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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말들이 돌아오는 시간2024-06-11 10:14
작성자 Level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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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나희덕
ㆍ출판사 문학과 지성사
ㆍ작성일 2022-06-13 20:25:07

 

나희덕의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문학과 지성사, 2019년)을 읽고


추양 하우스에 낯선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들어온 날, 몇 자 적기로 했다. 연륜이 쌓여가는 길목에서 내심 다짐하는 것은 해야 할 말만하자는 결기다. 목사로 살아온 지나간 날에 내가 내뱉은 말 중에 주워 담아야 할 말은 얼마일까? 아니 더 솔직히 주워 담을 수 있는 말은 과연 얼마나 될까하고 잔머리를 굴려보니 오싹하기까지 하다.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호모 파베르(faber) 이기 전에 호모 루아(ruah), 입김을 가진 인간” (p,24)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어주심으로 인해 인간은 온전한 모습을 가진 생령의 존재가 되었기에 하나님의 입김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저자는 이점을 놓치지 않고 시어로 인간을 진단한다.
“라스코 동굴이 폐쇄된 것은 사람들이 내뿜은 입김 때문이었다고 해요. 부드러운 입김 속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독소가 들어 있었는지 거대한 석벽도 버텨낼 수 없었지요. (중략) 분노가 고인 침으로 쥐 80마리를 죽일 수 있다니, 신의 입김으로 지어진 존재답게 힘이 세군요. 그러니 날숨을 조심하세요. 입김이 닿는 순간, 부패는 시작되니까요.”(pp,24-25)
저자는 이 시집의 제목을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이라 했다. 나희덕이 뿌려놓은 예리한 시연(詩宴)을 계속 들어보자.
“지금은 말(言)들이 돌아오는 시간/수많은 말(馬)들이 돌아와 한 마디 말이 되어 사라지는 시간/흰 물거품으로 허공에 흩어지는 시간”(p,19)
이 시문(詩文)을 중앙대학교 교수이자 시 평론가 남진우가 이렇게 풀었다.
“이 시의 화자가 기다리는 말은 당연히 말(馬)인 동시에 말(言)이다. 화자는 지금 죽음으로부터, 무의 바다로부터 귀환한 언어를 기다리고 있다. 시 쓰기란 한때 그 안에 존재했으며, 그로부터 출발한 언어를 다시 세계로부터 돌려받는 과정이다. 동시에 그 과정은 역으로 자기 안으로 밀려들어온 세상의 말(言)들을 다시 한 마디 말로 풀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pp,155-156)
필자는 종종 시인을 지칭할 때 인색하지 않게 천재라고 평가한다. 전혀 후회스럽지 않다. 세상에 자기 안으로 밀려들어온 세상의 말들을 다시 한 마디로 말로 풀어내는 자를 어찌 천재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5월과 6월에 나희덕에게 흠뻑 빠지기로 작정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나의 ‘루아’로 질식할 것 같았기에 그러기로 했다. 그녀가 집필한 6개 시집을 들숨으로 섭렵하면서 내 입에서 나오는 거친 ‘루아’의 독소들을 조금은 정제된 날숨 쉬기로 다잡이 할 수 있었다.
“풀은 돋아난다. 일구지 않은 흙이라면 어디든지” (p,14)
이 시문을 만나면서 필자는 쾌재를 불렀다. 나희덕의 이런 생채기 내기에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영적 전율과 문학적인 오르가즘을 느낀다. 일구지 않은 흙에서 풀이 돋아난다니! 너무 단순한 앎이지만 글로 표현해 내는 것은 천재성이 있기 때문이다. 뒤돌아보면 필자는 모범생이 되기 위해 사력을 다한 느낌이다. 모범생 목사가 되기 위해 나를 꾸준히 일구었다. 그것도 세모 반 듯, 네모반듯하게 말이다. 이런 삶을 목사의 운명(?)이라고 정의하며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웠다. 대단히 은밀하게 그런 삶을 살고 있는 ‘나’를 응원하며 나는 차원이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의도적으로 구별하는 자기애에 빠져 있었던 구제불능의 목사로 살아왔다. 아슬아슬했는데 시인에게 보기 좋게 강타 당했다. ‘일구지 않은 흙’을 경멸한 탓이다. 조금 더 젊은 나이에 일구지 않은 거친 모습의 아름다움과 진정성을 추구했더라면 필자는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목사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녹슬어간다는 것은 느리게 진행되는 폭발과도 같아서 붉게 퍼지는 말들이 조롱을 갉아먹었다.” (p,106)
저자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소름끼치게 하는 성찰이다. 나이가 들면서 더 강해지는 것이 있다. 노여움과 고집이다. 아주 옛날, 내가 젊었을 때 초로(初老)에 들어선 일체의 사람들에게 이것을 느껴 조롱을 섞어 비난했는데, 그 화살이 나에게 올 줄이야. 녹슬어가는 것이 무서운 것은 느리다는 점이라고 인식한 시인은 목사로 사는 내게 큰 스승과도 같이 다가왔다. 저자가 청파교회 교우라는 이야기를 김기석 목사에게 들었을 때, 질투했다. 부러웠다. 아주 잠시 동안. 

6월호 기고를 끝으로 필자의 글이 마감된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졸고임에도 불구하고 응원해 준 독자 제위께 머리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