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22일 (네 번째 주) 지역 셀 사역
1. 얼음깨기 (WELCOME) 이번 추석 명절에 자녀들에게 건넨 덕담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2. 찬양 (WORSHIP)
● 찬송가 373장: 고요한 바다로 ● 복음성가: 괴로울 때
3. 말씀 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요한복음 2장 1-11절 ● 제목 : '없음'의 은혜 1) 선지사 생도의 아내, 사르밧 과부, 오병이어의 기적 담론과 가나 기적 담론의 공통분모는?
⓵ 선지자 생도 아내 ⓶ 사르밧 과부 ③ 오병이어의 기적
2) 마리아가 선택했던 최고의 신앙적 행위와 부자 청년 행위를 비교할 때 얻게 되는 교훈은? ⓵ 부자 청년의 행위 ⓶ 마리아가 가나 잔치에서 보인 행위 ③ 교훈은?
3) 적용하기
⓵ 나에게 ‘없음’이 주는 오늘의 자화상은? ⓶ ‘없음’을 하나님의 일하심의 여백임을 믿고 있는가? ⓷ 5가지 기도 제목 합심하여 기도하기.
4) 사역하기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주간 사역하기 1) 5가지 합심 기도 하기
① 추석 이후, 내 가정과 내 범사를 하나님의 식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② 신앙의 경주 속에서 주님께 내 ‘없음’을 의뢰하는 흔들리지 않는 영성을 주옵소서. ③ 내 힘으로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체 일들을 주님, 해결하여 주옵소서. ④ 2024년 하반기 여정 중에 건강을 잃지 않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⑤ 다시 일상에서 간증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지게 하옵소서. 2) 지역 셀이 건강하게 재 활성화되도록 리더와 인턴들이 최선을 다해 노력하기 3) 하반기에 태신자 구원하기 위해 전심하기 4) 환우들을 위해 치유 중보 5) 부교역자 청빙이 완료 되도록 중보
● 설교요약 (SUMMARY)
본론) “외경에 의하면 갈릴리 가나에서 혼례를 치르고 있는 가정을 마리아의 여동생 살로메의 가정이라고 적시하고, 더불어 혼례의 주인공을 요한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옥한흠, 『요한이 전한 복음』, 두란노, 104쪽) 하지만 이런 주장은 외경이 전하는 설이니까 믿는 것은 개인의 취향으로 차치한다고 옥 목사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전혀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마리아와 예수는 비록 별로 가깝지 않은 남의 집안에 초대받은 손님임에도 불구하고 명령을 내린다.” (스티븐 S. 스몰리, 『요한 신학』, 풍만, 287쪽) 저는 이 두 주장 중에 전자에 가깝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본문 정황을 들여다보면 혼례를 치르는 가정은 분명히 마리아와는 대단히 가까운 사이라는 충분히 공감할 만한 정황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정황이 이 일을 대변해 줍니다. 아마도 이 정도라면 친인척지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가능성을 열어 두고자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가까운 관계로 엮어져 있는 가정에서 치르고 있는 혼사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열리는 혼례에 하객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음식 중의 하나가 포도주였습니다. 본문 기자가 왜 포도주가 떨어졌는지 그 정황에 대한 암시나 힌트를 준 구절이 없기에 이런 무례함이 벌어지게 된 동기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결례를 범하고 있는 위기 상황이 초래되었다는 점입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것은 혼주와 대단히 가까운 친인척인 마리아였습니다. 본문 2〜4절을 만나 보십시다.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는 지난 수요일에 이 구절에 대한 성서적 분석을 이미 나누었습니다. 재론은 차치하고 오늘은 이 구절이 주는 다른 영적 교훈에 접근해 보겠습니다. 마리아는 아들의 정체성에 대해 단 한시도 잊고 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들이 남편과의 동침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뜻으로 인하여 탄생되었다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아들을 양육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48〜51절을 만나 보십시다.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께서 12세 되던 해에 일어났던 소동에 대한 엔딩 멘트이자 사족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을 데리고 올라간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 예수를 잃어버려 혼비백산했습니다. 