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10월 15일 (셋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8:03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2023년 들어 내가 느꼈던 최고의 감동은?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442장: 저 장미꽃 위에 이슬 
● 복음성가: 주님 것을 내 것이라고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감동
● 본문: 창세기 37:12-24
1) 도단의 구덩이에 물이 없었던 이유를 예레미야 38:6절과 연관하여 해석해 보자.
⓵ 창세기 37:24
⓶ 예레미야 38:6
⓷ 해석의 결과는?  

2) 마태처럼 나에게 찾아오신 주님으로 인해 느꼈던 감동의 순간이 있다면 나누어 보자.
마가복음 2: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3) 적용하기
⓵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예민함이 있는가?
⓶ 나는 내 영혼의 촉수를 어디에 집중하고 있는가?
⓷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는 감동을 느끼게 해달라고 합심하여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사역 내용

1. 11월 추수감사주일 축제를 위해 셀 별 사역 세우기
2. 지역 셀 대 심방 준비하기: 기도 제목 정리해서 김 전도사에게 문서로 제출
3. 셀 별 전교인 성경퀴즈대회 준비하기
4. 공 예배 잘 지키도록 리더들이 솔선수범하고 독려하기
5. 10월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6. 담임목사의 목회 승리를 위해 중보
  

 
설교요약 (SUMMARY)
본론) 야곱은 헤브론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야곱은 채색 옷을 입고 지내던 요셉을 불러 미션을 하나 내립니다.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이 무사한지, 그리고 양떼도 별일이 없는지를 확인하고 오라는 미션이었습니다. 세겜은 야곱의 거주하고 있는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약 80km나 떨어져 있는 먼 곳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명을 받은 요셉은 세겜을 향해 길을 떠났지만 그곳에서 형들을 만나지 못합니다. 형들이 도단으로 장소를 옮겼기 때문입니다. 세겜에서 또 다시 북쪽으로 약 20km나 떨어져 있는 도단을 향해 요셉은 길을 떠납니다. 결국 요셉은 특별한 편애를 받고 있었던 아버지 품에서 100km나 떨어진 곳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뭔지 모르 불길한 그림자가 요셉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창세기 기자가 암시하고 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도단으로 자기들을 찾으러 온 요셉을 본 형들의 시각은 대단히 서늘했습니다.

본문 18-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 이 구절을 비추어보면 형들이 채색 옷을 입고 있는 요셉에게 얼마나 반감을 갖고 있었는지를 가늠하게 해 줍니다. 요셉이 꾸었던 꿈에 대해 지지가 아니라 분노의 표현으로 그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함으로 자신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하는 물리적인 힘의 우세를 염두 해 둔 포석입니다.
이 구절에 언급된 ‘구덩이’라는 히브리어 ‘보르’는 37장에만 5번 사용되었습니다. ‘보르’라고 번역된 고대 팔레스타인 지역에 만들어진 ‘구덩이’는 땅 표면과 연결되어 있는 입구 쪽으로 올라갈수록 단면이 좁은 형태의 구덩이를 말합니다. 이렇게 만든 이유는 건기에 물 보충을 위해 만들어 놓은 구덩이에 담아 놓은 물들이 증발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함 때문입니다. 이러한 특수한 구조로 만들어진 ‘보르’였기에 실수로 사람이나, 혹은 짐승이 빠지면 결코 혼자의 힘으로는 올라올 수 없는 치명적인 구덩이였습니다. 이곳에 요셉을 던져버리자고 형들이 의견을 투합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제안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힌 형은 바로 맏형이었던 르우벤이었습니다. 르우벤이 반대한 이유를 본문 21-2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  21-22절에서 밝히고 있는 르우벤의 반응은 조금은 색다릅니다. 지난 설교에서 언급했듯이 요셉은 채색 옷을 입은 유일한 아들이었습니다. 채색 옷(케토넷 파심)은 아버지가 상속자에게만 입히는 옷이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자신의 상속자로 요셉을 염두 해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가장 큰 반감을 가져야 할 장본인이 바로 르우벤이었기에 그를 없애는 일에 가장 앞장서서 찬성해야 하는데 왜 르우벤은 동생  요셉을 살리려고 했을까요? 창세기 35:22절을 소개합니다.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이 구절은 패륜적인 일이 야곱 가에 있었음을 고발하는 텍스트입니다. 레아의 소생인 르우벤이 라헬의 몸종이었던 빌하와 통간한 패륜이었습니다. 아무리 몸종이었지만 빌하는 그래도 자기의 동생들인 단과 납달리를 낳은 어머니인데 그녀와 통간을 한 것은 심대한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야곱에게 있어서 르우벤은 이미 내버린 자식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모를 리 없었던 르우벤이었기에 항상  아버지에게 잃어버린 장자의 가치를 되찾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은 자명합니다. 이것이 르우벤이 요셉을 살리고자 했던 이유였음을 송병현 교수는 자신의 주석서에서 논합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를 범한 후 줄곧 아버지의 눈 밖에 난 아들이었다. 혹시 요셉의 생명을 구함으로써 깨어진 아버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던 것 같다. 야곱의 가장 나이 많은 아들로서 아버지의 첩을 범한 과오로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송병현, “엑스포지멘터리 창세기 주석”, 665쪽)

