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의 글감에 대해 처음 쓴다. 그녀가 40대에 썼던 『수도원 기행』,(김영사 간, 2001)을 읽었을 때, 내 나이도 40대였다. 남도에 있는 고즈넉한 군인 도시 진해에서 젊음이라는 패기 하나를 갖고 열정적으로 목회하던 철없던 시절에 저자의 글을 읽었다. 읽으면서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 점진적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저자의 면면을 보면서 그 동안 색안경을 끼고 삐닥하게 보았던 가톨릭 영성에 대해 바로 잡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 가라』, 『봉순이 언니』, 『도가니』와 같은 작가의 격정적인 일반 소설로 접했을 때의 감동보다 수도원 기행 시리즈 Ⅰ,Ⅱ(2001, 2014)와 지금 평하고 있는 본서와 같이 종교성이 듬뿍 담겨 있는 작품을을 대하면서 왠지 모를 공감대를 더 깊이 형성했고, 내가 느꼈던 상황들을 작가의 전지전적인 고백들 안에서 간접적으로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어서 그랬는지 내심 흡족했다.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는 책의 앞 뒤 부분은 극히 개인적으로 경험한 저자의 산문적인 에피소드에 대한 보고다. 동백이 이야기가 그렇고, 박경리 선생에 대한 추억이 그랬다. 하지만 본서의 거의 대부분의 지면을 차지하는 스토리는 요르단, 이스라엘 성지 순례기다. 마치 『수도원 기행 Ⅰ,Ⅱ』에서 저자가 술회했던 것처럼 대단히 진한 가톨릭 영성을 기초로 한 성지순례에 대한 보고다. 읽는 내내, 필자 역시 15년 전에 방문했던 익숙한 장소가 저자에 의해 지리적 배경으로 소개되고 있어 친숙했다. 다만 신실한 가톨릭 신자가 본 요르단, 이스라엘 순례기와 개신교 목사인 필자가 느꼈던 15년 전의 순례기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이야기가 있어 유감스러운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를 하면서 공통분모를 찾아보려고 나름 힘썼다. 몇 가지만 나누어 보자. “40년이란 육체의 기억이 지워지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노예의 기억, 그러니까 노예근성이라고 불리는 그것을 지워버리기까지 40년이 걸린다는 말” (69쪽) 저자가 해제한 이스라엘 신앙공동체의 광야 40년 정의는 나름 의미심장했다. 직선거리로 열흘 길을 하나님이 지시하신 방법이 아니라, 대단히 세속적 가치에 가깝게 가리산지리산 불순종하며 걸었기에 이스라엘 공동체가 머물렀던 광야는 40년이라는 세월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렇게 보낸 광야 기간에 대한 신학적 해제는 가톨릭 영성의 시각이나, 개신교 영성의 조명이 그리 크게 차이가 없음을 확인하는 보고로 다가와 나름 반가왔다. 바늘가는 데 실 가는 것처럼 광야 40년의 흔적을 더듬을 때 모세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사족에 불과하다. 저자는 모세가 40년이라는 지난한 세월을 이스라엘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로 광야에서 보냈지만, 그에게 돌아온 대단히 아픈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에 대해 총평하면서 이렇게 기록했다. “목적에 도착하지 못해도 삶은 괜찮다고 우리에게 말해 주기 위해 모세는 저 강을 건너지 못하고 여기서 죽은 것일까. 과정 자체가 실은 삶이라는 말일까. 하늘나라는 어떤 상태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일까, 평생을 바쳐온 여정이 끝나기 전에 그 목적(goal)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을 알았던 모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71쪽) 가톨릭 신자인 작가의 질문에 대해 왠지 모르게 개신교 목사인 내가 대답을 해야한다는 강박이 밀려왔다. 화려하고 그럴듯한 수사어구로 많은 이들이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말했다. 세밀하게 열거할 수는 없지만 이 신학적 함의에 대해 논(論)한 자들의 설(說)들은 들어볼 만한 것들이 상당수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에 대해 가장 흔한 대답의 論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이었다. 참 기가막힌 방어논리다. 특히 개혁주의에 서 있는 자들은 이것만큼 탁월한 대답이 없다고 단언할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이라는 멋진 문구가 아이러니하게 불편하게 들린다. 왜? “딴지 걸지 마라. 몰라”로 들리기 때문이다. 오히려 정직하게 들려서 차라리 이 문구가 마음에 든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은 조금 심하다. 나는 누군가가 이 모세가 겪은 이 담론에 대해 질문하면 한 번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이라고 답해 본 적이 없다. 필자는 이렇게 論하곤 한다. “모세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해석이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선택한다. 모세는 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필자는 웨슬레 신학의 전통에 서 있는 신학교에서 공부했기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이라는 문구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신학적 기초를 갖고 있다. 해서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하심’이라고 답하는 것은 왠지 궁색해 보인다. 