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차준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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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성서유니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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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0-12-08 22:25: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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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준희 교수의 “6개의 키워드로 읽는 이사야” (성서유니온 간)를 읽고
이번에는 심장이 뛰었다.
재미있었다. 저자의 글을 읽은 소회다. 무슨 총평이 이렇게 촌스럽지! 라고 생각하겠지만, 적어도 저자의 글을 제법 많이 읽은 필자가 이렇게 갈무리한 것은 가벼운 말이 아니다. 저자가 신학교 교수이자, 성서학자이다 보니 글을 쓰면 일단은 재미가 없는 게 현실이다. 혹여나 노파심으로 한 마디, 신학 서적은 재미가 있다면 둘 중에 하나다. 전혀 신학적이지 않든지 아니면 신학을 빙자한 개인의 신변잡기 식 너스레떨기이든지. 몇 개월 전, 꼭 가야하는 결혼식이 부산에서 있었다. 코로나 19의 공포가 부산에 충만했을 때였기에 망설였지만 안 가면 후한이 두려운 경사라 결심을 하고 장거리를 가야하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 5시간 40분이 걸리는 제천-부산행 기차였다. 그 때 손에 들렀던 두 개의 책, 강영안 교수가 쓴 “강 교수의 철학 이야기”(IVP 간), 과 그의 번역서인 엠마누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문예출판사 간)였다. 심장은 안 뛰었지만 많이 공부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전자는 강영안 교수의 지성적 성찰의 총아처럼 보인 철학 입문의 유혹이었고, 후자는 타자의 주체적인 수용이 없는 철학하기가 얼마나 공허한 짓인 알려준 선생님의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5시간 40분의 선택은 옳았다. 이미 경험한 저자의 책들은 통상적으로 재미가 없었다. 저자가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적어도 목회자로서의 저자의 책읽기는 그랬다. 또 다른 독자들이 내 생각과 다르면 뭐, 어쩔 수 없다. 쌍둥이들 간에도 세대차이가 있다는 데, 목회자들 간에 생각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정상이 아닌 게 분명할 테이니 오히려 그렇게 다름이 저자에게는 다음 책을 출간하는 데 도전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말이다. 대단히 이상하다. 이 책은 재미가 있었다. 또 하나, 심장도 뛰었다. 작년 저자가 번역한 “구약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새물결플러스 간)를 읽고 저자에게 보내준 서평에 필자가 이렇게 총평을 기록한 것을 기억한다. “틀린 말이 없는데 왜 심장이 안 뛰지!” 반면,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카운터를 해 보았다. 적어도 세 번의 심쿵이 있었다.
심쿵 1
4번째 키워드인 제 2 이사야의 ‘하나님의 고난 받는 종’에 실린 이사야 50:4절에 대한 해석이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림무드)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이사야 50:4절이다. 저자는 이 글을 소개하면서 그만의 신학적 성찰로 이렇게 제 1 이사야의 신탁인 이사야 8:16절을 병행시켰다.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내 제자(림무드)들 가운데에서 봉함하라” 저자의 갈파에 주목해 보자. “여기서 ‘제자’라는 단어가 ‘림무드’입니다. 우리는 ‘학자’라고 하면 가르치는 것만 생각하지,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8:16절에서 제자라고 번역했으니 50:4절에서도 제자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습니다.”(차준희, “6개의 키워드로 읽는 이사야서”, 성서유니온, 2020,140.) 학자를 ‘제자’ 즉 ‘공부하는 사람’, ‘배우는 사람’으로 주석한 저자는 결정타를 하나 남긴다. “본인 배운 것만 가지고 평생을 우려먹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곰탕신앙이라고 합니다. ‘아침마나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라는 말에 매일매일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것이 아니라 그날그날 신선한 양식을 깨우침으로 받고 그것을 공급해야 합니다.”(위의 책,141.) 목회자가 공부 안 하면 되겠는가를 에둘러 강타했다. 백석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은퇴한 류호준 목사가 은퇴 이후 그 동안 하고 싶었지만 참았던 비수를 담은 책을 출간했다. 필자는 류 교수를 잘 몰랐다. 하지만 그의 글을 읽다가 그가 총신대 2중대라고 하는 백석의 교수로 어떻게 버텼지 생각하며 생각이 복잡했던 기억이 있다. “본연의 임무에서 일탈한 목회자들, 종로 5가를 배회하며 뷔페 식사에 영혼을 판 정치꾼 목사들, 삼삼오오 모여 먹을거리와 볼거리에 탁월한 지각을 갖고 있는 목회자들, 진지하게 설교 준비를 하는 대신 인터넷 서핑의 신공력을 가지고 표절에 능란함을 보여주는 목사, 성서 문자주의의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독선적 설교를 자행하는 설교자들, 교세와 교단을 발판 삼아 개인의 명예와 영리영달을 추구하는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소위 하나님의 도성을 알려진 예루살렘과 우리 교회와 교단 안에 널려 있다는 것입니다.” (류호준, “교회에게 하고픈 말”, 두란노, 117-118.) 차준희 교수의 글과 오버랩이 된다. 제발 공부하는 목회자가 되라는 권면을 이사야의 키워드로 설파한 내용은 적어도 필자의 심장을 뛰게 했다.
