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4일 (첫 번째 주) 지역 셀 사역 1. 얼음깨기 (WELCOME)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비빔밥과 그 다음에 좋아하는 비빔밥은 무엇일까요? 2. 찬양 (WORSHIP)
● 찬송가 345장: 캄캄한 밤 사나운 ● 복음성가: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3. 말씀 읽기와 적용 (WORD) ● 본문 : 창세기 44장 1-34절 ● 제목 : 고난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1) 유다의 인생사를 통해 경험했던 질곡을 나누어 보자. ⓵ 설교를 기초로 하여 나누어 보자.
2) 유다가 요셉에게 읍소한 내용을 설교와 관련하여 요약해 보자.
설교를 중심으로
3) 적용하기
⓵ 고난을 피하고 있는가? 그 고난을 통해 영적인 진보의 도구로 삼고 있는가? ⓶ 시인 타고르의 시를 내게 적용해 보자. ⓷ 내게 임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 달라고 합심하여 기도하자.
4) 사역하기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중보 및 사역하기 1. 2024년 선정된 태신자를 위해 매 셀예배 마다 중보하기. 2. 기도 수첩에 있는 셀원들의 기도 제목 일일이 중보하기 3. 2월에 진행되는 사순절 릴레이 기도회에성실하게 참석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4. 셀 묵상 팀 조직 다시 확인하기 5.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중보하기
● 설교요약 (SUMMARY)
서론) 본문 7-10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주여 어찌 이렇게 말씀하시나이까 당신의 종들이 이런 일은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우리 자루에 있던 돈도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부터 당신에게로 가져왔거늘 우리가 어찌 당신의 주인의 집에서 은 금을 도둑질하리이까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그가 이르되 그러면 너희의 말과 같이 하리라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 감히 우리가 어떻게 애굽 총리의 귀한 재물을 도둑질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색하며 만에 하나 우리들 중 누구의 짐 보따리에서 은잔이 발견되면 예외없이 그는 죽을 것이고,우리 모두는 애굽의 종이 되겠다고 단언하며 읍소합니다. 아랑곳 하지 않은 요셉의 명을 받은 청지기는 이윽고 결백을 주장하는 형들의 짐 보따리를 검사합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옵니까? 본문 12-13절을 보면 검사 결과,자신들의 짐에서는 예기치 않은 돈다발과 막내인 베냐민의 짐에서 은잔까지 발견되었음을 보고합니다. 형들은 이 참담한 일을 경험하고 슬픈 나머지 옷을 찢고,다시 요셉 앞으로 끌려갑니다. 본문 15절 이하는 요셉이 형들에게 심문하고 유다가 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기사입니다. 요셉이 심문의 형식으로 형들에게 근엄하게 묻습니다. 내가 점을 잘 치는 사람인 줄 너희가 몰라서 이런 짓을 했느냐고 압박합니다. 이 살벌한 심문을 하는 요셉에게 죽으면 죽으리라는 사명을 갖고 다시 유다가 등장하여 답변합니다. 돈다발과 막내의 짐에서 발견된 은잔에 대한 내용은 우리들 모두가 정말로 모르는 일이지만, 유감스럽게 막내의 짐 보따리에서 은잔까지 발견된 이상,우리 형제 모두는 변명의 여지 없이 애굽의 노예가 되겠다고 실토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미리 짜 놓은 각본대로 노예는 베냐민만 될 것이라고 재 반응합니다. 요셉이 새롭게 내린 명령의 결과물은 형들에게는 죽음보다 더 한 고통으로 다가왔습니다. 이제부터 설명드리는 유다의 장황한 내레이션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메시지 안에 우리들이 담아야 하는 교훈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답변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고향 가나안에는 노년의 아버지가 계십니다. 그 노인은 평생 한 아내와 두 아들만 있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한 명의 동생은 죽었습니다.또 한 명이 짐 보따리에서 은잔이 발견된 막내입니다. 총리의 말대로 우리들이 만에 하나, 막내 동생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돌아가면 늙은 아버지는 슬픔 때문에 죽을 것입니다. 이곳 가나안에 막내 동생을 데리고 올 수 있었던 것도 한사코 막내를 내어주지 않던 아버지께서 막내 아들을 무사히 다시 애굽으로 데리고 올 것을 약속하라고 하셨고 우리들이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했기에 동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 막내를 이곳에 놔두고 우리만 가나안으로 내려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유다가 요셉에게 뜻을 거두어 줄 것을 요청하면서 대단히 의미 심장한 조건을 내세웁니다. 본문 33-34절입니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무슨 말입니까? 베냐민 대신 유다 자기가 노예가 되겠다는 고백입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신 삶의 이유를 빼앗지 말아달라는 유다의 호소였습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유다를 되새겨 보겠습니다. 창세기37:18-20절입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 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불과24년 전에 요셉을 죽이기 위해 물 구덩이 속으로 던져 버린 공범자였습니다. 