나는 줄곧 이렇게 답했다.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이 모세를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왜? 만에 하나,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갔다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모세를 어떻게 대우했을지 불을 보듯 뻔하다. 무지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아닌, 보이는 모세를 숭상했을 가능성 100%다. 그렇게 될 경우, 모세는 재앙의 당사자가 된다. 하나님이 이 일을 근원적으로 봉쇄하신 것이 모세의 가나안 입성 금지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런 시각으로 조망해 본다면 하나님이 모세를 사랑하신 방법은 참 신비롭고 아름다운 사랑법이 아닐 수 없다. 모세와 관련하여 저자는 느보산을 방문했을 때 느낀 감회를 니체의 글로 기록했다. 영적 공명을 준다.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도 당신을 들여다본다.” (77쪽) 니체의 통찰이라고 색안경끼지 말고 보지 않기를 바란다. 그가 남긴 이 어록이 그리스도 예수의 공동체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 적지 않은 울림이 되기에 그렇다. 저자가 느보산에서 느낀 모세의 삶에 대한 평가는 진지했다. 나도 모르게 덕지덕지 끼여 있는 심연의 때를 벗기 위해 저자 자신도 40년이 필요했다고 고백했다. 이데올로기적이고, 부끄러운 영혼의 치부를 타인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심리적, 정서적, 영적 갑각으로 무장했던 자신을 발가벗기는 데 들어간 시간을 광야의 기간으로 성찰한 저자의 태도는 사뭇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가톨릭 신앙의 스펙트럼이 아니라, 개신교 신앙의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 중에 이 정도의 영적 성숙함을 체감하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사뭇 궁금해진다. 책의 곳곳에 저자가 순례를 하며 방문했던 지역에 체감했던 놀라운 영적 감동들을 기록한다. 만나 보기를 권한다. 본서 말미에 저자는 꼭 만나고 싶었고 순례하고 싶었던 팔레스타인 자치구에 있는 나사렛 글라라 수녀원을 극적으로 방문했다. 이유는 그곳은 가난을 몸소 실천했던 은둔의 성자라고 불리는 샤를 드 푸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가문 중에 가장 부유하고 화려했던 귀족 가문 태생인 푸코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세속적 가치의 최고봉을 경험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깊은 회의를 경험하고 회심한다. 이후 갖고 있는 모든 부와 명예를 버리고 가장 낮은 자로 삶을 살았던 신앙의 선배다. 극심한 가난, 고독, 외로운 길을 선택하며 주님을 추구했던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가 남겼던 명언은 필자에게도 적지 않은 새김이 되어 남아 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사하라의 불꽃에서) 이 무시무시한 영성을 갖고 있는가를 필자 또한 매일 질문하며 산다. 베들레헴에 세워져 있는 예수 탄생 기념 교회 순례를 마친 저자가 이런 글감을 남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이 우리를 더 믿으신다.” (124쪽) 하나님은 나를 믿으시는데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서 정직하지 못하다는 이 말도 안 되는 이율배반적인 삶 때문에 몸서리치는 고통을 느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소망이 있다. 슬픈 것은 상당히 많은 21세기 신자들 중에는 이 참담함의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영적 마비 환자로 살고 있다는 점이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절규가 그립고 그리운 시대의 복판에 있다. “당신 없이 제가 어디서 안식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당신 없이 제가 제대로 지낸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저와 함께 하실 때 일이 잘못된 적이 있습니까?” (토마스 아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브니엘, 212쪽) 15년 전, 비아 돌로로사를 걸었다. 걸으면서 매우 가슴아팠던 기억이 오롯하다. 이미 팔레스타인들의 매점들로 도배되어 있는 고난의 길에서 그 어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도 체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4세기 프란체스꼬 수도사들이 정한 가톨릭 전승을 기초로 만들어진 ‘십자가의 길’ 즉 ‘비아 돌로로사’의 노정 중, 예수께서 첫 번째 쓰러지신 장소로 기념되는 아르메니아 정교회 성당이 있는 지점에 도착한 저자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안다. 예수는 십자가라는 형틀의 무게 때문에 쓰러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를 쓰러뜨리는 것은 절망이다.” (224쪽) 저자가 토설한 이 언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2024년을 살아내고 있는 필자 역시 처절하게 경험하기에 동의한다.