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지은이 | 필리스 트리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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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출판사 | 도서출판 태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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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작성일 | 2021-01-12 21:0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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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스 트리블의 ‘하나님과 성의 수사학’(태초 간, 1996)을 읽고 몇 주 전,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에서 피선교지로 동역하고 암환자들을 위한 공동체지기인 목사님께서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목사님 부탁 좀 드립니다. 꼭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상하게 일 년에 한 번씩 다른 남자목사님들에게 참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들을 경험합니다. 뿌리깊이 박힌 가부장적 사고로 그것도 성경을 근거로 이야기하는 데는 정말 대책이 없습니다. 사진의 책은 2004년 감신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여자교수님에게 (유연희교수) 추천 받은 책입니다. (필자가 서평하고 있는 ‘하나님과 성의 수사학’) 성경을 근거로 한 교회 안에 만연한 가부장적이고 남존여비적인 것이 얼마나 잘못되었나를 그 책을 통해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영향력 큰 목사님이나 단체에서 여전히 제 생각으로는 왜곡된 것이 분명한 가르침을 계속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권위와 연결되니 속수무책입니다. 목사님 혹 이 책을 읽으셨는지요? 만약 읽어보셨다면 후기를 기록한 것이 있으실 터이니 그 내용을 페북에 올려주셨으면 하는 것이고 혹 아직 못 보셨다면 꼭 한 번 읽어 주신 후 목사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목사님이시라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생각을 정리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서 책 내용이 올바른 것이고, 그에 동의하는 제 생각이 옳은지 아니면 잘못된 건지 다시 한 번 판단해 보고자 합니다. 책 내용에 동의하는 제 생각이 바른 것이라면 잘못 가르치고 있는 어느 단체에 꼭 수정을 요구하려고 합니다. 의외로 그 단체가 세계적인 조직을 가진 꽤 큰 단체고 많은 사람 특히 목회자들이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꼭 시정해주고 싶습니다. 혼자만 그리 알고 있다면 문제가 없는데 그렇게 배운 목회자들은 또 그렇게 성도들을 이끌어가겠지요.” 무시무시한 부담을 안겨준 지인 목사님의 부탁을 받고 나 또한 남성 목회자이며, 나도 모르게 아내나 아들에게 가부장적인 권위로 다가가는 경우가 너무 많은 데 어떻게 할까 적지 않은 혼란에 빠졌지만, 이번 기회에 여성에 관한 신학적 이해를 돈독히 하는 기회로 삼아보고자 시도해보기로 했다. “박사학위를 뜻하는 Ph.D의 ‘여성형’은 Ph.T(Putting husband through)다. 남편의 뒷바라지를 비꼬는 말이다.”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교양인,p,102.)
몇 해 전, 여성학자로 알려진 정희진선생의 글에서 읽은 문장이다. 아주 대표적인 페미니스트인 그녀로서 충분히 개진할만한 도발이다. 필자는 아주 가끔은 이건 조금 심한데! 하고 그녀의 글에 혀를 찰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말하고 있는 여성 인권 보호와 여성주의적인 당연의 권리를 말살해 온 남성주의적인 사회 구조에 대하여 반론할 만한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 대들다가 100전 100패 할 것 같아 포기했다. 해서 가끔은 그녀가 무서울 때가 있다. 그런데도 그녀의 글을 읽고 있으니 나도 참 대책 없는 목사다. 성서는 어떤가? 남성주의적인가? 여성주의적인가? 대답은 독자들의 몫이지만 참고할 만한 글을 하나 소개한다. “성서가 여성에 대해서 부정적이며 혐오적인 본문을 가지고 있는 한, 여성 혐오 논란에서 성서는 항상 중심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여성 혐오적인 성서 해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때 여성 혐오는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여성신학회편, “혐오와 여성 신학- 박지은, 여성의 타자화와 여성 혐오”, 동연,p,73.) 