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4. 08. 10 셀 사역2024-04-22 12:34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가을하면 생각나는 노래를 하나 소개하고 불러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 예수 말씀 하시기를 (찬송가 511장)
● 축복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사사기 16:23-31
● 제목 : 세상에 있지만 속하지는 말라
1) 16주 동안 나눈 삼손의 이야기 중에 진면교사와 반면교사를 삼아겠다고 생각한 것이 있으면 나눕시다.
● 사사기 13-16장의 말씀 중에  

2) 삼손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를 각 자의 언어대로 표현해 봅시다.
● 주일 설교를 중심으로  

3) CS 루이스가 말한 “세상을 목적으로 삼고 믿음을 수단으로 삼는 것”이 사탄의 계획이라는 설교를 들었습니다. 나에게 이런 불신앙적인 태도를 한 주간을 살면서 셀 공동체의 이름으로 함께 극복하기 위한 영적인 시도들을 만들어 보는 시간을 가져 보자.
● 셀 원 전체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찾아보자. (구체적으로 행할 영적인 시도들)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두날개 축제에 참석한 베스트의 정착을 위해
  ② 독립교회연합회 광복절 기념 연합성회를 
    위해 (8월 17일, 저녁 7시30분)
2) 치유기도
3) 간증으로 은혜 나누기
  ① 응답 받은 기도 제목에 대해 은혜 나누기
  ② 한 주간 받은 은혜 나누기
4) 한 주간 사역하기
  ① 수요 셀별 기도회 참석하기
  ※셀 리더 필히 참석
  ➁ 담임목사의 이슬비전도편지 태신자에게 전하기 
5) 헌금 기도
6) 광고
7) 폐회: 주기도문  

 
설교요약 (SUMMARY)
2014년 8월 10일 주일 예배 설교 (사사기 86번째 강해)
본문: 사사기 16:23-31
제목: 세상에 있지만 속하지는 말라 

바울, 그가 고백한 고전 2:2절, 롬 1:1절, 빌 1:20-21절을 보면 그에게 예수가 어떤 존재인지, 그가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바울에게 누군가가 “당신의 삶의 목적과 목표를 말해주십시오.”라고 묻는다면 바울은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고.
크리스천 시인 박두진 선생은 골고다에서 흘리신 주님의 피를 ‘푸른 피’라고 정의했습니다. 일반적인 보통의 영성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신앙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현대를 사는 수많은 명목적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보고 있는 십자가는 장식용 십자가이지 골고다라는 해골에서 인류의 이성적, 감성적, 의지적 죄로 인해 점철된 견고한 죄를 씻어주었던 그리고 지금도 씻어주고 있는 보혈이 흘려지는 십자가로 인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주님이 오늘의 시대에 흘리시는 피는 피 멍이 든 푸른 피인 것이 맞습니다. 왜 오늘 주님께서 푸른 피를 흘리실 수밖에 없을까를 성찰하는 것은 2014년이라는 크로노스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영적인 태도입니다.
