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이용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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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종문화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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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1-06-10 11:58: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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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호 교수의 ‘성서 통독을 위한 텔레트(門) 1: 모세오경’(종문화사 간, 2021년)을 읽고 “살아가다가 땀 흘리며 가쁜 숨/몰아쉬며 살아가다가/더러는 무릎 꺾고 주저앉아/마음속 고즈넉한/섬이라도 한 채 찾아낼 일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어다. 인생을 살다가 마음속 고즈넉한 섬이라도 한 채 찾아낼 수 있는 감사는 참 다양하리라. 어떤 이는 여행을 통해, 어떤 이는 운동을 통해, 또 어떤 이는 음악을 통해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필자는 이번 주간, 목사로 살기에 당연히 내가 해야 할 일인데, 고마운 친구의 수고로 고즈넉한 섬을 독서를 통해 부스러기 은총으로 찾아냈다. 모교 구약학 교수로 후배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양성하고 있는 존경하는 친구, 개인적으로는 신학교 동기이기에 천방지축의 아들을 신학교에 보낼 때 믿고 맡겼던 참 고마운 친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책을 한 권 출간했다. “아버지, 이용호 교수님에게 인사 다녀왔는데 아버지 드리라고 책을 한 권 주셨어요. 제가 봤는데 너무 은혜로워서 잘 적응이 안 되어서 낯설었어요.” (ㅎㅎ) 그도 그럴 것이 친구는 언제나 학문적이고, 진보적 신학자이기에 교과서적이라 개인적으로 내가 만나면 더 많이 웃고 여백을 갖자고 잔소리를 할 정도의 원칙주의자이다. 그러다보니 여기에 익숙했던 아들이 신학교 은사가 학문적인 책이라기보다는 성경 통독을 위한 내비게이션과 같은 은혜로운 책을 출간했으니 아들의 농이 정서적으로 이해가 된다. 그런데 친구를 이렇게 평가하는 나를 보니 내가 할 일은 아닌 듯하다. 왜? 필자나 저자나 도진개진이라. (ㅎㅎ) 아들이 건네 준 책은 저자가 구약성경 통독을 위해 신대원 제자들과 함께 만든 그룹명이 ‘門’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텔레트’인데 그대로 따온 이름을 붙인 ‘성서 통독을 위한 텔레트(門) 1: 모세오경’이다. 읽다가 제일 먼저 든 소회는 어느 영화에서 엄청난 신드롬을 일으켰던 명문이었다. “지금까지 성경 통독을 위한 이런 내비게이션은 없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정말로 진정성이 있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용호야!, 정말 수고했다. 필자는 금년이 내 목회 30년차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성경 통독에 대한 안내서를 접했다. 교만한 토로인지는 모르겠지만, 접했던 성경 통독 안내서는 대체적으로 허접했거나, 심지어는 축자영감설이나 문자주의에 빠져 있는 읽어서는 안 되는 책자도 있었다. 그래서 성경 통독을 위한 길라잡이라고 하지만, 성서신학의 기본적 이해조차도 안 되어 있는 형편없는 책들을 적지 않게 경험했다. 필자는 성경통독 텔레트의 첫 시도인 모세오경을 접했는데 독자들에게 권하는 이유는 성서신학자의 철저한 자기 연구를 기초로 한 수작이라는 데에 있다. 이 말은 그냥 성경에 나오는 메시지를 순서에 따라 성경을 읽으라는 안내서가 아니라 성서신학자의 철저한 신학 해제를 첨부하여 조금 더 성서 통독 시에 온전한 텍스트 이해를 제공한다는 말이다. 실례를 하나 소개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이 구절들 가운데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첫째,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다. 하나님의 형상과의 유사성은 하나님에게 있는 창조 능력이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적 특징’(창조적인 특징은 인간의 고유함을 나타낸다. 즉 생각하고 상호간의 소통을 통해 서로 미워할 수도 또는 서로 축복할 수도 있는 능력을 말한다. 또는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특징을 말한다.)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 창조 능력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통해 구체화 된다. 그 명령은 인간이 자연을 제멋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연을 경작하고 보호하고 가꾸고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흙으로부터 나온 ‘아파르’라는 원재료다. 이 단어는 구약성서에서 대체로 죽음과 허무함을 의미한다. ‘아파르’로 만들어진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음이 동반된 삶을 산다. 셋째, 하나님의 숨 즉 ‘니쉬마트 하임’이다. 니쉬마트 하임은 인간이 자신에 대해 자각하고 어떤 대상을 지각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숨을 통해 생각할 수 있고, 도구를 사용할 수 있으며, 타인에 대하여 연민을 느낄 수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p,37)