3일 만에 헤롯 성전에서 극적으로 찾은 아들을 나무라는 부모에게 12세 아들 예수가 했던 말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당돌하게 대꾸하는 아들 예수의 스토리 사족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어찌 보면 이런 일련의 일을 경험한 마리아가 아들 예수에게 가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을 인지시키고 난처한 일을 당한 친인척지간의 곤란함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어떤 기적을 일으켜 줄 것을 기대하고 요청한 것이 가나 기적 담론일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 교훈을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을 표면적으로는 거절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본문 이적 담론에서 예수는 결국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을 행사합니다. 그렇다면 가나 혼인 잔치에서 배워야 하는 두 번째 레마는 무엇일까요? ※ ‘없음’이라는 부족함을 신앙적으로 승화시킬 때 하나님이 그 부족함을 채우시며 일하신다는 것을 경험하는 은혜입니다. 가만히 묵상해 보십시다. 가나 혼인 잔치에 발생한 포도주 없음의 돌발적인 상황은 혼인 잔치의 흥을 깨는 것은 물론, 무례를 범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없음’의 상태가 도리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본문이 방증해 줍니다. 삶의 가장자리나 언저리에 놓여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마치 나 혼자만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외로운 섬처럼 느껴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50대에 이른 가장이 느끼는 가장 큰 절망감은 누구도 내 편이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절망감이라고 말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예외가 없을 것 같은 데, 자녀와 아내를 위해 평생을 달려왔는데 아내도 독립적인 자아를 요구하고, 자녀들은 자기 것에 혈안이 되어 아버지의 삶은 당연히 그런 삶이라고 치부할 때 느껴지는 절망감은 자살 충동까지 느끼게 한다는 무서운 경고를 읽다가 왠지 저 역시 그런 소회를 느낀 때가 있었기에 정서적으로 공감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주시는 임재의 충만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함께 불렀던 복음성가 가사가 그대로 내게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명이어도 공허하지 않은 것은/예수 안에 난 만족함이라 / 가난하여도 부족하지 않은 것은/예수 안에 오직 나는 부요함이라 / 고난 중에도 견뎌낼 수 있는 것은/주의 계획 믿기 때문이라 / 실패하여도 일어설 수 있는 것은/예수 안에 오직 나는 승리함이라 (손경민 – 충만 가사 중에서) 본문으로 돌아가 다시 집중해 보십시다. 요한복음 2장 3절입니다.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없음’을 인정하고 신앙적으로 승화시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께 의뢰하는 것입니다. 책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만지심으로 교회에 나온 신자가 있었습니다. 첫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말씀을 받은 그 새 신자가 예배당을 나가면서 이렇게 독백했습니다. “참 나쁜 사람들, 이 황홀하게 귀한 소식을 나에게 한 번도 들려준 적이 없는 나쁜 사람들, 참 이상한 사람들, 이렇게 엄청나고 귀한 보물의 말씀을 믿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 어떻습니까? 우리는 내가 당하고, 내가 느끼고 있는 일체 절망과 고난의 아픔을 주님께 찾아와 의뢰하고 위임하고 있습니까? 만에 하나, 내가 고백하는 주님이라는 존재에게 내 ‘없음’을 의뢰하지 않고 의탁하지 않으며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 이상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9:12절을 읽겠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매 열두 사도가 나아와 여짜오되 무리를 보내어 두루 마을과 촌으로 가서 유하며 먹을 것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있는 여기는 빈들이니이다” 오병이어 기적 담론에서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바로 여기입니다. “여기는 빈들입니다.” 하나님은 충만하게 꽉 차 있는 곳에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장소는 빈들입니다. 