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함께

제목시인의 영성 32024-06-05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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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지은이 손석춘, 김기석 공저
ㆍ출판사 꽃자리
ㆍ작성일 2012-04-09 14:04:11

 

 

책소개
손석춘, 김기석 공저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를 읽고, 꽃자리 간, 2012년 4월 9일 書

바보들이 있어 행복하다

필자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 돌아가신 장로님의 아들이 서울에 거주하고 있다. 오래 전, 그 아들은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 담임목사 세습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심히 고민하며 갈등하다가 내게 전화를 했다. 교회를 옮기기로 했는데, 옮길 교회를 추천해 달라는 전화였다. 많은 생각 끝에 아들의 결단을 존중해 주기로 하고 그 친구에게 두 교회를 소개했다. 그 하나는 결국 기 지체가 선택해서 아름답게 정착하여 섬기고 있는 100주년 기념교회였고, 또 하나가 이 책의 공저자인 김기석 목사께서 섬기고 있는 청파 교회였다.
신자가 교회를 정하는 것은 본인의 전적인 일이기에 소개만 했지 그가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염두 해 두지 않았다. 이후 들려온 소식은 그가 100주년 기념교회로 정했다는 후문이었다. 장로님 아들은 보수적인 건강한 교회와 진보적인 건강한 교회 중에서 전자를 택한 셈이다. 필자는 그의 결정을 존중한다. 이 일을 뒤돌아보면서 참 감사했던 것은 소개할 수 있는 교회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현직 목사이지만 주 중에 말씀을 받아먹기 위해 반드시 세 교회를 사이버 상으로 방문한다. 나도 먹고 살아야 하기에 그렇다. 언급한 이재철 목사께서 시무하는 100주년 기념교회, 김영봉 목사가 시무하는 워싱턴 한인 감리교회,  마지막 한 곳이 바로 본서의 저자가 시무하는 청파교회다.필자가 즐기는 행복한 일은 설교를 듣는 일이다. 내가 보지 못한 영적인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줄 수 있는 설교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인터넷 시대의 유익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일이기에 말이다. 이제는 벌써 오래 된 이야기처럼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신학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신학생들이 가장 닮고 싶은 목사인 이재철 목사, 또 한 편 가장 만나고 싶은 목회자가 김기석 목사이기에 어떤 의미에서 볼 때 두 목회자는 한국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목회자임에 틀림이 없다. 이런 차원에서 매 주일 사역을 마치고 두 동역자의 설교를 경청하며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은 필자에게는 행복 중의 행복이다.이 책은 김기석 목사와 이 책이 출간될 때만해도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삼성 경제 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재벌 중심의 편향된 정책에 대해 감시하며 카운트파트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 재야 언론인이자 진보적 지식인 손석춘 교수가 서로 나눈 편지를 편집한 책이다.‘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가 책 제목이다. 책 제목은 적절하다. 말 그대로 두 사람에게 바보라는 말은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주류에 들어가지 못하면 바보가 되는 세상이다. 명약관화하게 작금의 시대는 조작과 보수적인 틀에서 벗어나면 바보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정치, 문화, 사회, 예술, 언론은 물론 심지어는 종교마저도 이 상황은 정설과도 같이 굳어져 있는 시대이다. 그러니 진보적 지식인으로 살고 있는 언론인이자 대학 교수인 손석춘, 그리고 진보적 색채가 뚜렷한 목사 김기석, 이 두 사람에게 붙여진 바보라는 정의가 맞다. 필자가 이들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시대에 대한 왜곡들을 불편함을 감수하고 또 분명히 쏟아질 비난을 뻔히 보면서 그 부담을 그대로 짊어지려고 했다는 점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바보가 되어준 것이 필자에게는 무척이나 행복하다. 내 사랑하는 조국교회가 들어야 하는 비수를 던지고, 글을 쓰고 있는 저자들은 분명 한완상 교수께서 말했던 대로 ‘바로 보려는 사람’ 즉 바보가 맞다.불편한 은혜?