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김기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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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꽃자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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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2-01-29 17:50: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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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 목사의 ‘하늘에 닿은 사랑’(꽃자리, 2022년)을 읽고 26일에 우편으로 책을 받았다. 마음이 두근거렸다. 기독교근본주의자들이 좌파 목사라고 맹폭하는 김기석 목사의 책을 받고 나는 심장이 뛰었다. 책을 통해서 저자와 나눌 사랑의 이야기 때문에. 더불어 글벗을 통해 던져질 부스러기를 받아먹을 기대감 때문에 그랬다. 나는 이 책의 초판이었던 “행복하십니까? 아니오, 감사합니다.”(2013년 간)를 독서하고 받은바 감동이 너무 커서 두 번째 졸저에 북 리뷰를 삽입했다. 훗날 아들이 건네받을 유산이 필자의 책들이기에 언제나 했던 방법 그대로 초판의 뒷면에 아들에게 사족을 남기며 이렇게 썼다.
“아들아, 어찌할까, 이 감격과 감동들을! 저자의 지성적 영성을 깊이 본받기를 기대한다. 2013,6,8. 주일을 예비하는 날 저녁에”
열심히 증보판을 읽었다. 읽으면서 기대한 것은 지난 9년이라는 세월 동안 저자의 옹골진 영성이 어디까지 나갔을까? 에 대한 대리적 기대감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 책 마지막 면에 이렇게 썼다.
김기석이 김기석 했다!
이제 들어가 보자. “암울한 현실에 지친 이들은 결국 근원적 물음 앞에 설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정답은 없다. 인간의 인간됨이란 이런 질문에 삶으로 응답하는 과정을 통해 구현된다. (중략) 신이 제거된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초인이다. 신이 사라지고 초인이 다스리는 세상은 행복한가? 초인의 세계는 전체주의로 귀결되기 쉽다. 성서의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존재를 귀하게 여기신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가장 깊은 의미의 인권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pp,9-10) 저자가 이 글을 쓰면서 깊은 심연에서 끌어올린 프롤로그는 독서의 과정을 흥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앞으로 펼쳐질 저자의 지성적 영성을 통해 퍼 올릴 눈 맑은 자만이 알 수 있는 영혼의 청량음료를 마실 생각에 왠지 행복했다. 오래 전,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말했던 이 대목에 밑줄을 그어놓았다. “두목, 이 동네는 물건 값이 참 싼 모양이군요. 영혼 값이 겨우 5 드라크마라니!”(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이윤기역, 열린 책들, p,43.) 하룻밤 몸을 섞을 과부의 몸값으로 흥정한 5 드라크마는 천박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몰골을 여지없이 고발하는 작가의 비수로 새겼는데, 저자는 이 천박함에서 벗어나는 통로가 ‘이마고데이’의 인지로 보았으니 비장하다. 작년 초에 결기 끝에 읽은 니체의 독설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오, 성직자들이 지어놓은 오두막을 보라. 그들은 달콤한 향기가 풍겨나는 그들의 동굴을 ‘교회’라고 부른다. 오, 위조된 빛이여, 습도 높은 공기여, 영혼이 마음껏 날아오르는 것을 허용되지 않는 곳이여. 그들의 신앙은 오히려 이렇게 명령한다.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라, 너희 죄인들이여!’라고”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사순옥역, 홍신문화사,pp,120-121.) 참 많은 사람들이 니체를 정신병자로 내몬다. 하나님을 대적하다가 심판을 받은 형국으로 몰아세운다. 하지만, 니체가 강력하게 비판한 교회의 민낯에 대하여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우리’를 본다. 왜 우리는 이렇게 되었을까? 나 또한 저자도 그랬듯이 초인이 통제하는 시대에 대하여 극도로 경계한다. 하지만 니체는 우리에게 진실한 신앙인으로 살지 않음에 대한 다이너마이트를 터트린 것이 분명하다. ‘신이 없는 곳에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징적인 인물인 이반의 갈파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대적하는 일체의 대상들에 대하여 마녀사냥 하듯 경계심을 갖지 않는다. 