박지은 박사는 성서 안에 버젓이 존재하는 여성 혐오적인 내증(잠언 1-9장, 31장의 결론)들이 여성 혐오를 정당화시킨다고 못 박고 있다. 더불어 하와를 유혹자로 이미지화하는 어처구니 없는 주장까지 난무함을 개탄한다.(위의 책 56-57) 외에도 여성을 비하하거나 폄훼하는 성서의 구절들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지천에 깔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던 여성신학자로 알려진 엘리사벳 쉬쓸러 피오렌자도 가부장적인 지배를 확대하고 강화하는 구조의 이데올로기로 성서에 나타난 여성 비하를 맹폭하며 그녀는 너무나도 당당히 다음의 단어를 자기의 여성신학에 도입한다. “Discipleship of equals in ekklesia”(엘리사벳 쉬쓸러 피오렌자, “동등자 제자직”, 분도출판사,p,25.) 교회 구조 안에서 여성에 대하여 ‘동등자 제자직’의 관점으로 동의하는 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필자와 함께 거의 20년을 동역했던 여성 사역자를 교단으로 보냈다. 교단에서 목회학석사를 이수했기에 목사안수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다. 딸처럼 여겼던 그녀를 보내면서 이 말씀이 떠오른 것은 내 감정일까, 착각일까. “마치 이리들 속으로 어린 암양을 보내는 마음” 그 친구가 교단으로 다시 돌아간 지 4년째인데 불과 얼마 전, 사적인 일로 다시 만났을 때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세인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강단에서 설교를 한 이후 단 한 번도 공적인 예배에서 강단에 서 본 적이 없습니다. 그 과정 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치욕감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필리스 트리블은 본서에서 조직신학적인 차원에서 분석이나 답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구약 성경(창세기, 아가, 열왕기 역사서, 룻기와 더불어 이사야 및 시편들의 조각들)의 편린들을 소개하며 그녀의 장점이자 전공인 수사학적인 분석으로 ‘성’(sexuality)에 대한 학자의 변을 처절하게 주장한다. 수사학에 대하여 1도 모르는 평자로서 완벽하게 그녀가 말하고 있는 God and the rhetoric of sexuality의 담론들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버거웠다. 하지만 언제나 음양이 있듯이 본 책을 통해 창세기를 비롯한 구약성경에 소개되고 있는 성‘에 대한 수사학적인 의미와 해석이 주는 유익이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알게 되는 기쁨이 있었다. 저자는 구약이 말하는 여성과 남성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치열함으로 본서를 집필했는데, 필자는 도리어 ‘사람’에 대한 구약적인 수사학의 미학이 얼마나 엄청난 해석의 광대함을 주는지 전율하며 읽었다. 이 말은 곧바로 이런 대의와 연결된다. 상당히 대부분의 신자들이 학습된 회로로 이해하고 있는 첫 사람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가 알고 있는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함으로 독자로 하여금 깜놀(?)하게 한다. 그 첫 번째의 시도에 다가서 보자. 창세기 1:27절을 트리블이 사역(私譯)한 수사학적인 번역으로 읽으면 색다른 신선함에 도달한다.
그리고-지어내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의 –모습대로 하나님의-모습대로 그는-지어내셨다 그를(단수) 남성과 여성으로 그는-지어내셨다 그들을(복수)
저자는 이렇게 1:27절을 수사학적으로 분석하여 해석한 뒤, 아주 중요한 그의 신학적 해제를 다음과 같이 남긴다. ⓵ 단수 대명사에서 복수 대명사로 바뀐 사실은 하 아담이 남성인 동시에 여성인 한 생물이 아니라 한 남성과 한 여성, 곧 두 생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⓶ 단수 명사 ‘하-아담’과 단수 대명사 ‘오토’는 남성과 여성이 서로 반대가 아니라 조화로운 성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하-아담은 원래 단일체였는데 성적인 구분에 의해서 본질적으로 갈라진 그런 존재가 아니다. 원래부터 동시에 달랐던 단일체다. ⓷ 하-아담과 남성과 여성 사이의 대구법은 성적인 차이가 위계질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등성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창조되었으며, 누가 누구보다 높거나 낮지도 않다. 아무도 상대방에게 군림할 힘을 갖고 있지 않다.