필자는 이 책을 구입하여 한 주 동안 손에 책을 떼지 못할 정도로 지성적 감동과 도전을 공급받으며 정독을 했다. 두 사람 다 소위 진보적인 입장에서 사역을 하는 사람이기에 그들의 주고받는 글들은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에 쉽지 않은 내용들로 넘쳐난다. 글을 쓰는 나 역시 글을 읽다가 개인적으로 김기석 목사의 영성에 고개를 끄덕이는 목사이기에 그의 신학적인 본말이나 혹은 그의 견고한 사상적인 배경에 대하여 따라가면서도, 어느 경우에는 조금은 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 고개를 흔들었던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한 가지를 대표적인 예를 든다면 보수적인 색채에 대한 영역을 너무 천편일률적으로 고착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부분이었다. 해서 어떤 의미에서 건강한 보수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고 또 그들이 있음으로 인해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에게도 견제 없는 획일화나 일방통행하지 못하도록 하는 긴장감을 주는 건강한 카운트파트너인데 너무 비판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이유는 교회가 21세기의 현 상황에서 어떤 방향성을 갖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또 광야의 소리가 지천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손석춘 교수와 김기석 목사의 교회를 향한 회초리가 적절했음에 동의했다는 말이다. 부연한다면 그들의 일성(一聲)은 교회를 향한 반대를 위한 반대이거나, 혹은 작금의 상업적인 정치가들처럼 틀에 박힌 식상한 진보의 목소리로 들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도리어 가장 예의 바르게, 가장 겸손하게 한국교회의 일탈을 염려하며 바로 서 주기를 바라는 지적들을 이 두 사람의 정론들을 읽으면서 발견했다. 해서 많은 부분 그들의 지적에 따라갈 것을 다짐하는 수확을 얻었다. 또 한 가지, 이 책을 읽는 동안 얻는 큰 도전은 목사로 사역하는 나에게 더 많은 공부에 전념해야 함을 각인시켜준 점이다. 두 사람이 진단하고 있는 일련의 종교, 사회, 정치, 문화, 인문학 등등에 걸쳐 갖고 있는 다양하고 해박한 지식으로 분석한 실력 있는 스펙트럼들이 얼마나 진지한 성찰과 고민과 실력을 기초로 한 내공에서 나온 것인지를 보면서 정말로 또 다시 다짐한 것이 ‘공부요, 책 읽기’였다.한국에서 설교자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어떤 목회자의 글을 읽어보았다. 기막힌 수사와 달콤한 기법으로 문체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워 어떻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지! 라고 탄복하는 글들이 지천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는 그의 글에서 소위 말하는 은혜(?)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설교하기와 설교 원고의 달인인 그를 보면서 말이다. 반면, 필자는 저자의 글을 따라가다가 이런 감회가 들었다. 참 불편한데 은혜가 넘치는 것은 뭐지? 세상 참 고르지도 못하다. 백번을 양보해도 필자는 후자에 열광하고 싶지, 전자와 친해지고 싶지 않다. 아뿔싸, 그러니 목회가 시원찮다.사랑이 아니라 사랑 실천하기오늘의 시대에 목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역사 이래로 가장 어렵고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이것을 깨닫는 것은 물론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웬만한 상식적인 지성의 틀과 영성의 감각만 갖고 있어도 목사라는 사역이 얼마나 버겁고 힘이 든 직업(?)인지 알 수 있는 시대가 오늘이다. 하루를 자고 일어나면 세상은 머리를 쳐들고 있는 살모사의 모양을 하고 교회와 목사들을 향하여 공격하기 위해 분기탱천한 똬리를 틀고 있다. 이제는 교회가 자정 능력이 없다고 확신한 저들의 확신은 뒤로 결코 물러서지 않을 태세이다. 설상가상으로 저들의 공격은 이제는 교회 일탈에 대한 경고나 혹은 되돌아섬의 기대라는 장밋빛 여지를 남겨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박멸 대상으로 보고 있는 듯해서 섬뜩함까지 느낀다. 이런 위기의식 때문인가, ‘기자와 목사, 두 바보의 이야기’에서 나만의 착각인지는 모르지만 두 공저자의 교회를 향한 고언들을 직시하면서 만에 하나, 교회와 목사가 공저자가 일갈하고 있는 방향성으로 다시 한 번 달려간다면 감히 저들도 교회를 무시하거나 박멸의 대상으로 계속하여 공격하지 못할 것 같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어본다. 그 이유는 공저자의 일갈에서 때우기 식이나, 임시방편식의 가벼움과 얄팍함이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손석춘은 책을 시작하면서 점잖게 썼지만 다음과 같은 투로 도전한다. 필자의의 언어로 평해 본다.“교회가 전하고 실천해야 하는 최고의 덕목은 사랑 실천이다. 