심쿵 2
세 번째의 키워드인 ‘평화’에서 제시한 이사야 11:1절의 통찰이 심장을 뛰게 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저자의 글을 읽어보자.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지점이 다윗이 아니라 다윗의 아버지라는 점이 특이합니다. (중략) 현재 예루살렘에서 통치하고 있는 유다의 왕들은 모두 다윗의 후손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후손에서 나온 왕들은 하나 같이 이상적인 왕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상적인 왕은 다시 원뿌리로 돌아가서 다윗을 낳은 그 아버지로부터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12.)
독자들이나 필자가 혹여나 간과하거나 아주 쉽게 희석시킬 수 있는 위험성 중에 하나가 성경이 제시한 긍정의 인물들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이미 알려진 네임밸류 때문에 그냥 맹목적으로 미화하려는 시도는 대단히 식상한 상투성이다. 이것을 이미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남포교회를 섬겼던 박영선 목사가 날 서게 비판한 아브라함을 읽으면서 필자는 왠지 모를 희열을 느꼈고, 기득권 정치 권력자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고난의 형국을 경험해야 했던 ‘하비루’에 대해 재조명해 준 서남동 교수의 글에 한때는 열광하기도 했다. 억설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바울의 연약했던 여성관에 대해 무섭게 비판한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에게 그래서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상투성과 맞장 뜨는 학자의 갈파는 적어도 나 같은 독자를 흥분시킨다. 다윗이 아닌 이새에 대한 재조명을 건드린 저자에게 그래서 박수를 보낸다. 심쿵 3
5번째의 키워드인 ‘선교’에서 들추어 낸 저자의 이 대목은 나의 심장을 고동치게 만든 저서의 압권이었다. 이사야 56:3-7절을 읽어보자.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그냥 읽어도 뜨거워진다. 신명기 23:1-3절의 반전이다. 고자, 이방인들에 대한 철저한 배격 그리고 유리시킴이라는 유대의 자존심을 뒤집어엎는 혁명적 선언을 제 3 이사야가 외친다. 이제는 고자도, 이방인도 야웨 공동체의 일원으로 승격됨을 제 3 이사야가 분명히 선언한다. 유대인들이 읽게 되면 벼락이 떨어질 내용이지만 제 2 이사야의 회복의 메시지 이후 조금도 변하지 않은 유대적인 종교 공동체의 아집과 독선을 보기 좋게 뒤집는 야웨 신앙공동체의 정체성을 재정립한 셈이다, 저자는 이 혁명적인 야웨의 일하심을 이렇게 멋있게(?) 적시했다. “여기서 하나님 백성의 정의가 ‘선택된 백성’이 아니라 ‘선택하는 백성’으로 미묘하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중략) 이제 성전은 ‘선민의 집’이 아니라 ‘만민의 집이 되었습니다. ‘선민만 기도하는 집’이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새롭게 확대됩니다.” (195-197) 저자의 성찰을 접하다보니 오래 전에 읽었던 스캇 맥나이트의 갈파가 생각났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복음을 주셨다. 복음은 나에 관한 것이기 이전에 우리에 관한 것이다. 나 자신은 우리 안에 있으며, 우리 없는 나의 복음은 오로지 나에 관한 복음이다. 나는 복음이 나를 위한 것이지만 그것을 넘어 나가 아닌 우리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 기쁘다.” (스캇 맥나이트, “배제의 시대, 포용의 은혜, 아바서원, 2013, 88.) 저자는 총 6개의 키워드를 갖고 이사야를 읽으려고 노력했음을 책에서 밝혔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부의 과정은 칭찬 받아야 마땅하다. “사실 이사야는 저의 주 전공이 아닙니다. 제 주 전공은 예레미야와 미가서입니다. 이번에 주 전공이 아닌 이사야 강의를 준비하면서 이사야서를 새롭게 공부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덕분에 이사야서를 이전보다 깊이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로 몸살이 날 정도였습니다.” (165,)
왜 안 그랬나 싶어 마음이 쨘 해졌다. 힘든 가운데에서 이 길을 가줌으로 목회자는 물론 독자들을 위해 좋은 이사야 공부거리를 던져준 친구에게 또한 감사했다. 그러고 보니 저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귀한 림무드임에 틀림이 없다.
친구야, 이번엔 심장이 뛰었다. 수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