건강한 교회와 그리스도인 되기라는 사역의 현장에 있는 많은 크리스천 지식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함의가 있습니다. 오늘의 시대에 교회의 최고의 위기가 정체성 상실이라는 것과 성도들의 치명적인 위기는 정체성의 불투명성이라는 동의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오늘 설교의 메시지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집요한 유혹과 압박으로 인해 그에게 힘이 원천이라고 믿었던 머리털의 비밀을 알려 주었습니다. 삼손이 들릴라에게 해 준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마지노선을 남겨 두신 나실인의 자존감을 누설함으로서 하나님을 욕보인 꼴이 된 것입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인해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체포되어 가사로 두 눈이 뽑힌 채 끌려가 가사에 있는 다곤 신전에서 노예들이 하는 일이었던 맷돌을 돌리는 비참한 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이 가사로 끌려간 뒤에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는 상징적인 원천인 머리털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고 사사기 기자가 기록함으로서 영적인 반전을 독자들에게 기대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가사에 있는 다곤 신전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신병을 자기들의 영역 안에 확보한 뒤 승전가를 불렀습니다. 때 마침 다곤 신에게 경배하는 축제의 장이 열렸습니다. 아마도 이 축제는 농경 신이었던 바알의 아버지 신으로 섬겨지던 다곤에게 바쳐지는 최고의 축제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본문 23절에서 이 축제를 ‘큰 제사(a great festival-NLT)’라고 명명한 것을 보면 유추가 가능합니다. 이 큰 제사는 다른 여느 때의 제사보다 더 흥에 겨운 축제였습니다. 이유는 블레셋의 토지를 망쳐버리고 농사를 훼방하고 같은 민족의 사람들을 많이 죽인 철천지원수 같은 삼손을 구금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그를 죽일 수 있는 물리력을 블레셋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5절에서 “그들의 마음이 즐거울 때에 이르되 삼손을 불러다가 우리를 위하여 재주를 부리게 하자 하고 옥에서 삼손을 불러내매 삼손이 그들을 위하여 재주를 부리니라 그들이 삼손을 두 기둥 사이에 세웠더니” 가사의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 축제를 흥청망청한 축제로 치루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마음이 즐거울 때’라는 원문 기록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술과 향락에 취한 블레셋 사람들은 국가적인 기쁜 날을 이렇게 본인들끼리만 먹고 즐기기가 아쉬워 더 자극적인 여흥과 볼거리로 삼손을 삼았습니다. 삼손에게는 재주를 부리라는 압력이 가해졌고 그것을 보는 블레셋 사람들은 최고의 만족거리였습니다. 나귀 턱 뼈 하나로 1,000명을 도륙하던 삼손이 이제는 이방신전에서 재주를 부리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삼손이 재주를 부리는 현장 즉 다곤 신전 안에는 무려 3,0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삼손의 광대극을 보면서 열광하고 있었음을 사사기 기자는 기술합니다. 삼손의 수치 당함은 넓은 의미로 하나님도 망신을 당한 꼴이 된 것이고 그의 백성들도 매일반을 당한 꼴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삼손 시나리오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 다음 부터입니다.
삼손은 다곤 신전의 한 복판으로 나아가 어릿광대처럼 재주를 부렸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이 재주를 부리는 순간을 자기의 원수를 갚을 절호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자신을 이끌어주던 자에게 한 가지를 부탁합니다. 다곤 신전을 지탱하고 있는 대들보 기둥으로 데려다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삼손의 행적을 알 리가 없는 그는 가볍게 여기고 그를 기둥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바로 이 장면이 22절에서 삼손의 머리털이 자라고 있다고 기록한 의미 있는 상징적인 말씀에 담긴 대 반전의 역사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입니다.
본문 28절에서 삼손이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기도를 잊고 살았던 삼손이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한 기도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원수를 갚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결국은 힘을 다시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때늦은 기도였지만 하나님은 삼손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하나님이 삼손에게 이전에 갖고 있었던 힘을 주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린 힘을 다시 회복하여 다곤 신전의 두 기둥 터를 무너뜨림으로 그곳에서 삼손의 재주를 보고 있었던 블레셋 사람 3,000명을 몰살시키고 본인도 함께 그곳에서 최후를 맞이하였음을 보고합니다.
사사기 기자는 삼손의 기사를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내레이션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① 삼손이 그 날 죽인 자가 살아있을 때 죽인 자보다 더 많았다. ② 삼손이 죽은 뒤 그의 시체를 그의 형제들이 수습하여 그의 고향인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에 있는 가족묘에 안장하고 장사를 지냈다. ③ 그는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직을 감당했다.
