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1일 (첫째 주) 지역 셀 사역
1. 얼음깨기 (WELCOME) 12월, 내가 원하고 원하는 일이 있다면? 2. 찬양 (WORSHIP)
● 찬송가 546장: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 복음성가: 주님 말씀하시면
3. 말씀 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시편 119:127-136 ● 제목 : 헐떡일 수 있다면 1)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세 가지로 반응한 내용을 말해보자
⓵ 127절 ⓶ 128절 ③ 131절
2) 엘리 시대에 임했던 가장 큰 절망과 재앙을 오늘의 시점으로 해석해 보자. ① 사무엘상 3:1 ② 오늘의 시점을 해석한 3:1
3) 적용하기
⓵ 말씀 사랑하기 ⓶ 말씀대로 살아내기 ③ 말씀 갈망하기
4) 사역하기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주간 사역하기 1) 합심 기도 하기 ① 하나님, 말씀에 대한 헐떡임을 주옵소서. ② 하나님, 오늘 나 역시 말씀을 무기 삼아 살게 하옵소서. ③ 하나님, 오직 말씀만이 나를 지키는 보루임을 망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④ 하나님, 태신자들과 잃은 양들에게 말씀이 접목되어 22일 회복되는 은혜를 주옵소서. ⑤ 하나님, 저녁 집회가 끝까지 승리하게 하옵소서. 2) 드려진 태신자를 위한 제2주 차 사역 진행하기 제2 주차 (12월 2일〜7일): 셀 별 태신자 및 잃은 양 찾기와 되찾기 위해 집중적으로 중보하기 3) 셀에 속해 있는 환우들을 찾아보기 4) 셀 원들 간의 기도 제목 중보하기 5) 셀 피선교지 위해 중보하기
● 설교요약 (SUMMARY)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암세포가 무엇일까요? 답을 위해 지난 월요일에 성서 일과로 묵상한 묵상일지를 공개하겠습니다. 묵상 성서: 다니엘 7:21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워 그들에게 이겼더니” 구약의 묵시록이라고 지칭되는 다니엘 7장 역시 해석의 논점이 다양하다. 다니엘이 본 환상의 내용이 대단히 여러 해석을 요하기 때문이다. 상당히 많은 해석의 관점은 차치하고 복음주의 권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해석으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함을 피하기 위함이다. 도대체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상대 즉 ‘뿔’은 무엇일까? 유대인들에게 가장 잔인했던 셀류키드 왕조의 안티오커스 4세라고 말하는 학자들의 의견이 있다, 교황을 지칭한다고도 한다. 심지어는 로마 제국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무엇이 되었든 이 뿔이 성도들과 싸워 이겼다는 점에 중요하다. 나는 오늘, 작금의 뿔에 주목한다. 21세기의 뿔은 더 잔인하다. 호모데우스 시대에 성도들을 싸워 이기는 ‘뿔’에 주목한다. 오늘의 뿔은 무엇일까? 무뎌짐과 무감각이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두렵고 치명적인 뿔은 영적인 무감각이자, 무뎌짐이다. 자기가 지금 어떤 영의 상태인지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무시하는 일이다.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만드는 무뎌짐, 무감각은 오늘의 뿔이다. 이 뿔의 공격에 노출되는 자는 백전백패한다. 그러기에 2024년 11월 26일, 나는 이렇게 절규한다. “하나님, 무감각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영적 민감함으로 무장하게 하옵소서.” 영적 민감함을 성서가 증언하는 단어로 바꾸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에 헐떡이는 것이다.” 즉 주의 말씀에 목 말라 하는 것입니다. 1. 주의 말씀을 사랑하려는 목마름이 있습니까? 127절의 본문은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금보다 더 사랑하는 영혼의 소유자가 영적인 타는 목마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관심갖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음은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토해냅니다. 다시 127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의 계명들을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 베드로가 고백한 신앙고백은 주목할 만합니다. 요한복음 6:66〜69절입니다.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느헤미야 8:13절을 봅니다.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여서” 언제나 부흥은 말씀을 사모할 때 일어납니다. 언제나 침체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납니까? 하나님 말씀을 무시할 때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은 사악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사무엘상 2:25절을 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말은 엘리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와 수단으로 삼았지, 목적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두 아들들은 죽임을 당하고 둘째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가 임신한 아들을 낳고 죽습니다. 하지만 낳은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명명합니다. 이름을 번역한즉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라는 의미라고 성경은 증 언합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자에게 임하는 멸망은 이가봇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이가봇의 정반대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은혜를 맛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말씀을 사랑하려는 목마름으로 타올라야 합니다. 2. 주의 말씀대로 살려는 목마름이 있습니까? 시인은 128절 본문을 통해 이렇게 갈파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범사에 모든 주의 법도들을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는 자는 올곧게 삽니다. 더불어 거짓 행위를 멀리합니다. 요한계시록 1:3절을 묵상하면서 언제나 느끼는 소회가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우리 대한민국 교회의 성도들은 1번과 2번 항목에 있어서 대단히 열심이라는 소회입니다. 