏해야 우리를 웅변자로 만들어 줄 뿐이다. 설교자가 되려면 신학이 필요하다.”

 

오래전 존 스토트의 조언을 담아두었는데, 차준희 박사의 글이 위대한 설교자 선배의 말에 조금은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해준 선생님이 되어 주어 행복했다.

더 긴 글을 쓰고 싶었지만, 사회자가 통편집할 것 같아 참기로 했다. 차 박사가 땀 흘리며 오롯이 남긴 글의 감동이 어찌 이뿐이겠는가! 예레미야를 본문 삼아 강해 설교를 할 동역자, 혹은 하고 싶은 독자가 있으면 예레미야의 영성책 읽기로 한번 순교해 보자. 참 괜찮은 순교 여행이 되리라 확신한다. 친구의 정년이 이제 네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어 매우 아쉽다. 한국교회를 위해 해야 할 일이 아직 많기에 말이다. 그러나 어쩌랴! 머리카락 숫자는 한 해가 갈수록 더 줄어들고 있으니 내 욕심을 버려야지. 모쪼록 친구가 끝까지 건강하기를 화살기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