결론적으로 트리블은 창세기 1:27절을 매개로 이런 신학적 의지를 표명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습대로 남성과 여성을 지으셨다. 그렇다면 남성과 여성을 설명하는 것은 하나님의 모습을 알게 되는 일이다.” (p,48) 어떤가? 독자들의 생각은 트리블의 이 해석에 동의하는가? 대단히 불온한 해석이라고 경계하지는 자들이 아마도 더 많을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하나님의 이미지가 남성도 여성도 동등함을 갖는다는 저자의 주장에 반론할 그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대체의 남성적인 해석과 주류적인 입장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앞에서 소개한 박지은 박사는 하와에 대한 보수적 교회의 이해를 이렇게 고발한다. “하와에게 덧씌워진 부정적인 이미지는 고대 교부들의 여성혐오적인 성서해석에도 나타나며,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기준으로 작동되었다. 유혹자로서의 하와의 이미지를 강조하며 터툴리안은 여자를 악마로 통하는 문이며, 신에 가까운 모습으로 창조된 남자를 파멸시킨 자들이라고 해석함으로 하와의 후손인 여자는 태생적으로 악하고 혐오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혐오와 여성 신학- 박지은, 여성의 타자화와 여성 혐오,p,58.) 트리블이 이렇게 말한다.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의 모습을 가리키는 동일한 손가락이다.” (p,46) 저자는 두 번째의 이야기로 열왕기상 3:16-28절에 기록된 솔로몬의 지혜로운 재판을 소개한다. 주목할 것은 이 역사서의 해석 목표는 솔로몬이 아닌 두 여인에게 존재했던 ‘레헴’ 즉 ‘자궁’이다. 솔로몬에게 찾아온 이 두 여인의 상소 사건은 차치하자. 논외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역사서의 내용에서 ‘라함’을 파헤친다. 진짜 어미였던 여인의 탄식을 독자인 우리는 알고 있다. “마음(라하밈)이 불붙는 것 같아서” 히브리어 ‘라하밈’의 단수형 ‘레헴’은 여성의 신체기관인 ‘자궁’ 혹은 ‘아기집’을 의미하는 단어다. 저자의 천재적 자질이 여기서부터 보인다. 저자는 성경에 등장하는 라헬, 한나가 임신하지 못한 사건을 하나님께서 그녀들의 ‘레헴’을 닫으셨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동시에 시에서도 야웨 하나님께서 자궁을 여시기도 하며, 닫으시기도 하는 존재로 표현됨으로서 개개인의 생명을 빚어내는 기관에서 일하시는 분으로 표현되었다 (렘 1:5, 욥 31:13-15, 시 22:9-10)고 지적했다. 야웨 하나님의 여성성을 알려주는 압권은 아가서 5:4절이다. “내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움직여서” 이 구절을 트리블은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나의 님이 빗장에 손을 대시니 내 안의 깊은 곳이 마구 떨이네(메아이 하무)” 저자는 여기에 기록된 ‘내 안의 깊은 곳’이라는 단어는 다른 몇 구절에서 자궁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고 피력했다. (창 25:23, 시 71:6, 사 49:1, 룻 1:11) 여성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하나님 존재 양태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간단한 예를 들었지만 여성의 자궁으로도 일하시는 하나님은 그 속성으로 보여주신 성품이 바로 연민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이사야 49:13절을 읽어보자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당한 자를 긍휼히(예라헴) 여기실 것임이라” 결국 앞에서 설명한 성서의 글들을 통해 얻게 되는 교훈은 이렇다. “남성이시면서 여성이신 하나님의 이미지에 대한 균형을 잡게 해준다.” (p,97) 본서의 1,2장을 살펴보았는데 저자는 이렇게 성서에 기록된 야웨 하나님에 대한 성적 정체성을 비평적 시각으로 고찰함으로서 이미 고착화되어 있고, 학습화되어 있는 성차별적인 편협한 해석을 중단하고 올바른 균형을 잡을 것을 요구한 셈이다. 앞서 인용한 엘리사벳 쉬쓸러 피오렌자는 그녀의 다른 책에서 성서에서 변질된 여성 이해를 바로 세우는 시작을 이렇게 일갈했다. “성서의 여성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노력은 실재에 대한 얼마간의 왜곡 속에서 인식된 이미지와 그 실재를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노력들이다.” (엘리사벳 쉬쓸러 피오렌자,“성서-소피아의 힘”, 다산글방, p,35.) 본서는 저자에 의해서 왜곡된 여성으로서의 하-아담을 하와로 변질시킨 성차별적 해석을 실패한 사랑이야기에서 바로잡는다. 동시에 악하게 변질된 여성으로서의 하-아담은 철저하게 실패한 존재로 교육되었고, 세뇌되었지만, 아가서를 통하여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선언한다. 에덴동산에서 깨어진 성적 분리와 차별의 옹벽이 아가동산에서 치유됨을 역설한다. “아가에는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일이란 없다. 남자의 열망은 오히려 여자의 기쁨일 뿐이다. 불순종이 가져온 불행이 에로티시즘 동산에서 회복되었다. 상호동등성으로 여자는 이 은혜를 서정시로 이렇게 노래 부른다.” ‘나는 임의 것이고, 그의 열망은 나를 향해 있네.’(p,248) 적어도 이 아가 동산에서는 에덴동산에서 불순종한 이후에 남자가 여자의 이름(쉠)를 하와라고 부르면서 동등한 한 몸을 깨뜨리려고 여자를 지배했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남성들이 곱씹어야 하는 대목을 소개하면서 본서의 이해를 마감하려고 한다. 룻의 이야기다. 룻은 이방여인이다. 그녀는 베들레헴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보호될 가치라고는 하등의 이유가 없던 여자였다. 그랬던 그가 보아스의 사랑을 받고 아들을 낳았다. 