재론하지만 사랑이 아니라 사랑실천이다. 세상의 상징은 자본 축적이다. 사랑실천과는 정 반대의 개념이다. 힘을 축적하는 이유도 자본을 갖기 위해서이고, 자본을 축적하는 이유는 힘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세상의 논리가 이런 것에 반하여 교회는 세상의 논리로 인해 스러진 힘없는 자들의 대변이 되어야 하고, 그들의 힘없음을 보호해 줌으로서 희망을 주어야 하는 곳이다. 헌데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교회가 자본주의의 병폐를 그대로 인정하고 답습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은 교회가 빛과 소금이라고 천명했는데 빛과 소금인 교회는 거의 없다. 나는 언론인이지만 언론에 대한 공정한 기대감을 버린 지 오래 되었다. 언론이 도리어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는 것 같아 절망스럽다. 교회는 어떤가? 교회도 초록이 동색이다. 머리와 입으로 사랑하는 교회에서 그 무슨 예수의 향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김수환 추기경이 살아생전 고백했던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70년이 걸렸다는 말처럼 그렇게 가슴으로 행하는 사랑 실천은 힘이 든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교회는 가슴으로 내려오기는커녕 그냥 머리에만 있는 사랑에 고착되어 있는 것 같아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대부분의 교회가 자본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교회 역시 희망이 없는 세속적인 집단에 불과하다. 교회가 이 지경임을 감안할 때 더불어 예수께서 실천하셨고 요한 사도가 적시한 사랑한다는 것과 투쟁한다는 것이 과연 이 시대에 가당키나 한 일일까? 에 자꾸만 회의가 드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까?”(pp,23-28)답변하기가 참 녹록하지 않은 기자의 질문에 김기석 목사는 어렵사리 그리고 무겁게 글을 달았다. 필자가 이렇게 표현한 것은 교회가 교회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그 현장에 서 있어야 하는 목사로서의 자괴감을 공저자 김 목사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다. 역시 나의 언어로 줄여본다.“사도 요한이 선언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하는 자야만이 내 안에 있고 나도 그의 안에 있다는 사랑의 공식은 ‘함께 아파하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주지할 것은 이 아파하는 사랑에 대하여 교회의 담론들은 즐비한데 실천이 부족하다는 기자의 말에 동의한다. 엔도 슈사꾸는 그의 걸작인 『‘사해의 호반』에서 교회에서 고백되는 예수 말고,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예수를 소개하는데, 그 예수는 마치 병자를 치유하며 기적을 행하는 예수가 아닌 현장에서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같이 아파하는 어찌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을 상실한 무력한 예수와 같지만, 그 예수가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임을 천명한 것처럼 오늘 한국교회가 정말로 찾아야 할 예수의 사랑은 바로 이것이다. 이 예수는 미슈파트를 행하는 예수, 체다카를 실천하는 예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성경에서 가장 사랑이라는 단어와 근접한 헤세드를 이루는 예수이다.”(pp,38-45)왜 김 목사의 이 답변에 주목하고 긴장해야 하는 것일까? 백 번을 양보해도 이 예수는 한국교회 주류의 예수 해석이 아니기에 불온하기 짝이 없다고 평가절하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김 목사의 답변은 여기에서 머물지 않는다. 한 발 더 나아간다. 교회가 빛과 소금됨을 거부한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교회가 교회되려면 교회는 반드시 천민자본주의의 천박한 사탄의 올무에서 벗어나야함을 역설한다. 그는 여론에 기대하지 않는다는 손석춘의 말에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비판 기능을 잃어버린 채 기득권 편이 된 언론도 문제지만, 초월적 비전을 잃어버린 채 자본주의의 단맛에 취해 버린 종교가 더 큰 문제이다. 청빈한 삶에 청빈한 마음이 깃들기 마련이다. 교회가 부유해지고, 권력과 긴밀해질수록 예수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때 교회는 사회적 강자들의 행태와 욕망을 종교적으로 추인해주게 되기 때문이다.”(pp,47-48)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매 장(章)을 치열하게 수놓는다. 그들이 수놓은 영역은 한국 사회 전반을 아우른다. 