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천년의 독서2024-06-11 10:23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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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미시고 요시아키
ㆍ출판사 시프
ㆍ작성일 2023-08-25 10:26:01

 

미사고 요시아키의 『천년의 독서』,을 읽고 (시프 간, 2023년)


오래 전에 여성학자인 정희진이 한 말을 책을 통해 접했다.

“누군가 나에게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다. 아파서요. 책을 읽으면 좀 덜 아프거든요.”(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교양인, 2015, 11쪽)

뭐랄까, 정 작가의 이 토로를 진정성 있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싶어 되새기기 위해 문장을 파일 안에 보관해 두었다. 어줍지만 패러디하고 싶어진다. 나에게 누군가가 왜 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 같다.
 
“난산의 고통을 느끼지만 내가 또 태어난다는 것을 확인해 줘요.”

저자는 특별하게 유명한 인사(人士)가 아니다. 그냥 책이 좋아 책과 관련된 직장에 입사했고, 이후 너무 자연스럽게 컨시어지(concierge)가 됐다. 다만 평범하게 직장에서 녹을 먹는 직업인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자기의 목줄이 달린 직장인 온라인 서점을 찾는 고객들에게 무언가 돈을 버는 사람으로서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직업인의 도리라고 믿고 가장 적절한 책 가이드가 되기 위해 미친 듯이 독서했다. 그 결과 지금은 누구도 범접하기 쉽지 않은 전문적인 북-컨시어지가 된 케이스다. 저자의 책을 만나면서 이런 느낌이 들었다.

“또 한 명의 거물이 탄생하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일본문화나, 일본에 연관된 것에 대해 나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 이상한(?) 성향을 갖고 있다. 아, 그렇다고 해서 선입견을 갖지 않기를. 적어도 상식적인 일본인과 일본관에 붙들려 있는 지성인들에 대해서도 무조건 ‘닛뽄’ 이라는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필자는 ‘나 몰라라 식’의 무조건적인 비판 의식을 갖고 일본을 재단하지 않는다. 나도 양식이 있는 사람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친 일본 방문(선교지역 방문)을 했다. 방문 후기에도 밝혔지만 일본은 참 배울 점이 많은 나라다. 물론 무례한 정치인들은 예외다. 내가 언급하는 일본인들은 대부분의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예의를 갖고 있는 지성적 그룹에 속한 일본인을 의미한다. 나에게 가가와 도요히꼬, 우치무라 간조, 엔도 슈사쿠가 그랬고, 오에 겐자부로, 나스메 쏘세키, 가토 슈이치가 그랬다. 사이토 다카시, 그리고 적어도 필자에게 엄청난 충격을 준 다치바나 다카시,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글벗들은 존경의 대상이다. 이번에 미사고 요시아키를 만나면서 내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본의 지성 그룹 리스트에 그녀를 올리기로 했다. 총 7개의 세션으로 구분하여 본인 스스로가 섭렵한 무시무시한 독서력을 토대로 엄청난 성찰을 유감없이 발휘한 저자를 만나면서 앞에서 패러디한 그대로 나에게 다시 ‘태어남’에 대한 환희를 선사한 작가 때문에 행복했다.
본서에서 239권이 참고문헌에 소개된다. 물론 이 책 안에서 저자가 리뷰를 위해 읽고 소개한 목록이다. 290페이지 안팎의 책 분량에 소개된 참고문헌이 240여 권이다. 미친 독서력이다. 목록에 들어가 있는 책들은 철학, 종교학, 인문학, 사회학, 자연과학, 예술 문화, 음악 등등을 총망라한다. 저자가 얼마나 엄청난 독서력의 소유자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증거자료이기도 하다.
더불어 저자는 글쓰기 역시 범상치 않은 포스를 뽐낸다. 하지만 본인의 지적 교만을 내세울만한 필드와 필체를 본서에서 단 한 차례도 발견하지 못했다. 저자는 시코쿠에 있는 이타미 주조 기념관에 방문했을 때, 본인을 사로잡은 명문을 독자들에게 재인용하며 소개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서점의 서가 앞에 서면, 필요한 책은 알아서 튀어나온다. 책이 나를 불러주는 것이다.”(19쪽)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일까? 저자는 답하기 위해 또 하나의 인용문을 소개한다.