그 전에 먼저 할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나’와 ‘우리’에 대한 자기 성찰이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신영복 선생은 성찰을 이렇게 해제했다. “불치 병자가 밤중에 아기를 낳고 급히 불을 켜 아기를 살펴보았다. 혹시 아기가 자기를 닮았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신영복, “처음처럼”, RHK, p,39.) 성찰(省察)은 나를 살피고 또 살피는 투쟁이다. 저자는 이 책 전체에서 이 성찰의 싸움을 치열하게 한다. 이런 저자이기에 나는 그를 좋아한다. 객설 하나, 일반적인 독자들이 결코 읽지 않는 魔의 미친 페이지에 해당하는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본 도서를 출간한 꽃자리 한종호 대표도 어지간한 사람이다. 필자가 보기에 상업적 마인드에 있어서 빵점이다. 근간 200페이지가 넘는 도서는 눈길도 주지 않는 시대인데 참 바보다. 진짜 바보 즉 바로 보는 사람이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시도를 했지만 나는 한 대표에게도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한국교회는 물론 이 시대에 저자의 글이 올바른 교회 만들기의 시금석이자 펌프라고 믿었기 때문이기에 이 무모한 시도를 하지 않았겠는가. 히브리 시인이 노래한 시에 저자는 걸음을 멈췄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풀려났다.(시 124:7)” 이윽고 이렇게 해석의 향연을 저자가 펼쳤다. “강렬한 선언이다. 이것은 과거의 경험에 근거해 터져 나온 고백이지만, 앞으로도 그러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내포되어 있는 고백이요, 선언이다. 그래서 시인은 확신에 차서 외친다. 8절에서 ‘천지를 지으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신다.’고”(p,128.) 개역개정판 누가복음 5:5절을 읽어보자.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말씀에 의지하여’라는 이 구절을 가장 탁월하게 번역한 문장을 책에서 본 적이 있다. ‘under the control of the Word’ 직역하면 이렇다. “말씀의 통제 밑으로 들어가서‘ 나는 이 번역이 너무 좋다. 기막힌 통찰이 담겨 있기에 말이다. 그물이 찢어지고, 우리는 풀려났다는 시인의 노래를 일회적 사건이라고 마침표를 찍는 해석으로 종결짓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내 삶의 여정에서 일어날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쉼표를 찍는 해석자의 면모는 적어도 말씀의 통제 밑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으면 도무지 경험해 보지 못하는 영성의 깊이가 있기에 가능한 해석이다. 그래서 저자가 그랬나보다. “나는 가끔 성경을 매끈한 텍스트가 아니라 주름이 많은 텍스트라고 말한다.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이 더 많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성경을 읽는 이들은 ‘말하지 않은 것’까지도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p,243.) 전적으로 동의한다. 시편 129:4절을 저자는 너무 놀라운 영적 혜안으로 꿰뚫어 보았다. “의로우신 주님께서 악인의 사슬을 끊으시고, 나를 풀어주셨다.” 저자는 악인을 이렇게 풍자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대하지 않는 사람들, 힘에 도취하여 자기가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처신하는 이들은 하나님을 적으로 삼는 사람들이다.”(p,248) 악인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을 뿐이지 이들이야 말로 악인 중의 악인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먼저 감흡한 것은 나를 이런 악인의 무리에 들지 않게 하신 것이다. “성공은 야망을 낳는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더 과감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갈 것이다. 전례 없는 수준의 번영, 건강, 평화를 얻은 인류의 다음 목표는 과거, 현재의 가치들을 고려해 볼 때 불멸, 행복, 신성이 될 것이다. 굶주림, 질병, 폭력으로 인한 사망률을 줄인 다음에 할 일은 노화와 죽음 그 자체를 극복하는 것이다.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 올린 다음에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미래의 역사”, 김명주 역, 김영사, p.39.) 히브리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유발 하라리의 그 유명한 ‘호모 데우스’의 출현을 무대 위로 올린 갈파다. 악인이 어떤 존재일까? 펜데믹 3년 차에 승선한 오늘 대한민국을 보면서 목사라는 직책으로 살아가기가 너무 참담해서 낯빛을 숨기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 중에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은 교회가 호모 데우스의 선봉이 된 것처럼 움직일 때다. 