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한나 아렌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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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필로소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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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01-06 17:49: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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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발터 벤야민”(필로소픽, 2020년)을 읽고 ‘시적(詩的)으로 생각하기’ 한나 아렌트가 발터 벤야민을 보았던 화두다. 저자는 말라르메가 ‘운문의 위기’에서 밝힌 한 문장을 의미 있게 소개한다. “시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 모두가 참이었다. 언어들의 결함을 철학적으로 보상해주는 시는 언어들의 우월한 보완물이다.” (p,139) 근래 읽었던 그 어떤 글보다 거의 완벽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의 시 찬미다. 작년 봄, 이 시를 만났다. “그간 괴로움을 덮어보려고/ 너무 많은 나뭇잎을 가져다 썼습니다/ 나무의 헐벗음은 그래서입니다/ 새소리가 드물어진 것도 그래서입니다/ (중략) 또 너뭇잎 하나가 내 발등에 떨어집니다/ 목소리 잃은 새가 저 만치 날아갑니다,”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문학과 지성사, ‘또 나뭇잎 하나가’ 중에서) 나희덕의 시를 ‘하가’하다가 이런 생각에 추해졌다. 나는 나뭇잎 하나의 가치와 존재보다 도대체 무엇이 내세울 수 있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동시에 부끄럽지만 이렇게 표현한 시인이 위대해 보였다. 시인들을 왜 천재라고 부르는 것일까? 아렌트의 말대로 시적으로 생각하는 천재성 때문이다. 그러기에 시는 언어들의 결함을 철학적으로 보상해 주는 보물이다. 발터 벤야민을 극찬한 한나 아렌트의 통찰이 눈부시다. “그는 시인도 아니면서 시적으로 생각했으며, 따라서 은유를 언어의 가장 위대한 선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언어적 옮김은 비가시적인 것에 물질적 형태를 부여할 수 있게 해주며 그리하여 비가시적인 것이 경험 가능하게 해 주는 벤야민은 이 은유적인 사고를 이해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을 주지 않도록 기여했다.” (p,56.) 다시 강조하고 싶은 화두다. 시적으로 생각하기 가장 상식적이지 못한 내 조국의 정치적 난장으로 인해 피로감이 극에 달한 오늘, 시 한편은 물론, 삶의 정황을 보면서 그 일들을 시적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영혼의 피난처로 나를 옮겨주는 작업이다. 저자는 시적 생각하기를 이렇게 승화시킨다. “이 생각하기를 인내하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시간의 붕괴 작용을 겪지만 그럼에도 부패과정은 동시에 결정화 과정이라는 확신이 있다.”(p,140) 그것이 시든, 인문학이든, 심지어 자연과학이든 생각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재앙이다. 구글에서 ‘popular passage’ 서비스를 제공한다. 소위 말하는 한 권의 책을 10초 안에서 이해하고 살펴볼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이다. 종이책 한 권을 10초 안에 읽게 해주는 서비스가 무얼까? 목사니까 이렇게 쓰면 용서가 될까 싶다. 인간의 심성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21세기 판 적그리스도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절대로 영적으로 생각하게 하지 말라는 악마 스크루테이프다. 아마도 지금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땅에 한나 아렌트나 발터 벤야민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공포다.
2022년, 첫 주 완벽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통절하게 시적으로 생각하기에 조금 더 천착하게 압박한 한나 아렌트와 발터 벤야민에게 심심한 謝儀를 표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