하지만,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은 3번 항목에 있어서 빈약하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엄격한 의미로 파악해 볼 때 1, 2, 3번은 연쇄적 반응이지 단절적 반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조금 과격하게 선포하겠습니다. 3번의 행위가 빈약한 자는 결국 1, 2번도 온전히 하지 않는 자라는 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읽고 들었다면 반드시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증거라는 말입니다. 유트브 광고 중에 국경 없는 의사회 광고가 있습니다. 그 중에 최용준 소아과 전문의의 광고 및 홍보 멘트를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남수단에 가서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아름다운 일을 감당한 의사입니다. 그런 그가 홍보로 쓴 멘트가 제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습니다. “저는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는 의사인데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많은 이들이 죽어간다면 그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가 이 일을 해야 한다면 제가 가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가서’ 이 토로의 한 마디가 얼마나 깊은 감동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이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행동강령처럼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잘잘법에 출연한 김기석 목사께서 본인에게 영향을 준 10권의 책을 소개하는 유트브 영상을 보다가 잠깐 멈춘 대목이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옥중서간을 소개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본회퍼는 일상적인 삶과 신학적 삶이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이 말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만, 실제로 이런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뼈저리게 느끼며 목양 35년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이해할 만큼의 삶과 말이 유리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에 최대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적용 영역이 철저히 현장이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현장을 도외시하는 이가 말씀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빌립보서 4:8-9절을 묵상하겠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바울이 갖고 있었던 위대한 장점은 예수께서 하셨던 말씀을 배운 대로 행하는 본을 보였고, 그것을 실천했다는 점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삶. 수없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3) 주의 말씀을 갈망하는 헐떡임이 있습니까? 131절 본문은 참으로 감동이 됩니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 “헐떡였나이다”로 번역한 ‘샤아프’는 호흡이 가빠지는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저는 부모님의 임종을 보지 못한 불효자입니다. 하지만 목사로서 교우들의 임종을 몇 번 지켜보았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임종 시간입니다. 숨이 넘어가려는 임종자의 고통을 무엇으로 해석하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그녀)에게 호흡할 수 있는 힘과 공기 한 모금은 얼마나 간절한 것인지 나름 짐작합니다. 바로 그 상태가 ‘샤아프’입니다. 감히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숨이 넘어갈 정도로 긴박한 마음을 갖고 말씀을 헐떡이는 자가 넘어지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4:12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이 말씀의 능력을 믿는 자가 어떻게 헐떡이지 않겠습니까? 시인도 역설했습니다. 시편 19:7-10절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야훼의 말씀을 이렇게 믿고 사모하는 이의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헐떡임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말씀에 대한 헐떡임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줌으로 예배한 서희 집사와 예배 후에 잠시 통화를 했습니다. 줌 창에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문구를 써서 이미혜 집사께서 창에 올려주셨고, 불이 나게 문제 해결을 위해 다시 줌 인스톨을 지시해서 문제가 해결되었는데 이번에는 제가 연 패드 창에 소리를 끄지 않아, 소리가 오버랩이 되는 바람에 말씀을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후문을 전화상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서희 집사께서 예배 후 톡 방에 이렇게 올렸습니다. “안 들려서 더 더 집중한 예배였습니다. 가난해도 병들어도 주님 안에 함께 함이 든든합니다. 목사님과 미혜 집사님과 함께한 예배가 충만입니다. 유난히 멋집니다.” 이 헐떡임이 우리 공동체에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지난 주일, 교제한 새 신자가 이렇게 전언했습니다. “목사님, 강해 설교를 통해 흘러넘치는 은혜를 받는 교회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세인교회 교우들은 정말로 이 특별한 은혜를 받고 있어서 부럽습니다.” 여러분에게 주마다 흘러넘치는 말씀의 은혜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 특별한 은혜임을 믿고 그 말씀을 기다리는 헐떡임이 있습니까? 오늘 세인 교회가 이런 상황이 되면 그날 세인 교회는 교회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사무엘상 3:1절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