  다음 주 수요 설교를 통해 다시 살피겠지만 르우벤이 요셉을 구하려 하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지만 그의 원 마음은 아마도 이런 복합적인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텍스트의 마지막 절을 나누어야 합니다. 23-24절을 읽겠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 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형들이 양을 치는 곳에 요셉이 이르자 형들은 갖고 있었던 물리적인 힘을 같이 동원하여 요셉의 채색 옷을 벗기고 그를 ‘보르’ 즉 구덩이에 던져버립니다. 이제 꿈을 꾸었던 요셉의 인생은 그곳에서 마감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24절 마지막 구절에 기록된 한 단어가 대단히 크게 보입니다. 그것은 히브리어 ‘레크’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빈 것’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하경택 교수가 이 대목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이 구덩이는 우기에 물을 저장해 놓았다가 건기에 사용하는 물 저장소 역할을 한다. 다행이 요셉이 이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그곳은 비어 있었다. 그래서 요셉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하경택, “정경적 관점에서 본 창세기 2”, 322쪽)
  신학교에서 구약을 가르치는 교수는 ‘레크’에 대해 해석하며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 하지만 현장에서 목회를 하는 목사는 신학교 교수가 보는 관점과 스펙트럼이 다릅니다. ‘레크’ 즉 ‘빈 것’이라는 이 표현을 ‘다행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일하심의 은혜’로 해석되었기에 감동 그 자체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본문과 관련하여 강조하기에 아주 적절한 성경 구절인 예레미야 38:6절을 소개합니다.
“그들이 예레미야를 끌어다가 감옥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 내렸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창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창 속에 빠졌더라”
  예레미야는 유다를 팔아먹는 매국노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 뜰 안에 있었던 말기야의 물구덩이에 던져지게 됩니다. 여기에 기록된 물구덩이가 오늘 본문의 ‘보르’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예레미야 예언서 기자는 예레미야가 빠진 그 구덩이에는 마침 물이 없었고 진창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예레미야 예언자가 물웅덩이에 빠진 시기를 6월이라 7월경으로 산정합니다. 그렇다면 우기라고 할 수 있는 5-10월 사이에 들어있는 6-7월이라면 마땅히 ‘보르’에 물이 차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보르’에 물이 없었습니다. 농경문화시대였던 남 유다 말년을 감안하면 웅덩이에 물이 없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레미야가 던져진 ‘보르’에 물이 없고 진창만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셉이 던져진 ‘보르’와 그 해석이 맥을 같이 해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를 살리고, 요셉을 살리기 위해 그 ‘보르’에 이미 물을 빼셨든지, 아니면 물이 없는 보르를 택하게 하셨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 둘 중에 그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해도 다가오는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감동입니다.

※ 삶의 현장에 날마다 ‘감동’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예민하기를 바랍니다.