창세기37:26-28절입니다.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그에게 우리 손을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혈육이니라 하매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 형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죽이려던 마음을 바꾸어 미디안 상인에게 은화20을 받고 자기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긴 공범자였습니다. 창세기37:31-32절입니다.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미디안 상인들에게 요셉을 팔아넘기고 와서 아버지에게 요셉이 악한 짐승의 습격을 받아 죽은 것으로 위장하여 아버지를 가증하게 속인 공범자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창세기 43:8-9절을 마저 읽어 보겠습니다. “유다가 그의 아버지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아이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를 위하여 담보가 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서 그를 찾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와야 흉년을 이길 곡식도 얻을 것이고,시므온도 안전할 것이라는 압박을 받고 가나안에 돌아온 8명의 형들이 애굽 기행의 자초지종을 아버지 야곱에게 아뢰고 다시 가나안으로 갈 때,한사코 막내를 내어주지 않는 아버지 야곱을 설득하여 우여곡절 끝에 베냐민을 데리고 가나안에 갈 수 있도록 한 주인공이 바로 유다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앞에서 요약한 대로 요셉에게 자신이 종이 될 터이니 베냐민을 아버지가 있는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달라는 유다의 장황한 읍소가 이해가 될 법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설교를 통해 이런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는 족장들의 한 가정에서 일어난 가족사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오늘 설교를 준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늘 설교가 주는 진한 메시지는 말할 것도 없이 영적인 시사점이자 교훈입니다. 본론) 앞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유다의 변을 다시 한 번 나누어 보십시다. 본문 20절을 봅니다. “우리가 내 주께 아뢰되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으니 노인이요 또 그가 노년에 얻은 아들 청년이 있으니 그의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가 남긴 것은 그뿐이므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하였더니” 이 구절을 주석한 학자의 설명을 들어보십시다. “어떻게 아버지가 막내만 의지하며 살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유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아마도 평생을 사랑해주지 않은 아버지에게 가졌던 불만과 서운함이 복받쳐 올랐을 것이다.아버지는 그저 요셉과 베냐민밖에 몰랐다.아내들 중에도 라헬밖에 몰랐다.유다를 낳아준 레아는 항상2등급 아내였고,자식들도2등급이었다.” (송병현,『엑스포지멘터리 주석-창세기』, 761쪽) 송 교수의 해석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정말로 유다의 마음은 이런 박탈감으로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본문에서 유다는 아버지가 보였던 편애의 대상이었던 요셉에게,또 다른 편애의 대상이었던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이 노예가 되겠다고 읍소하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중심 설교가 주는 레마이기도 합니다. 유다는 자신의 삶의 여정 중에 수많은 인생고를 겪었던 자였습니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지 못했던 자였고, 자신을 낳아준 친모는 언제나 아버지에게 2등급 아내였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유다의 개인사를 조명하고 있는38장을 들춰보면 유다는 장남과 차남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셋째 마저 죽일 수 없어,이런 저런 계산을 하다가 며느리와 관계를 맺어 덜컥 아들을 낳는 비윤리적인 일도 경험한 아픔도 갖고 있는 자였습니다. 가나안에 밀어닥친 7년 대흉년 기간 동안 애굽을 두 번이나 방문하는 과정을 겪으면서 요셉임을 밝히지 않는 애굽 총리로 인해 심각한 마음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시쳇말로 산전수정공중전을 겪었고,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자가 유다입니다. 이런 삶의 질곡과 고난은 유다를 신실한 아들,형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얼마든지 부정적인 아들로 빗뚫어져 나갈 수 있는 가정 환경을 소유한 자였지만, 이런 환경적인 요소를 긍정화시켜 선한 영향력을 미친 효자,그리고 착한 형의 역할을 감당하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삶의 정황에 임한 고난은 영적으로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가 됩니다. 