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리처드 보컴, 트레버 하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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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터치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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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1-06-03 09:25: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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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보컴과 트레버 하트의 ‘십자가에서’(터치북스 간)를 읽고. “베다니의 마리아, 가룟 유다, 실패자 베드로, 가야바, 본디오 빌라도, 바라바, 구레네 시몬, 막달라 마리아, 백부장, 니고데모,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
저자들은 이들을 무대 위로 올린다.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서 놀라운 것은 이미 우리들에게 학습되어 있는 복음서 내의 성공자(?) 물론 말도 안 되는 평가이기는 하지만 네임밸류에 있어서 뒤처지지 않는 자들이 아닌 왠지 가까이 하면 안 될 것 같은 불온한 생각을 갖게 하는 인물이 더 많다는 점이다. 우리는 열거한 사람들을 말할 때, 뭔가 이상했던 사람, 혹은 불편한 성경 속에 인물, 심지어는 실패한 사람 등등으로 해석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저자들은 무대 위로 올려놓은 이 사람들을 신앙적 잣대로 평가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의 삶의 정황 (Sitz im Leben)을 이해하며 그들의 삶을 재해석하려고 한 발군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적어도 지성적 영성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면 이 책을 파헤치라고 권하고 싶다. 근래, 근본주의자들이라고 평가하기조차 싫은 (왜냐하면 근본주의자들은 고집불통의 사상이라도 있기에) 몇 몇 인사들이 유트버로 나서서 본인들의 열광적 근본주의와 조금이라도 색깔이 다르면 좌파 혹은 빨갱이로 몰고 가는 대화 안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점잖게 권면해 본다. 제발, 이 책을 읽으라고. 레이드 아이작이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우리는 너무나 자주 당신의 방법이 아닌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당신의 제자가 되려 합니다.” (p,78)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열거한 인물들을 내 잣대로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앞에 열거한 이들 모두는 주님에 의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된 의미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뉘우치며 가룟 유다가 은 삼십을 가지고 제사장들에게 가져갈 때의 그 처절함도 없으면서 그를 정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자행한다. 나는 천박한 죗성으로 무장한 채, 수없이 간음의 죄를 범하면서도 막달라 마리아를 몸 파는 여자라고 누명을 씌워 불결하다고 멀리하며 정죄한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었건만, 나는 그 십자가를 절묘하고도 교묘히 피하면서, 시몬에게 ‘기꺼이’가 아니라 ‘마지못해’라고 덧씌우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며 여유자작 한다. 베다니의 마리아가 부은 향유를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아쉬움에 속상해 하며, 그녀에게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설레발을 친 자가 바로 나 아닌가!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신학교를 다닐 때,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읽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로 유명한 저자인 카잔차키스는 이 책을 저술함으로 그리스정교회에서 파문을 당할 정도로 이 책은 출판 당시 불온한 책으로 낙인찍힌 책이다. 수호천사로 가장한 사탄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비아냥거리는 자들을 위해 죽을 가치가 없다고 부추기면서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한다. 수호천사의 속삭임을 들은 예수는 그와 이렇게 독백하며 십자가에서 내려온다. “그렇다면 십자가, 그리고 못과 고통 어두워진 태양 모두가 꿈이었나요? 그래요 꿈이었어요. (중략) 갑시다. 천사가 말하더니 꽃이 만발한 풀밭을 유연하게 사뿐사뿐 걸어가기 시작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고려원, 1982, p,492) 물론 픽션이지만 신학에 대해 일천하던 그 때 그 시절, 이런 불온한 자가 있나 싶어 카잔차키스를 이단아로 몰아 세웠던 성숙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도리어 소설가는 굴레에 박혀 있는 도그마에 포로 된 교회를 각성시킨 역설의 주인공이었는데 너무 무식했다.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지금 리처드 보컴과 트레버 하트는 천박하지 않은 글 ‘십자가에서’ 이렇게 멋들어지게 니코스에게 한 마디를 한다. 그래 이게 지성적 영성을 추구하는 자의 성찰이다. 저자들은 본서의 끝자락에서 이렇게 갈무리를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기적(십자가에서 내려오심)을 원치 않으셨다. 십자가 위의 이 사람이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의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전한 모든 기적들이 순식간에 무의미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중풍 병에서 온전하게 된 사람은 다시 침상에 눕게 되고, 혈루 병에서 치유 받은 여인은 다시 피를 흘리게 될 것이고, 여리고의 소경은 다시 어둠 속에 빠지게 될 것이며, 열 명의 문둥병자들은 다시 나병의 고통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나사로와 같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들은 다시 그들이 나왔던 무덤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급작스럽게 말라버린 거대한 바다의 물고기처럼 사람들은 조용한 대학살 속으로 고통 속에 몸부림칠 것이다.” (pp,235-236) 필자는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선 김동호 목사와 함께 ‘바른 교회 아카데미’라는 교회 건강성 리서치 기관에서 목회자와 교회의 본질 회복이라는 테제를 나름 실천하기 위해 함께 달려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김동호 목사께서 갖고 있는 목회적인 철학, 예를 들자면 청부론, 청빈론에 대하여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신학적으로 적절한 사상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그 분이 행하려고 했던 한국교회의 건강성을 위해 나름 수고와 진력을 다해 섬겼던 흔적들로 인해 존중하는 마음과 감사를 표하곤 한다.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요 근래, 극단적 문자주의와 근본주의에 빠져 있는 대화가 안 되는 몇 몇의 인물들이 그를 향하여 지금 김 목사께서 당하고 있는 육체적인 질고를 하나님의 심판 등등으로 운운하며 맹폭하는 무례함을 보면서 유감스러움을 넘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들어 참담함까지 느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모두를 품으셨다. 그랬기에 두 명의 저자는 앞에 열거한 등장인물들에 대하여 최선의 예의를 지키며 그들의 삶에 평가를 유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인들의 몫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리라.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를 거절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나와 너의 주군이시다. 그분이 예의를 지키셨는데 그를 잘 믿는다는 자들이 예의하고는 담을 쌓은 개그콘서트보다 못한 아이러니를 본다.
이 책의 마지막에 소개하고 있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의 해피엔딩 멘트처럼 사상, 철학, 이데올로기 등등이 아닌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달려간 자만이 천성에 도달할 수 있음을 오늘도 곱씹어 본다. 십자가의 은혜는 본래 그런 것이다. 두 신학자들을 통해 귀한 공부를 지난 달 마쳤다. 저자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