오늘 우리가 삼손 기사를 통해 느끼고 깨닫고 교훈 받아야 할 총 교훈의 적용과 결론적인 재해석의 은혜는,
※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 가운데에 있어야 하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삼손은 오늘의 언어로 재해석한다면 교회와 그리스도인으로 확장하여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삼손은 오늘 우리에게 기막힌 표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고 그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강력한 사탄의 권세가 휘몰아치는 작금의 현실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대변적으로 보여 주는 기막힌 상징으로 평가되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하나님이 성별하신 나실인으로서 나실인답게 살아야 했지만 불행히도 나실인으로 살아가는 영적인 부담을 내동댕이쳐 가장 이방인을 경계해야 할 그가 도리어 가장 이방인답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탐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블레셋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명령이었는데 그는 도리어 블레셋 화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삼손을 통해서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 있어야 하되 그 세상에게 속하지 않는 성별됨을 사수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곳은 이 곳 이 땅입니다. 문제는 이 땅의 주권이 지금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한시적으로 공중 권세를 잡은 사탄의 지배 영역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탄의 통치 영역 안에 있는 이 땅에서 하늘처럼 사는 것은 명목적인 폼이나 흉내, 시늉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하늘 백성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대안은 이 땅의 가치에 속하지 않는 무서운 성별의식이요 구별됨입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운명적으로 이 땅에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그것은 우리들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영적 전쟁을 치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서 살면서 땅의 가치에 속해 지배를 당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땅의 가치를 내가 지배하고 있는가? 의 질문을 던질 때 적어도 후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기독교 변증학자인 CS 루이스는 이것을 이미 알았기에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이렇게 사탄의 음모를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세상을 목적으로 만들고 믿음을 수단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을 다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세속적 명분은 어떤 것을 추구하든 상관이 없다. 그런 것을 추구하는 인간은 우리들의 밥이나 다름이 없지.” 이 땅의 주권을 한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사탄의 핵심적 가치는 교회도 그리스도인들도 믿음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고 더불어 세상을 추구하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만드는 것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이 단지 수단이 되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가정의 행복을 위한 수단, 우리 교회만의 부흥을 위한 수단, 우리 가정의 행복지수를 위한 수단, 우리 교회의 재정 축적을 위한 수단, 내 경영터의 만사형통을 위한 수단, 우리 교회의 숫자를 늘리는 수단으로 믿음이 변질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만에 하나 교회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가족주의를 인정하고 그것을 용인한다면 그것은 바로 교회가 세상 가운데에 있으면서 세상에게 속한 교회의 전형일 것입니다.
김두식 교수가 쓴 ‘교회 속의 세상, 세상 속의 교회’라는 책에서 그는 교회가 교회만을 위한 ‘샬롬’을 추구하고 도리어 진정으로 교회가 세상이라는 영적인 권세와 싸우는 것을 포기한 끝에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비참함을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세상 속의 교회’를 ‘교회 속의 세상’으로 변질시킴으로 교회를 무력화한 것입니다. 그 오랜 무기력 속에서 교회는 이제 보험회사만도 못한 내면세계의 공동체, 최대한의 영역을 확장해 봐야 교인들끼리 싸우지 않는 것을 평화의 수준으로 이해하는 수준의 공동체로 남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교회 나름의 분명한 정체성이 있는 공동체인데 자꾸만 교회가 세상을 닮으려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샬롬을 외치는 것으로 교회의 일을 마치라고 하니까 그렇게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면서 세상이 하라고 하면 하고, 하지 말라고 하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새 교회는 사건이 터지면 뒤치다꺼리는 하는 보험회사의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사탄의 음모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죄악의 터널에서 허덕이고 있는 바로 이 때 터널에서 구사일생을 빠져 나온 사람들을 치유하고 돌보아 주는 정도의 일을 하는 곳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 터널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십자가와 복음의 능력으로 아예 그 터널의 입구를 막아버리는 역사를 하는 곳이 교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세상의 가치를 지배해야 합니다. 그 능력이 있는 자가 세상에 속하지 않는 자입니다. 만에 하나 우리들이 세상에 있으면서 그 세상에 속한 자로서 나약하게 산다면  실패한 사사 삼손과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지명하신 그 그리스도인으로, 예수께서 기뻐하시는 그 세인교회가 되어 오늘의 삼손으로 머물지 마십시다. 세상에 있지만 결코 세상에 속한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되지 마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