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누가 나를 쓸모 없게 만드는가?2024-06-11 10:10
작성자 Level 10

 

ㆍ지은이 이반 일리치
ㆍ출판사 느린 걸음
ㆍ작성일 2022-01-18 12:04:11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느린 걸음, 2019년)를 읽고


주류(主流)는 언제나 편안한 대로를 걷는다. 앞날도 보장되어 있다. 경우에 따라서 욕망하는 일체의 것을 차지할 수도 있다. 이 조건을 반사적으로 거부할 인간은 흔해 보이지 않는다. 반면 비주류는 언제나 길이 불편하다. 앞날도 불투명하다. 가장 최소한 갖고 싶어 하는 기본적인 소유들마저도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필자가 목회적인 면에서 롤 모델로 삼았던 분이 있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의 길을 택해 많은 고통을 당하며 살았지만,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간 선배의 글을 오래 전에 만났다. 그의 회고담 하나,
당시 그가 속한 교단의 모임이 지방에서 열려 내려가는 중에, 정말로 예기치 않게 총회장을 역임한 선배와 한 차에 동승하게 되었단다. 먼 거리를 함께 내려가는 어간, 총회장을 역임한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아무개 목사, 차를 타고 먼 거리를 여행할 때 멀미를 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네. 그건 차가 오른쪽으로 쏠리면 오른쪽으로 몸을 움직이고, 왼쪽으로 쏠리면 왼쪽으로 몸을 움직이는 거지. 사람이 사는 것도 매일반이야. 움직이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 지혜라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총회장을 역임하며 주류를 걸었던 사판 목회자가 외롭게 이판의 길을 걷고 있는 비주류 목사에게 던진 충고였다. 까칠하게 살지 말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라는 지적이었다. 본인처럼 성공하는 목사가 되는 노하우였던 셈이다. 그날 아무개 목사가 이렇게 말했단다.
“목사님, 저를 염려해서 해주시는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냥 제 길을 지금처럼 걷겠습니다.”
결국 아무개 목사는 주류와 타협할 줄 모르는 삶을 살다가 본인이 소속하고 있었던 교단에서 출교를 당하는 희생양이 되었다. 미련하기 짝이 없는 바보 같은 목사, 융통성이라고는 1도 없는 이 땅에서 살아가기 정말 어려운 지혜롭지 못한 멍청이 같은 목사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다. 그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자격이 없는 나이지만 나는 그 아무개 목사를 존경하니 말이다. 그러니 어떤 면에서 나는 더 멍청한 목사가 아닐 수 없다.
이반 일리치를 만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생거먼 대학을 설립한 ‘리 호이나키’를 통해서였기에. 당시 필자는 그의 걸작인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를 읽으며 너무 행복한 독서 여행을 하고 있었다. 여행 중에 호이나키가 여러 번 언급한 이반 일리치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이후 그의 책을 독서하면서 간접적으로 일리치를 접했다. 충격의 충격을 받았던 메시지가 있었다. 에피메테우스적인 인간의 자화상 이해는 벼락이었다.
“인간의 본성과 인격이 선하다는 것을 믿는 희망의 존재로 재물이 아닌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박홍규, “이반 일리치-소박한 자율의 삶”, 텍스트, p,286)
학교 교육이 이런 인간 만들기를 저해하는 가장 두드러진 주류적 산물이라고 질타한다. 학교의 기능이 계급화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100% 전부를 동의하라고 하면 동의할 수 없겠지만 일리치의 주장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그가 왜 학교 없는 사회(Deschooling society)를 역설했는지.
이런 일리치의 사상은 본서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나타났다. 1978년에 쓴 이 작품에서 일리치는 대단한 놀라운 혜안으로 미래를 예견한다. 소위 ‘전문가 제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정도로 인간은 전문가들이 계획하고 설정한 구도 안에 잠식될 것이기에 마치 그 틀 안의 요구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철저하게 배제되고 배제시키는 작위적인 미래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제도와 구조에 대하여 일리치는 단호하게 거부할 것을 시위한다. 산업 구조 시스템에 의하여 갈기갈기 찢어질 인간의 모습에 대하여 일리치는 그 시스템과 맞서 싸울 것을 독려하며 변호하고 응원한다.
저자의 이런 의식을 주류의 계보 안에 있는 자들은 인간적 급진주의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필자는 일리치를 사회적 약자를 보듬으려고 하는 가톨릭적인 냄새를 풍기는 르네상스주의자라고 부르고 싶다. 저자는 제도화되어 있는 정치적, 사회적 틀 안에서 요구하는 중앙(centre)의 지시를 조건 없이 따르라는 폭력에 적극 저항한다. 그 폭력의 집요함은 인간이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해서 일리치는 심지어 이런 물리적인 요구에 항거하지 못하는 자들이 해방되는 영역을 죽음이라고까지 역설하는 아픔이 그의 사상 속에 녹아 있다. 리 호이나키는 그를 이렇게 인용한다. 