그들의 대화를 집요하게 추적하다보면 어떤 때는 분노하고, 어떤 때는 대리만족하고, 어떤 때는 함께 실소하고, 또 어떤 때는 같이 운다. 이 길을 함께 하다 보면 중요한 것은 주체할 수 없는 은혜가 쏟아진다는 점이다. 해서 저자들의 책은 귀하다.교회가 해야 할 분노책을 읽다가 가슴에 절절함으로 담은 내용이 있다. 남아프리카의 신학자 알란 뵈삭의 말을 소개한 김기석 목사의 글이다.“오늘의 교회가 잃어버린 것은 심리학이나 문학이 아니라 ‘거룩한 분노다.”(pp,86-87)김기석은 이 글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해제한다.“‘거룩한 분노’는 긍휼의 마음에서 솟아나오는 파토스이다.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이웃들이 겪는 아픔에 분노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권부로 변한 성전 체제에 대해 분노했다”(p, 87)연세대학교에서 박사 과정 코스워크를 할 때 당시 종교 심리를 강의했던 故 강희천 교수의 거룩한 분노 해석을 잊을 수가 없다. 많은 성서 해석자들은 성전 청결 사건을 행하신 주군이신 예수의 행위를 일반적으로 해석할 때 교회를 장사하는 곳으로 만든 것에 대한 분노, 돈을 환전하는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에 대한 성토 정도로 해석하는 데 동의하지만, 그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요한복음 2:15)에 천착했다. 그의 해석에 의하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예수의 분노는 분기탱천하여 폭발한 것처럼 요한기자가 기록하였지만, 실상은 그의 폭발은 혈기가 아니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해석했다. 예수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는 동안 분노를 조절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번 시간은 예수에게 두 가지의 유익을 주었다는 것이다. 첫째는 감정적인 폭발의 정도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던 시간의 유익이다. 두 번째는 어느 정도로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속도 조절의 사유함을 가질 수 있었던 유익이다. 결론은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의 행위는 감정적인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를 표현한 수위조절이었다고 해석한 것이었는데 필자는 의미 있는 기독교 교육 신학자의 통찰로 받아들여 메모 노트에 수록해 놓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풀어 놓고 싶다. 근래 한국교회의 중심축에 있는 사람들이 분노하는 분노의 내용을 보면 천박하기 그지없다. 어떻게 해석해야지? 목사인 나는 섬기는 교회의 지체들에게 이것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지. 아연실색한 일들이 너무 많다.몇 년 전, 미국 대사가 테러를 당했다. 전 세계에 주목을 끌만한 쇼킹한 테러가 서울 한 복판에서 백주에 일어난 것이다. 테러는 어떤 명목이든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사탄의 행태임을 고발한다. 테러는 어떤 명분으로도 합리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난 받아야 할 마땅한 범죄다. 일찍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악의 기원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소논문에서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다.“전쟁의 원인이 되는 맹목적 애국주의(JINGOISM)를 비롯하여 일체의 침략전쟁을 거부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사탄적인 행태에 대하여 거부해야 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 “귀신들림, 점술, 겅신술”, 꿈지기, 2008,p,35.)‘장고이즘’의 폐해가 얼마나 큰 사탄적인 행태인지를 고발한 그의 지론에 대하여 필자는 동의한다. 만에 하나 그것이 애국적 충정이라고 하는 가면을 썼다고 해도 말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미국 대사를 향한 테러는 그가 우리나라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대사라는 무게감 때문이 아니라 제 삼 세계의 약소국 대사라고 해도 결코 이런 야만적인 행태는 제거되어야할 죄악이다. 여기까지는 필자 역시 일반적인 평가에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나 수치스러운 행위들이 교회에서 자행되었다는 점에 얼굴을 들 수가 없다.“니퍼트 미국 대사의 쾌유를 비는 기도회”괴물 같은 행위이다. 수구적인 교회가 마치 괴물 같은 일을 자행할 수 있다는 것도 경악할 만한 일이지만, 더 가슴 아픈 일은 대다수의 근본주의적인 교회들이 이 일을 그럴 수도 있다는 식의 암묵적 동의를 했다는 점이다. 