“그곳에 발을 들여놓으면 수십 년 동안 책장 선반에 서 있던 책들이 일제히 몸을 돌려 아직 죽지 않은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나를 인연 없는 서생이라 인식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지만, 가끔 서로 바라고 있었음을 인식하면 백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조우하기도 한다.”(19쪽)

저자가 인용한 칼럼니스트 야마모토 나쓰히꼬의 이 갈파가 나를 헤집어 놓았다.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말이 아니라 표정만으로도 상대방의 전체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 공식이라고 할까 저자의 소개가 낯설지 않아 행복했다.

“독서란 자신의 머리가 아닌 남의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책을 읽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이 계속해서 흘러들어온다. 자신의 머리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손해 일뿐이다.” (20쪽)

무릎을 쳤다. 필자 역시 독서를 통해 90%의 남의 지식이라는 보물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얻은 남의 지식이 언젠가는 나의 지식으로 진보된다는 점이다. 이 진보는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연관되어 있는 수많은 책들을 함께 독서함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지식의 알고리즘 같은 것으로 발전하는 수지맞는 일이기도 하다. 또 다른 일본이 낳은 괴물 다치바나 다카시가 이렇게 통찰했을 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의 지(智)의 총체가 고전이라면 고전은 현재완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재 직전까지의 모든 것이 과거의 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전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모든 지를 포괄하는 교과서다. 이것은 전제로 오늘 탄생하는 책은 과거의 지에 대한 최종 보고서다. 고전과 지금의 책을 함께 함께 읽어야 하는 당위다.” (다치바나 다카시,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 청어람 미디어, 55-56쪽)

얼마나 엄청난 통찰인가? 다카시가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가? 지식의 알고리즘이 내 것이 되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책 읽기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필자도 격하게 동의한다. 

“악의가 없고 상상력이 결여된 사람이 사실 제일 무서워요.”(78쪽)

저자의 이 필설을 읽다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내 교만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목양의 현장에서 어언 35년이라는 세월을 건져 올렸다.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민낯들을 경험했다. 특히 내가 두려워한 사람들을 저자가 통타해 주었다.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생각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엇비슷하다는 데에 왠지 모를 위로가 된다. 상상력이 결여된 자가 왜 무섭지? 더군다나 악의까지 없다고 미리 선긋기까지 했는데. 그러다가 문득 스치는 소회가 있다. 무섭고 무서운 이유가 분명히 있다. 

자기가 틀렸다는 것을 모른다는 점이다.

지성의 첫걸음은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보폭을 떼는 일이다. 하지만 악의가 없지만 상상력이 없는 자는 비가 내리면 우산을 씌워주는 행위까지는 감당하지만 결코 같이 비를 맞겠다는 공감의 낭만을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믿고 그것은 틀리지 않은 행위라고 미친 듯이 믿기 때문이다. 같이 비 맞을 확률 0%다. 내가 행하는 일은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기에 타인에 대한 공감의 여백을 갖지 않으려고 한다. 이렇게 공감의 분모가 없다는 점이 바로 두렵고 무서운 점이다. 방향성이 틀렸는데도 불구하고 착하다는 것이 무기가 될 때 그를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에 무섭고 무서운 거다. 이것을 대승적 차원에서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남의 머리에서 나온 철학적 사유를 빌리는 독서하기다. 이래저래 독서는 가능성 제로의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신비로운 일이다.

“인간의 불행은 모두 단 하나의 일, 즉 방 안에서 조용히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데에서 비롯된다.” (236쪽)

이 말은 블레즈 파스칼이 역작 ‘팡세’에서 밝힌 문장이다. 저자가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단 팡세의 말까지 동원하며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명상’을 기피하고 싫어하는 세대에 대한 성토였다. 저자는 명상이야 말로 망가진 세상을 다시 곧추세우는 이 시대에 유일한 히든카드라고 직설한다. 현대가 당하고 있는 절망은 분주함이요, 시끄러움이요, 번잡스러움이자 모호함이다. 나는 저자가 명상이라고 지칭한 단어를 멈춤이라는 단어로 바꾸어보려고 한다. 절대자이신 야훼를 바라보는 멈춤은 분주함, 시끄러움, 번잡스러움, 모호함을 이기게 해주는 역동이다. 저자는 본서에서 스티브 잡스가 어렸을 때 경험했던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스티브 잡스가 13세 때 시사 사진 잡지인 『라이프』 표지에 기아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이 두 명의 사진을 실려 있는 것을 보고, 다니던 교회 목사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하나님은 이 일을 알고 계신가요?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라고 물었다. 목사는 네가 이해할 수 없겠지만 하나님은 그 또한 알고 있다고 답했다. 잡스는 그날 이후 교회에 등을 돌렸고 그가 기독교 대신 배우고 실천한 것이 불교의 선이다.”(222쪽)

