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요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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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마음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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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3-03-17 12:0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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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조의 산문 “만지고 싶은 기분”(마음산책, 2023년)을 읽고 김제동씨가 진행한 ‘talk to You’에서 만난 사람을 오늘은 OFF-LINE에서 보면서 그녀가 가끔 방송 중에 자기 소리를 낼 때, 말 표현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생각 자체가 싱그러웠고, 담백했던 자국이 있어 참 괜찮은 여성으로 마음에 자리 잡았던 그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몇 주 전, 우연히 북 카페에 들렸다가 그녀가 쓴 산문을 발견하고 그 옛 마음이 다시 복기 되어 본서를 구입해 읽었다. 혹자들에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너무 기대가 컸었나! 이 책이 그랬다. 아, 노파심으로 한 마디를 남겨야겠다. 작가 요조의 이 산문집이 질이 떨어진다든지, 형편없는 글로 넘쳐난다든지 하는 폄훼의 멘트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적어도 내가 작가의 글을 읽고 난 소회는 내가 그녀에 대한 표면적, 여론적인 기대감이 있었기에 갖고 있었던 크기에 대비한 내 소회라고 이해해 주면 좋겠다. 작가는 삶의 언저리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 책에서 담백하게 담아냈다. “요조 님, 말씀하실 때 ‘정말’, ‘너무’라는 말을 조금 덜 쓰려고 노력하시면서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P,23) 한 매체와 인터뷰를 하던 중에 인터뷰어에게 들은 평가였다고 작가는 부끄러움을 드러냈다. 작가는 말한다. “부사를 지겨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p,24) 기실, 이 말은 목사인 내게 더 심각하다. 설교라는 목사만이 갖고 있는 부담을 시행함에 있어서 극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심리 때문이리라! 왜? 부사는 대체적으로 감정을 자극하는 용어이기에 그렇다. 그래서 그랬는지 작가도 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이 챕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소망한다. 말하지 못한 부사로 가득 차 부사 인간이 된 내 몸을 알아봐주기를” (p,26) 목회를 하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하려는 의도가 있다. 성도들을 감정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시도다. 신앙생활을 하는 일체의 교우들로 하여금 지성적 영성으로 이끌지 못하게 하는 원흉과도 같은 인위적 작업이다. 성령의 이끄심과는 전혀 관계가 없음에도 마치 성령이 일하게 하시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대단히 적절하지 못한 행위가 감정 자극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것이다. 이럴 때 유용하게 쓰이는 단어들이 부사다. 부사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도 지성적 영성을 기초로 부사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 훈련이 필요함을 작가의 글을 통해 다시금 배워본다. 작가는 책을 많이 읽는 뮤지션으로 유명하다. 그녀가 김제동의 톡투유에서 툭툭 던졌던 말들을 주워 모으면 독서의 내공이 없이는 도무지 할 수 없는 말들이 종종 보였다. 이런 절제된 단어와 용어 인용을 보면서 내가 작가에게 매력을 느꼈던 이유도 들어 있다. 특히 뮤지션이었지만 특히 글 쓰는 작가라는 이중직을 갖고 있는 저자가 천착했던 책 중에 하나가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이라고 밝힌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을 읽자마자 소비를 감행했다. 묵직한 검정색 국어사전이다.” (p,73) 나는 작가가 주목했던 잃어버린 단어들에 대한 애착에 대해 박수를 보내고 싶다. 결이 같다고 우기면 고집인지 모르겠지만 나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이고, 설교원고를 작성하는 사람이다 보니 책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서고에 이런 類의 책들을 보이게 하고 종종 참고한다. 『우리 말, 절대지식』 (동아시아 간, 2016), 『순 우리말 사전』 (동아대학교 출판사, 2018) 등등 여러 권이다. 연이어 작가는 이렇게 독자들을 흥분하게 했다. “단어들은 너를 위한 거란다.” (p,73) 인천에서 태어난 나는 어려서 자유공원엘 자주 갔다. 비둘기가 노는 광경이 평화롭고 고즈넉해 보여서. 하지만 나와는 정반대로 새의 배설물은 공원관리자의 또 다른 골칫거리였을 것이 분명하다. 청소가 징글맞았을 테니. 더불어 어떤 경우에는 조류들을 싫어하는 자들은 아예 비둘기가 접근조차 못하게 손절했던 광경도 적지 않게 보았다. 작가는 이런 소소한 일상에 대해 의미 있는 글말을 남겼다. “저 애들이 더러워진 것은 우리가 길을 더럽게 썼기 때문이겠지!” (p,80) 100% 동의한다. 얼마 전, 종편 다큐에서 생물학자가 던진 말을 무겁게 받아들였다. “동물들의 세계에서 동물이 가장 원하는 것은 인간이 사라지는 것이다.” 사람처럼 위험한 種이 이 땅에 또 어디에 있겠는가! “내가 살고 있는 거실 한편에는 죽은 사람들의 사진들이 있다. 내 동생이 있고, 박지선이 있고, 변희수 하사가 있다. 그밖에 나만 아는 죽은 사람들이 몇 사람 더 있다. 나는 아침마다 그 앞에서 손을 모으고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아무 말을 한다. 중요한 일을 하는데 잘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한다고 하고, 어떤 연유로 고마움을 느낀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절을 하기도 한다. (중략) 그게 뭐야? 하고 누군가가 야유를 하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 나는 종교에 있어서 주체적이니까. 아직 이 종교의 이름은 없다.” (p,224) 작가는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이력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기독교 신앙을 버렸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하지만 작가가 말한 이 글을 읽다가 기독교 신앙을 버린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나를 세차게 때렸던 것은 그녀가 기독교 신앙에서 이탈한 이후의 삶의 정황이다. 글안에 그녀가 살고 있는 여러 가지의 보고들이 담겨 있다. 북 리뷰를 쓰고 있는 나만의 주관적인 평가라고 말하면 뭐, 또 어쩔 수 없겠지만 그녀의 삶의 정황이 외로워 보인다는 점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외로움은 헛헛함의 외로움을 말한다. 작가는 나의 이 말에 소설 쓰지 말라고 비난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뭐 글 소회를 밝히는 자유함의 내 일까지 작가의 눈치를 보고 싶은 마음은 1도 없다. 내 글 소회가 그렇게 느꼈다는 말을 피력하고 싶은 것뿐이기에 취소하지 않고 싶다. 나도 글 씀에 있어서는 주체적이니까. 글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싶었던 내용들을 의도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여느 책에 비해 기형도의 말대로 심비에 밑줄을 쳐야 하는 내용이 훨씬 적었다. 재 강조하지만 작가에 대한 폄훼가 아닌 나에게 재해석할 내용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솔직한 표현인 것 같다. 제주도에 내려가면 꼭 한 번 그녀가 경영하는 글방을 방문하고 싶다. 그리고 해줄지는 모르겠지만 싸인도 받고 와야지 싶다. 더불어 방문하면 그녀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녀가 神이 粒子일 수 있다고 믿는다면 예수는 기꺼이 그 입자가 되실 것이라고. 오늘 오전, 아마샤 게이샤 한 잔과 케니 G의 색소폰 경음악을 들으면서 고즈넉하고 소소한 일상을 나눈 작가의 글을 선물로 받아 너무 행복했다. 오후에는 또 치열한 일상을 살아내야지.
왜 주일은 이렇게 빨리 오는 것일까? (ㅠ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