세습이라는 몰골로 교회가 일그러지는 소식이 들릴 때 아프다 못해 쓰리다. 저자는 이렇게 개진한다. “오늘의 개신교회가 힘을 잃은 것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기준에 따라 자기 삶을 조율하기 때문이다.” (위의 책, p,453) 시쳇말로 빼박 촌철살인이다. 내일 섬기는 교회 주일 설교에서 저자의 이 글을 인용한다. 그리고 나와 교우들 모두에게 이렇게 경종을 울릴 예정이다. “저자의 이 신음은 바꾸어 말하면 세상은 차치(且置)하고 예수를 믿는 자들이라고 떠벌이는 우리들조차 성공의 가름대와 지렛대를 세상의 것과 똑같은 것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제천세인교회 1월 30일 주일 설교 원고 중에서) 현실은 위중하지만 저자는 시인의 노래에 희망을 건다. “의로우신 주님께서 악인의 사슬을 끊으시고, 나를 풀어주셨다.” 지난달에 이판 승려였던 법정의 유고집에서 출가에 대해 해석한 그의 담론을 의미 있어 밑줄을 그었다. “출가는 집을 나온다는 뜻입니다. 종교적인 의미로는 집착과 타성의 집에서 훨훨 떨치고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출과 출가는 다릅니다. 출가는 자기 의지와 선택에 따라서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삶의 궤도를 수정하기 위해 나오는 것입니다.” (법정, “스스로 행복하라”, 샘터, p,20.) 저자도 비슷한 글을 읽은 듯하다. 인용문은 이렇다. “해남에 있는 일지암 암주인 법인 스님은 출가는 삶의 큰 전환이라면서 무지에서 지혜로, 이기적 욕망에서 나눔으로 삶의 방향을 선택한 것이라 말한다. 출가는 단순히 삶터의 이동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삶의 가치와 생활방식의 전환을 의미한다는 것이다.”(2016년 4월 27일자 한겨레신문, ‘선택은 도피가 아닌 위대한 포기’에서, p,123, 재인용.) 법정의 글말을 읽다가, 저자의 인용문을 읽다가 오기 섞인 주존심(主尊心)이 타올랐다. 이렇게 말이다. 우상숭배의 근원지라고 근본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이 맹폭하는 불교계가 지금도 버젓이 그들만의 영성을 이어가는 것은 이런 이판승들이 갖고 있는 엄청난 불교적 영성과 불교 철학적인 가치 때문이라고.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우리는 어떤가? 의 질문에 허릅숭이가 된 듯해서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다시 옷깃을 세우기로 했다. 독자들에게 필자가 교만한 마음으로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아이들 말로 적어도 쪽(?)팔리지는 말자고. 예수 때문에 불편하게 살기로 작정한 것이 신앙생활이지 않은가. 서평이라고 할 수도 없는 허접한 글을 마무리하면서 저자가 책의 끄트머리에 인용 수록한 유대인 카프란의 말을 공유하고 싶다. 그의 글이 목사로 사는 나에게 천둥과 벼락이었기에. “만일 당신이 회당에 들어올 때의 그 사람으로 회당을 떠난다면, 당신은 회당에 오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p,597.) 코로나 19의 공격을 받은 지난 2년 동안, 사역하는 현장에서 전무했던 일을 경험하면서 너무 힘들고 어려운 목사이기에 당해야 했던 질곡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필자가 곱씹었던 문장이 있었다. “오늘 우리들이 겪는 최고의 비극은 신, 구약 성서의 메시지와 교회와 신학을 그것들의 진리로서의 ‘가치’가 아니라 ‘기능’으로 여기는 일이다.” (자크 엘륄, “비틀어진 기독교, 박동열, 이상민 공역, 대장간,p,95.) 나는 예수의 가치에 붙들리고 싶다. 예수는 스킬이나 방법이 아니기에 말이다. 나는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서 내 사랑하는 교회들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싶다. 지금은 한국교회가 골리앗에게 집중할 때지, 엘리압에게 한 눈 팔 때가 아니지 않은가! 저자는 작년 한 해, 대꾸할 가치조차 없는 자들의 무자비한 공격에 노출되어 번-아웃은 물론 그로기 상태를 경험했을 것이 분명하다. 얼마 전, 오랜 만에 나눈 안부 전화기 저편에서 들리는 선배의 신음소리를 농익게 들었다. 같이 울어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이 없는 자라 감히 그 흔한 위로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저자인 김기석 목사는 누가 뭐라 해도 호흡 곤란의 상태에 있는 내 사랑하는 한국 교회의 코에 산소 호흡기를 주입하고 있는 하나님의 종임을. 선배가 본서에서 노래했던 히브리 시인의 탄원처럼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라고 간절히 부르짖고 붙들고 있는 그 영혼의 아딧줄을 필자도 같이 붙들고 있다고 전하며 응원하고 싶다. 선배가 건강하기를 화살기도 한다.
ps: 이 책의 북 리뷰를 조금 더 세밀히 읽고 싶은 독자들은 필자의 졸저 ‘시골 목사의 김기석 글 톺아보기’(동연 간, 2018년) pp,57-78를 참고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