이것은 세속적 시각으로 볼 때도 긍정적인 면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 사역을 마치고 몸이 많이 지쳐 있어서 홀로 피곤을 풀 겸해서 동네 목욕탕을 다녀왔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는 목욕탕을 방문했는데 목욕탕 안에서 3-4명의 손님들이 있어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피곤을 풀 수 있었습니다. 한 할아버지는 머리가 백발이고, 또 한 분은 그나마 머리카락이 별로 없기까지 해서 더 연로한 할아버지로 인식되어 저는 개인적으로 두 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눈을 감고 피곤을 풀며 그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할아버지 중 한 분은 판넬을 제작하는 업에 종사하고, 또 다른 한 분은 우사를 경영하는 분이었는데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사에 판넬 공사를 해야 하는데 언제 한 번 방문해서 견적을 내달라고 부탁하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우사를 경영하는 할아버지가 판넬을 제작하는 분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이렇게 통성명도 했는데 앞으로 잘 지냈으면 좋겠다면 사장님 연세를 물어 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그 사장님이 답했습니다. “네, 저는1964년생이니까 올해 61세 환갑이 되었습니다.” 답을 들은 우사를 경영하는 그 할아버지가 뜬금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장님, 앞으로 제가 깎듯이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저는 사장님에 비해서 아직 한참 어립니다. 저는1968년생입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순간,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린 것들이 목욕탕을 시끄럽게 했는데 괜히 긴장했네!” 웃자고 한 말이지만,그냥 웃기만 하기 위해 이 에피소드를 말씀드린 것은 아닙니다. 우사를 경영하고 있는 분이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한 판넬 사장에게 한 마지막 말에 여운이 저를 공명했기 때문입니다. “사장님, 얼굴 주름에 성실하게 살아오신 삶의 자국이 새겨져 있네요. 보기에 너무 좋습니다.” 왜 아니 그렇겠습니까? 이제 막 환갑을 맞이한 분이나, 50대 후반으로 접어든 분의 면면이 벌써 할아버지라는 인상을 줄 정도라면 그들의 삶에 얼마나 많은 애환과 고난의 스토리가 있었고,웃은 일도 있었겠지만 울며 달려왔을 이야기가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고난과 질곡이 있는 삶은 꼭 피해야만 행복이며, 만나지 않아야만 축복이라는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셉이 자신의 삶의 여정 중에 경험해야 했고, 당해야만 했던 고난이 그를 더 믿음의 사람으로 진보시키며 성숙시켰던 것처럼, 오늘 화두로 삼고 있는 유다 역시 이런 저런 삶의 질곡과 고난이라는 학교를 다니면서 경험한 뒤에 얻게 된 영적인 성숙은 오늘 우리 세인 지체들도 본받아야할 신앙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새벽예배 묵상 텍스트를 다시 한 번 나누고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10:48절을 읽습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하지만 이 꾸짖음과 잠잠하라는 압박을 이겨낸 뒤에 바디매오는 눈을 뜨게 됩니다. 고난은 변장하고 찾아오신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한 위렌 위어스비 목사의 말을 설득력 있게 만들어주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았던 팀 켈러도 이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그 갈래와 상관없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고난이야말로 그 으뜸가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결국,고난이야 말로 기독교 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팀 켈러,『고통에 답하다』, 262쪽) 시인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편119:71절입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엄청난 신앙고백입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고난을 기피하는 시대입니다. 고난을 달가와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어떻게 하든 고난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시대입니다. 정서적으로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어쩔 수 없이 맞아야 하는 하나님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우리에게 이미 알려준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를 낭독하고 마치려 합니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멈추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 동료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 스스로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 내 자신의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찬양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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