  이 레마를 전하면서 전제를 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감동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감동은 영적으로 민감하게 깨어 있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감동이라 다시 한 번 한희철 목사의 글감을 나누겠습니다. 이렇게 물이 없는 구덩이에 빠진 예레미야는 극적으로 구원을 받게 됨을 예레미야 38장은 연이어 이렇게 보고합니다. 예레미야 38:11-13절을 계속 살펴보십시다.
“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 곳간 밑 방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헝겊과 낡은 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구덩이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밧줄로 내리며 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당신의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에 대시오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머무니라”

  깊은 웅덩이에 빠진 예레미야는 홀로 그곳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립무원이었던 예레미야를 구원하시기 위해 왕궁 내시였던 에벳멜렉을 사용하시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정신적인 폭력을 가했던 시드기야의 궁정 내시로 일하던 에벳멜렉이 죽기를 각오하고 주군인 시드기야에게 예레미야를 살려야 한다고 고언합니다. 가뜩이나 예레미야에게 핍박을 가하던 것을 찝찝해하던 시드기야는 에벳멜렉에게 그를 건져내라고 윤허하고 그 윤허를 받은 에벳멜렉은 예례미야를 ‘보르’에서 건져내는 프로젝트를 곧이어 실시합니다. 예레미야 38:1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당신은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당신의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에 대시오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다시 이 구절을 표준 새 번역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말하였다. "해어지고 찢어진 옷 조각들을 양쪽 겨드랑이 밑에 대고, 밧줄에 매달리십시오."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였다.”

한희철 목사는 이 구절에 대해 이렇게 해제했습니다.
“웅덩이에 빠져 있었던 예레미야는 남아 있는 힘이 없었을 것이다. 밧줄만 잡고 올라오다가 놓칠 것이 자명했다. 낡은 옷을 허리에 두르게 하고, 그것을 밧줄로 묶는다면 따로 힘을 쓰지 않아도 도움이 될 것이다. 헝겊과 낡은 옷, 헤어지고 찢어진 옷 조각, 바로 그것이 웅덩이에 빠진 예레미야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하나님의 손길로 확인하는 ‘헝겊과 낡은 옷’, ‘해어지고 찢어진 옷 조각들’이라는 말 앞에 눈물을 그치기 어려웠다.” (한희철, “예레미야와 함께 울다”, 271쪽)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을 한 기억이 오롯합니다. 모든 목사가 한희철 목사처럼 이런 영적인 촉수가 예민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말입니다.물론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치열한 노력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해서 모든 목사들이 이런 감동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치열하신 도움,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하심이라는 것에 대한 영혼의 촉수가 예민하지 않는 자는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느낄 수 없는 감동이라는 절정이 한 목사에게서 느껴진 은혜입니다. 어디 목회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이겠습니까? 영적인 감동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민하게 주님께 우리의 영혼의 촉수를 드리운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지난 10월 월삭예배 시간에 세리 마태에 관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왕따 시키던 알패오의 아들 레위, 매국노라고 공격하며 밥도 같이 먹지 않을 뿐더러 한 공간에 같이 있는 것조차도 꺼려하던 시대였기에 모질게 살아남아야 했던 마태에게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찾아오셔서 여타 다른 사람들처럼 그를 지적하고 질타하지 않으시고 주님은 그에게 오셔서 단 한마디를 하셨다고 그날 설교를 통해 전했습니다.
‘나를 따르라’

  그날 새벽에 부산에서 줌으로 예배에 참석한 서희집사께서 예배 후에 제게 이런 문자를 보냈습니다. “목사님, 주님이 먼저 손 내미신다는 오늘의 말씀이 천군만마입니다.” 감동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영혼의 촉수를 예민하게 내미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 24절에 기록되어 있는 이 구절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결론)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경선 지역 셀 예배에서 강사로 대타를 뛰었습니다. 지난 주일에 나눈 아이스 브레이크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나의 남은 삶의 여백을 기초로 이루어가기를 원하는 꿈은?”
  장정분 자매의 순서가 다가왔습니다. 그러자 자매가 말을 하기 전부터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 동안 교회를 나오지 못했던 아쉬움에 대한 회한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자매는 이렇게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후회하지 않는 신앙생활 다시 시작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감동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슨 말을 하든지 무감동으로 굳어진 내 삶을 살고 있다면 그것만큼  비참한 재앙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그동안 지속해서 보내던 주일 예배 영상을 이제는 선별해서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 3년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다는 표현 한 번 하지 않는 무감각의 삶을 사는 자들에게 의미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재앙은 무감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 여러분의 담임목사도 바로 이 부분을 설교 원고에 담으면서 울었습니다.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