“죽음에 대한 사회적 승인은 사람이 하나의 생산자로서도, 또 하나의 소비자로서도 쓸모없게 될 때 이루어진다. 그때는 큰 비용을 들여서 훈련시킨 한 소비자가 마침내 총체적인 손실로 간주되어 삭제되는 순간이다. 죽는다는 것은 소비자가 할 수 있는 궁극적 형태의 저항이 되었다.”(리 호이나키, “정의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 녹색평론사,p,193.)
저자는 본서에서 인간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는 산업 전반의 시스템, 구조, 조직,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전문가 집단에 대하여 맹폭한다. 인간이 설 자리를 찬탈한 원흉을 산업 시스템과 그것을 가동하는 상위 전문가들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도록 하는 일체의 에피메테우스적인 모델화를 부숴버린 적군임을 천명한다. 이 기막힌 체계와 조직적인 반란은 미래 세대를 잠식할 것이 분명하기에 적어도 저자는 철학 없는 풍요와 싸우자고 말한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풍요에 사람들이 중독되고 그것이 문화 속으로 한 번 배어들면 ‘가난의 현대화’가 생겨난다.” (p,34)
가난의 현대화에 맞서는 방법이 무엇일까? 이 책의 말미에 일리치를 설명한 볼프강 작스는 이런 대안을 제시한다. 물론 일리치의 주장과 맥을 같이 하는 동의이자 제언이다.
“인류 상호 간의 연대와 개인 차원에서의 절제와 중용을 등한히 하지 않는 ‘성장으로부터의 해방’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 (p,126)
절제 없는 풍요를 차지하게 만든 20세기의 영혼 없고, 철학 없는 자화상을 일리치는 이렇게 비판한다.
“인간을 불구로 만든 전문가의 시대” (p, 46)
필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일리치처럼 사회주의자가 아니다. 더불어 인간적 급진주의자는 더 더욱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이뤄지는 미슈파트와 체다카의 실천만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예수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리치를 통해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류들의 위험한 도박에 길들여지지 말아야 한다는 경성이다. 해서 이것을 공유하기 위해 북-리뷰를 남기고 있다. 
재독학자 한병철이 10년 전 한국사회에 던진 화두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한병철, “피로사회”, 문학과 지성사, p,23.)
동기 목사들 중에 연말 당회(인사, 예산 당회)에 우황청심환을 먹고 들어가는 친구들이 많다. 예산 초과는 성공한 목사의 지렛대, 미치지 못한 목사는 능력 없는 목사로 공격받기 때문이다. 올바른 신학과 교회관에 대하여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장로들이 비일비재한 한국교회와 그 분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예산 초과 달성을 목회의 목표로 삼고 무리수를 두어야 하는 목회자들을 바라보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교회로 세상이 살려달라고 손 내미는 교회를 만들어도 될까 말까 한 시대에, 도리어 역으로 세상에게 살려달라고 손을 내미는 비참한 교회의 모습에 오늘도 운다. 교회마저도 잉여의 풍요를 성공의 잣대로 여기는 참담함에 절망을 느낀다.
잉여의 산물이 많아지는 것만이 오직 관심의 전부인 시대에 희망은 민폐다.
30년 간, 노숙자들을 위해 밥을 푸며 하나님의 일을 현장에서 감당한 기독교적인 NGO가 노숙인들이 너무 많아져 그들을 추위에 떨게 할 수 없기에 건물을 넓히는 일을 천박한 자본주의적인 관점으로 해석하여 증축을 허가하지 않는 전문가들의 전문성에 삼가 애도를 표하고 싶다. 일의 내용보다 성과를 요구하는 저들은 과연 사람으로 살기를 포기한 듯 싶어 매우 유감이다.
프랑스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아베 피에르 신부가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족한 자’와 ‘공감하는 자’ 사이에 타인들의 고통 앞에서 ‘등 돌리는 자’와 그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받아들이는 자’ 사이에 있다.” (아베 피에르, “단순한 기쁨”, 마음 산책, p,227.)
교회도, 세상도 공감하는 공동체 되기를 바란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맑은 눈을 뜨는 자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그래서 그랬나 보다. 오래 전에 만났던 박노해 시인이 던진 시어 한 마디가 절절하게 필자에게 남아 있는 이유가. 

“고난은 싸워 이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역경은 딛고 일어서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좌절은 뛰어넘으라고 던져진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