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비아 돌로로사의 길에서 넘어지고 쓰러지셨던 이유는 예수는 저들을 자기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온 ‘이에수스’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의적 거부라는 절망 때문이었다고 저자가 성찰한 것이다. 저자의 글감을 대하면서 주군에 대한 거부가 오늘도 현재진행중이라는 점에서 왠지 모를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싸늘한 불신자들의 냉대는 참을만 하다. 하지만 교회 안에 존재하는 ‘실천적 무신론자(practical atheists)’들이 퍼붓고 있는 예수에 대해 종교적 공격은 실로 가공할만하기에 인내하기에 한계가 느껴진다. 푸코의 말대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을 극히 민감하게 거부하는 교회 안의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맹공을 가하고 있는 절망의 노래들이 한국교회를 휩싸고 있는데도 속수무책인 나와 그대를 보면서 오늘이 더 아프다. 주군이신 예수는 우리에게 희망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에게 도리어 절망을 대가로 드리는 참담한 아이러니가 오늘의 교회의 자화상이자, 나의 자화상이다. 한국교회와 사랑하는 그 한국교회를 지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디에서 다시 시작할 것인가를 묻는다면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신 예수 그리스도께 천착하는 원색의 복음으로 무장하고 다시 옷깃을 여미는 일이 아닐까 싶다. 이 일에 타협과 양보는 없다. 지난 1월 초에 섬기는 교회에서 주일 낮 예배 시간에 어언 1년간 진행했던 느헤미야 강해를 마감했다. 마지막 강해 시간에 느헤미야에 대한 총평을 했다. 세인 교회 회중 모두에게 조금은 예민했지만 이렇게 마무리했다. 마지막 설교의 일부분 원고를 소개함으로 2월 기고를 마치려고 한다. “2023년 1월 29일 주일에 시작한 느헤미야 강해를 거의 1년 만에 마감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설교를 통해 주지했다시피 우리는 느헤미야가 대단히 카리스마틱한 지도자였음을 나누었습니다. 21세기 감각으로 해석할 때는 느헤미야는 대단히 과격한 성격을 가진 독재자 기질이 있는 것처럼 여겨질 수 인물처럼 보여질 수 있다고 봅니다. 몇 년 전, 아들이 연세대학교 본대학원 석사 학위 코스워크 중에 느헤미야 세미나를 수강했을 때, 제게 학기를 마치고 보내준 느헤미야에 대한 교수의 코멘트가 이러했습니다. “대단히 급진적이고 과격한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기에 코스모폴리터니즘과는 동떨어진 배타적인 정치인” 아들을 담당한 교수는 대단히 젊은 구약학자이다보니, 이념이나 성향이 진보적인 신학자입니다. 진보적인 학문의 기틀을 갖고 있는 신학자들이 보는 느헤미야에 대한 이해는 공히 이런 공식이 대부분입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성향상 진보성을 갖고 있는 목회자들이 보는 느헤미야에 대한 인식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설교와 신학은 해석학적인 것과 결별할 수 없는 태생적 관계가 있기에 진보적인 신학자나, 목회자가 에스라나 느헤미야를 이렇게 정의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또 하나의 신학적 여백이기에 나름 존중합니다. 하지만 동의가 지지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말은 이런 신학적 평가와는 전혀 다른 해석이 있으며, 그것도 마땅히 존중해야 하는 예의있는 지성적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제가 느헤미야를 공부하고 연구한 뒤에 내린 해석과 결론은 이렇습니다. “느헤미야는 포로 귀환 이후 제 2 유대 성전 시기(에스라, 느헤미야, 마카비 그리고 힐렐로 이어지는 유대 종교의 과도기)에 다시 쓰러지고 있는 이스라엘이라는 신앙공동체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쓰신 무서우리만큼 치열하게 하나님 신앙으로 무장하며 살아낸 그 시대에 합당했던 지도자였다.” 나는 느헤미야의 영성을 인정하는 목회자입니다. 나는 느헤미야가 주전 445년 이후 예루살렘 성도(聖都)를 중심으로 하나님 신앙을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견고히 세워갔던 시대의 지도자였다고 평가합니다. 그 시대에 느헤미야는 그 시대에 맞게 하나님께서 시의적절하게 사용하셨던 지도자였습니다. 21세기적인 시대적, 문화적, 종교적 가치로 접근할 때, 느헤미야는 비판받을 만한 것이 다분히 있는 정치지도자였지만, 설교자인 저는 느헤미야가 갖고 있었던 하나님 신앙에 대한 철저한 영성을 지지합니다.” (제천세인교회 2024년 1월 7일 주일 낮 예배 설교 원고 중에서) 공지영 작가의 산문을 오래만에 다시 만나면서 아직도 개신교회 목회자로 현역에서 뛰고 있는 필자는 그녀가 얼마나 가톨릭적인 구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원색의 복음으로 무장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는가를 엿 볼 수 있었다. 이제는 하동으로 귀촌하여 젊었을 때의 치열했던 사상적 대립의 구도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기 위해 더 신앙적 깊음으로 들어가 삶을 반추하고 있는 저자의 삶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2024년을 시작하면서 작가의 글감을 누리며 필자도 한 해의 마음가짐을 다잡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외로워지는 것, 나이가 들어보니 참 괜찮은 로망이라는 생각이 오롯해 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