스티브잡스의 반란, 저자의 도발에 대해 기독교는 아니 목사는 답해야 한다. 상투적인 응답 말고, 그들에게 할 수 있는 죽비를 내리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기독교만이 갖고 고유한 그 무언가로 자리 매김을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신앙이 없는 건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1도 모르는 것일까? 스티브잡스가 신앙을 버리도록 만든 이유는 절절한 성찰이 배제된 상투성에 실망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면. 왜 가벼울까? 성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깊게 묵상한 뒤에 나오는 무게감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다시 한 번 곧추 세워야 할 항목은 홀로 있음, 고독하기, 주군과의 단독적인 알현 등등의 안 가본 길 가보기다. 그러려면 깊은 묵상과 성찰이라는 고독함을 견뎌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저자가 이어 인용하며 말한 이 문장 역시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현대인들에게 지루함이야말로 고뇌의 본질이라고 말했다. 허나 그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소란 속에서 춤을 추다보면 어느 새 인생은 끝이 나버린다는 파스칼의 또 다른 지적은 너무나 현실적이라 무서울 정도이다.” (249쪽)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이 구절을 묵상하면 슬프지만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요한복음 8:59)
주군은 외롭게 공생애를 보내셨지만 대세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분이 그분의 길을 묵묵하게 가실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원인은 아버지와의 단독적인 교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서에서 저자는 인구의 약 75%가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불교로 개종하는 원인으로 명상이라는 메리트가 현대적 지성들에게 불을 질렀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221쪽) 한병철의 말대로 소비사회이자 피로사회의 전형인 자본주의의 한 복판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수많은 지성들에게 ‘마음 챙김’(mindfulness)으로 해석할 수 있는 다분히 불교적인 명상은 지친 그들의 심리와 영혼을 어루만져주는 대안으로 부상했기에 빠져든다고 설명한다. 글을 읽다가 쓸데없는 오기를 부리지 말고 시대적 흐름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 역시 천박하고 가벼운 입놀림이 아닌, 현대인들의 구멍 난 마음을 다시 메울 수 있는 깊은 성찰의 자세로 돌아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그 무언가를 줄 수 있는 목회자가 되어야 함을 다잡이 했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 세션인 7번째 장의 주제를 죽음으로 설정했다. 역시나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은 생과 죽음이다.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필자가 만났을 때, 나 역시 저자가 인용한 이 책의 논지로 이 문장으로 받아들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루게릭으로 인해 시한부인생을 살아야했던 모리 슈워치의 이 말은 감동의 여운으로 그윽하다.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이 아니네”, (미치 앨봄,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세종서적, 222쪽)

종교는 죽음에 대해 말한다. 내가 믿는 기독교도 죽음은 설명한다. 전형적인 교리적인 해석이다. 성경은 죽음을 자는 것이라고 말한다. 왜 자는 것이라고 말할까? 교리적은 접근은 아니지만, 이렇게 해석해도 괜찮을 듯하다. 죽음은 관계를 끊지는 못하기에. 죽음조차도 관계를 끊지 못한다는 것을 믿는 이들은 그러기에 잘 살아야 한다. 잘 산 자만이 남아 있는 자들과 관계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저자는 책을 마감하면서 이렇게 읊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손을 뻗고 성장해 나아가는 것이다” (283쪽)
  

적어도 이 사고와 사유를 지니고 있는 자는 죽음 이후에도 살아 있는 자들과 관계를 잇는 자들이리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런 사유함을 갖고 산다면 조금은 어줍지만 멋들어진 삶을 살다가 귀천할 수 있을 것 같다. 전혀 기독교 신앙적이지 않은 책에서 대단히 복음적이고 순수한 신앙적인 공부를 했다. 남의 머리를 빌려 쓰는 것, 가장 소박한 돈이 드는 행복한 여행이다. 도전해 봄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