저자의 이 설명은 소위 말하는 J 문서에 등장하는 인간 이해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을 한 자들이 아닌 신학에 일천한 신자들이 창세기를 접할 때, ‘하나님의 형상(첼렘)’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적지 않은 전 이해를 주는데 공헌한다. 적어도 저자의 이 설명에 기초하여 성경을 접하다보면 에노쉬인 우리들이 자연을 훼손하는 일이나, 주어진 창조 세계에 대하여 왜 잘 관리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기에 4대강 사업과도 같은 막장의 일들을 다시는 자행하지 않을 것이기에 말이다. 저자의 공은 이런 성서신학적인 깊이와 넓이를 제공해 주는 것 외에 또 다른 기여를 한다. 그것은 성서신학적인 이해를 위한 관통(penetration)이다. 필자가 본서를 읽으면서 가장 흥미롭게 여긴 대목이다. 저자는 모세 오경에 담긴 스토리를 도표와 그림을 삽입하여 시청각적인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그 결과, 글을 읽는 이로 하여금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모세오경 관통이다. 흔히 접하는 출애굽기의 한 팩트를 그 실례로 들어보자. 저자의 발군의 실력이 보이는 대목이다. 소위 말하는 시내산 講話에 얽힌 메시지다. 저자는 시내산 강화 사건을 가장 큰 프레임으로 놓고 출애굽기 1-18장까지를 시내산 도착의 이전 사건이라는 그림을 그린다. 이후 출애굽기 19장부터 시작하여 레위기와 민수기 10장을 기가 막힌 구조로 解題하는 데 시내산 강화의 법을 율법 수여의 내용으로 즉 십계명과 언약법전과 성막 건립의 프레임으로 설명한다. 이윽고 같은 시내산 강화사건의 줄기로 5대 제사와 정결의식의 법 그리고 성결법전까지 레위기라는 세 번째의 토라를 통해 해석한다. 더불어 민수기를 시내산이라는 프레임에서 출발하여 바란 광야로의 쉬프트와 바란에서 모압이라는 공간 이동을 통해 이스라엘 신앙공동체가 경험하야 했던 아픈 역사로 해석한다. 필자는 그 동안 많은 책을 통해 모세 오경에 대한 설명을 들었지만, 특히 민수기를 사건 별 텍스트로 해석하지 않고 공간 별 움직임으로 해석한 경우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대단히 신선하게 저자의 안내를 열광하며 읽었다. 목사로 사역하면서 모세 오경 중에 개인적으로 필자가 가장 천착하며 아꼈던 토라는 다섯 번째 책인 신명기였다. 이유는 구약을 연구하면서 목사들마다 성향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는 특히 구약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승리자가 되기를 기대했던 이스라엘 지도층이 인위적으로 조각한 역사인 역대기 역사보다는 민중들의 아픔은 물론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나름 전하려고 했던 신명기 역사에 더 많은 방점을 찍으며 집중했기에 신명기 역사의 primary source 인 신명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왔다. 해서 저자가 신명기를 어떻게 길라잡이 했는지 주목하며 독서했다. 신명기라는 다섯 번째 두루마리의 책 제목을 영어로 Deuteronomy라고 한다. 직역하면 두 번째의 법이라는 의미다. 그도 그럴 것이 모세가 가나안에 입성하여 지난 과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광야 여정과 명령을 복기하는 세 번의 설교가 담겨 있는 메시지이니 다시 하나님의 법을 곱씹는다는 의미의 ‘Deuteronomy’는 적확하다. 필자는 이 대목 중에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진 쉐마에 대해 저자가 남긴 어록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 저자는 쉐마를 역설하면서 ‘레바브(마음)’, ‘네페쉬(영혼)’, ‘메오드(힘)’를 다하여 하나님을 ‘아하브(사랑)’하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소개한다. 그리고 이렇게 적시했다. “신명기 6:5절은 다음과 같은 의미다. 너의 모든 지성과 감정의 마음을 사용하여, 네가 가진 영혼의 행위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의 레브와 네페쉬를 강력하기 이끄는 힘을 통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라는 것이다.” (p,258) 동시에 저자는 이 대목을 이렇게 갈무리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그분을 향한 무조건적인 순종에서 나온다. 그 무조건적이고 전인적인 사랑 없이는 자기 삶의 우선순위로 야훼를 둘 수 없다. 그 때문에 전심(레바브, 네페쉬, 메오드)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삶의 기준으로서 그의 명령과 증거와 규례를 삼가 지키고 착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다.”(pp,259-260) 부흥회에서 부흥사에게만 들을 수 있는 메시지를 이용호 교수에게 듣게 될 줄이야. (ㅎㅎ)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용호 교수가 정말 수고했다. 평범한 내용처럼 여겨지는 일을 가장 비범한 하나님의 레마로 만들어준 수작을 친구가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섬기는 교회 여전도사가 은혜 받았다고 지난주일이 책 한 권 선물을 주고 갔다. 시 평론이었다. 책 선두에 나오는 칼 바르트의 시인 ‘새해를 위한 기도’를 인용하며 소개한다.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십니다. 우리는 친척과 친구와 무리에서 왔고, 깊은 고독에서 왔습니다. 느긋하게 행복을 누리거나 온갖 고난을 겪습니다. 가족관계는 평온하거나 긴장되어 있거나 무너져 있습니다. 우리는 크리스천 공동체의 언저리에서 맴돕니다.” 이 시어를 소개한 김 교수는 이렇게 시평을 남겼다. “인간이란 흔들리는 컵 안의 물보다 더 불안한 존재가 아닐까!” 라고. (김응교, “질병과 슬픔 앞에서”, 비아토르, pp,31-33) 이 글을 읽고 나서 친구의 책에 대한 서평을 쓰다 보니 기막힌 감동이 스며든다. 언제나 주군의 언저리에서 맴도는 자들이 우리들이다, 아니 나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역설한 쉐마가 레마로 강하게 나의 레바브와 네페쉬를 메오드처럼 타격한다. 제자들과 마음이 동해 만든 성경통독의 텔레트에 기쁜 마음으로 들어섰다. 그래서 친구가 계속 이을 역사서, 지혜서, 예언서 텔레트가 또 기대됨은 당연한 일이지 싶다. 아들이 전언해 준 바로 이 교수가 허리 때문에 많이 힘들어한다고 하는데 친구가 건강하기를 화살기도 해 본다.
“용호야, 수고했다. 너 때문에 수지맞았다. 방학 하면 제천에서 번개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