그 장면을 기록한 신명기 역사가의 기록을 들추어보자. 룻기 4:15-17절이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주목할 문장을 트리블은 이렇게 추렸다. “여자들은 아이가 엘리멜렉의 아들이 아니라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여자들은 이 아이가 죽은 자들의 이름을 이어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소생시켜준 것을 안다. 여자들은 보아스가 아이를 낳게 한 이라고 여기지 않고 룻이 아이를 낳은 자라고 여기고 있다. 그리고 여자들은 아이의 이름을 지어 준다.”(p,299) 트리블은 잃어버린 여성성의 되찾음을 위해 이 책을 열었는데 한 발 더 나아가 여성들이 복을 찾고 실제로 복을 만들어내는 주체임을 증명하면서 책을 마감했다. 엄청난 진보다. 듀크대학의 크렉 키너는 기독교회에서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기독교 역사상 여성의 복종은 ‘세속적 세상’에서 나온 것이며, 여성의 복종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대해서 말해주는 것보다 여성들의 기독교적 규범들이 형성되었던 사회에 대해서 우리들에게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크렉 키너, “바울과 여성”, 기독교문서선교회,p,36.) 그렇지 않은가! 필자는 자라면서 어른 목사님들에게 이런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다. “하와는 남편을 죄의 자리로 초청한 원죄의 원류다. 그래서 아담보다 하와가 더 고통스러운 심판을 당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 소리가 얼마나 무식한 소치의 발언인지를 너무 잘 알지만, 신학의 ‘ㅅ’도 모르던 시절에도 이런 소리죽인 질문을 목사님들에게 드리고 싶었다. “목사님, 노동이 해산의 고통보다 고통이 덜한 것인가요?” 창세기 2:18절을 읽어보자.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돕는 배필’는 히브리어 ‘에제르 크네그도’의 번역이다. 주목할 것은 ‘크네그도’라는 전치사다. 이 전치사의 의미는 대단히 의미 있다. ‘동등한’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돕는다는 단순히 어시턴트의 개념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동등하게 돕는 자가 ‘에제르 크네그도’다. 사정이 이런데도 여성 사역자를 강단에 설교자로 세우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성 목사 안수를 외면하는 수구 골통들의 자화상이 부끄럽지 않은가? 마틴 부버의 걸작인 ‘나와 너’에 소름끼치는 문장이 있다. “신 앞에 서 있는 (VOR –GOTT-STEHEN) 나 자신의 현실을 생각한다면, ‘나는 위탁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동시에 ‘나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나는 이 두 개의 조화될 수 없는 정립을 두 개의 분할된 타당 영역에 돌림으로서 내가 살아가야 할 모순에서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마틴 부버, “나와 너”, 문예출판사,p,140.) 그렇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남성 그리스도인, 그리고 여성 그리스도인을 정립하고 있는 성서의 의미에 대하여 나에게 유리한 영역으로 해석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 모순이라고 생각되어지는 일체의 학습된 이론과 사고를 갖고 있다면 그 잘못된 모순을 벗어나기 위해 무언가 힘이 있는 쪽으로 비겁하게 타협하거나 기울어서는 안 된다. 도리어 잘못된 모순을 직시하고 올바른 가르침과 오리지널 텍스트라고 믿는 성서의 이야기에 올곧게 귀 기울여 그 모순을 이기려는 것이 지성적 그리스도인들의 정직한 태도다. 이 서평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어느 여 목사님의 장탄식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혔다. 미리 밝히거니와 필자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면서 그녀를 이해하는 정도의 남성이었지, 그녀를 위해 머리띠를 두룬 자는 더 더욱 아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오늘의 작금에 이해되고 있는 여성 폄훼나, 혐오의 측면이 있음은 필자의 주장이 아니더라도 이미 객관화된 실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장로라는 직분이 대단한 직분인 것으로 인지되어 네오-하이어라키의 한 축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이 자리는 거의 독점적적으로 남성의 자리다. 어불성설이다. 필자는 작년 섬기는 교회에 여성 장로를 세웠다. 그리고 여성 장로라고 호칭하지 않는다. 그냥 섬기는 장로라고 호칭한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교회 공동체부터 남성주의적인 성서 해석, 그리고 목회적인 적용을 삼가야 한다. 언젠가 읽었던 책에 밑줄을 그은 것을 보면 인상 깊었던 것이 분명하다. “마띠 데바따 다람 데바따” 인도어를 번역하면 이렇다. “땅은 우리의 여신이며, 우리의 종교다.”(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에코페미니즘”, 창작과 비평사, p,131.) 왜 힌두교도들은 땅을 여신이라고까지 추앙했을까? 땅은 모든 것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을 소유한 어머니들이다. 더 이상 모든 것을 수용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이미지인 여성들이 고통당하지 않도록 교회가 노력하자. 적어도 쪽팔리지 않게. 모든 이에게 ‘라훔’(자비로운) 야웨의 은혜가 있기를 빈다.
눈 내리는 고즈넉함이 보이는 제천세인교회 서재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