구국기도회라는 명목으로 모 대통령의 초상화를 십자가 대신 걸어놓고 행하는 아연실색하게 하는 종교적 쇼들이 장고이즘으로 벌어지고 있는데 그 주범이 교회라는 점에서 절망스럽다. 조금이라도 교회에 대하여 불이익을 주는 일이 일어나면 교인들을 동원하여 방송국 앞에 몰려가 머리띠를 두르게 하는 교회의 자화상은 심장을 두근두근 거리게 한다. 이 기막힌 일들이 마치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에 대한 성도의 합당한 표현이라는 명목 하에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 더 더욱 필자를 절망하게 한다. 진짜로 분노해야 할 기득권자들에 의해 짓눌림을 당하고 있는 약자들을 위한 분노에는 눈감고, 고아와 과부와 객들에 대한 신원함에는 무감각하며 도리어 정치권력과 기생하며 살아가고 있는 일부 속없는 교회를 보면 예수께서 성전을 보고 느끼셨던 그 분노의 함수를 필자도 느낀다.죄 경영 (SIN MANAGEMENT)
“어느 분이 교회를 가리켜 ‘죄 경영’을 하는 사업장으로 표현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p,166)손석춘 선생의 교회에 대한 일설 중에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중에 ‘일용할 양식’을 위해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가르쳐 주신 예수의 기도를 정면으로 거부하며 주의 기도를 박제화시킨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가장 나쁜 죄악을 자행하는 자들이라고 비토 하는 글에 답변을 하면서 김기석 목사가 인용한 글이다. 그는 누가 이런 말을 했는지 근원을 밝히지 않았지만 발언자는 달라스 윌라드 박사다. 물론 한국교회를 다 싸잡아 그렇게 공격한 것은 아니겠지! 라고 자위는 하지만 상당히 곤혹스럽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죄를 경영하는 공장이라니! 달라스 윌라드를 냉큼 요절내고 싶은 마음 굴뚝같은데 그럴 수가 없다. 왜? 죄를 경연하는 공장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겠지만 죄에 대한 둔감한 것은 물론 죄에 대한 이해조차도 너무나 무감각해진 것이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부터 보이기 때문이다. 목사인 나부터 안락함과 불편하고 싶지 않은 목양의 터를 만들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상당수의 교회에서 담임목사 세습을 하다가 움찔했다. 세간 및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부정적인 여론이 팽배헸기 때문이다. 세습의 주류들이 합법적으로 세습을 할 수 있는 길이 막히자 아들 목사에게 변칙적으로 세습을 행하는 각종 기상천외한 난장들이 백주에 벌어지고 있다. 목회자들의 성적 일탈은 어제의 일이 아니다. 교회의 극단적인 님비, 예수 그리스도의 삶 따르기와 정 반대의 길 가기 등등이 21세기 한국 교회의 기독교인들의 자화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자 무신론자들과 안티 크리스천들에게는 교회가 마치 죄 경영의 근원이 되고 있다고 비난받는데 이 기막힌 비수는 피할 길이 없어 쓰리고 아프다.김기석 목사는 필자와 비슷한 마음을 가진 것 같다. 그는 조국교회를 바라보는 아픔을 이렇게 에둘렀으니 말이다.“하늘과 땅 사이에 똑같은 거리를 두고는 ‘여기 아래’는 아래대로 즐기면서 ‘저기 위’는 또 저기 위대로 확보해 놓은 그런 사람들이 교회의 중심을 점점 다 차지했다는 것은 비극이다.” (카를로 카레토의 말을 김기석 목사가 재인용)아직은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내가 별난 것이든, 아니면 김 목사가 별난 것인지를 모르겠지만 여하튼 공통분모가 있다는 점에서 이런 생각 자체는 왕따를 당하기 십상인 철모르는 목사의 투정이지만 적지 않은 위로가 된다. 서평을 마치면서 이 책을 읽고 난 독자 중에 한 명인 김인국 신부(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 총무)가 남긴 에필로그의 갈파가 아픈 글을 읽어서 그런지 따뜻하게 다가와 소개하고 글을 맺으려 한다.교회가 밥값을 못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지만 아시시의 성인 역시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프란치스코야, 내 집을 고쳐 다오. 너도 보듯이 다 망가졌단다.’ 하는 음성을 들었다. 그때에 그가 십자가의 눈물과 한숨 사이사이에서 손과 발과 옆구리의 상처에 입 맞추며 불렀던 노래가 이렇게 전해진다.“나의 교회야, 나의 교회야/네가 아무리 못생겼어도/너는 언제나 나의 교회지”(p,342)필자는 이 노래를 음미하다가 왈칵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내 사랑하는 교회, 아무리 못생겼어도 나의 가장 사랑하는 교회, 내 목숨을 걸고 사랑하고 싶은 교회, 그 교회가 숨을 헐떡이고는 있지만 그래도 내 옆에 아직은 살아 있기에 말이다.필자는 이런 감동과 도전을 준 공저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2012년 3월 9일 오후 3시 40분 서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