열왕기하 4:2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선지자 생도 남편을 잃은 과부가 엘리사에게 고백한 내용은 절망적 보고였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없음’의 고백에서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3년 6개월간 비가 내리지 않는 극심한 가뭄의 재난은 사르밧에 살고 있는 과부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르밧에 가면 만나게 될 과부에게 물과 떡을 요청하라고 하셨고, 만난 과부에게 떡 한 조각을 요청할 때 과부가 엘리야에게 토로한 열왕기상 17:12절의 보고는 매우 절망적입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과부가 고백한 ‘없음’의 그 여백에서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찬송가 373장을 부를 때 이론으로 형용할 수 없는 은혜에 잠기곤 합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 / 내 걱정 근심을 쉬 없게 하시고/내 주여 어둔 영혼을 곧 밝게 하소서 /이 세상 고락간 주 뜻을 본받고/내 몸이 의지 없을 때 큰 믿음 주소서 아멘 마태복음 19:16〜22절을 내증의 마지막 구절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자이며, 젊은 청년이었고, 심지어 종교 기득권의 산실이었던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라는 권력까지 갖춘 당시 시대적 정황으로 볼 때 거의 완벽에 가까운 것을 갖춘 어떤 이가 예수께 찾아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청합니다. 예수께서 율법 준수를 확인하시자 그 청년이 이렇게 예수께 대답했습니다. 마태복음 19:20절입니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이 담론에 접근하다 보면 매우 슬퍼집니다. 기억하고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내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여기는 자에게 하나님이 일하실 여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자 청년 담론이 기록되어 있는 누가복음 18장에 병행되어 있는 또 다른 유명 기사인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적 해석에서 느끼는 바리새인 표상과 세리 표상의 극단적 차이가 무엇입니까? 바리새인이 자신이 의롭다고 선언하는 메시지에 안에 자신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거의 모든 부문이 완벽하다는 자기애의 주인공임을 밝힌 점입니다. 반면, 세리는 자신은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아무 것도 갖추지 못한 존재임을 선언했다는 점입니다. 있음과 없음의 차이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손들어주신 대상이 ‘있음’의 상징인 바리새인이 아니라, ‘없음’의 상징인 세리였다는 점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은 ‘없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없음’ 그 자체가 기적의 시작은 아니었습니다. 그 ‘없음’을 주께 보고하고 의탁했을 때 기적이 시작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을 오늘 우리 교우들에게 준다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천 길 벼랑 끝 100미터 전. 하나님이 나를 밀어내신다. 나를 긴장시키려고 그러시나! 10미터 전, 계속 밀어내신다. 이제 곧 그만두시겠지. 1미터 전, 더 나아갈 때가 없는데 설마 더 미시진 않겠지. 더 미시진 않을 거야. 벼랑 끝, 아니야. 하나님이 나를 벼랑 아래로 떨어뜨릴 리가 없어. 내가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하나님이 너무 잘 아실 테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벼랑 끝자락에 간신히 서 있는 나를 아래로 밀어내셨다. 그때야 알았다. 나에게 날개가 있다는 것을.” (한비야, 『그건, 사랑이었네』, 푸른숲, 89쪽) 오래전에 읽은 한비야 작가의 이 글을 만났을 때, 울컥했던 기억이 오롯합니다. 벼랑 끝에 서봐야, 하나님이 보입니다. 벼랑 끝에서 떠밀려보아야 하나님이 나에게 날개가 되어주심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경험하는 벼랑 끝을 낭만으로 보는 목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꼭 절망으로 보지도 않습니다. 왜? 절망의 끝 터널에 있을 때, 그 절망을 주께 의뢰하는 자를 그곳에서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 나와 그대의 하나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추석 명절을 보냈습니다. 가족과 만나는 행복한 시간을 보냈지만, 상황이 여전히 녹록하지 않아 아픔을 느끼는 교우가 있습니까? ‘없음’ 자체 때문에 고뇌하지 말고, 그 없음을 주군께 의뢰하지 못하는 나를 안타까워하십시오. 믿음의 궁극은 여전히 요원한 것처럼 보이는 내 자아를 보시고 일하시는 주님이 나의 주님임을 흔들리지 않는 영성으로 붙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