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3년 2월 19일 (셋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49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알고 있는 지인 중에 진짜로 존경할 만한 권위를 갖고 있는 분이 있으면 나누어 보자.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331장: 영광을 받으신 만유의 주여
●  복음성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진짜 권위       
본문 : 창세기 26:23-33
1) 29절 후반절에 기록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라는 구절이 주는 권위를 설명해 보자.
⓵ 백부장이 고백한 예수님에 대한 고백과 맞물려
⓶ 아비멜렉과 연관된 본문과 연계하여  

2) 내가 생각하는 권위를 성찰해 보자.
① 조작된 권위
② 진짜 권위  

3) 적용하기
⓵ 나는 세상이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갖고 있는가?
⓶ 세상보다 못한 교회란?
⓷ 세상이 인정하는 교회란?  

 
사역하기 (WORK)
셀 예배 순서

1. 찬양: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찬양 (복음성가,  찬송가 공히 한 곡 씩)
2. 아이스 브레이크 (얼음 깨기)
3. 기도: 인턴부터 시작하여 주마다 셀 원들이 순서 맡음 (철저하게 기도문을 준비할 것)
4. 나눔: 한 주간의 삶에 대한 나눔을 실시–미리 준비한  지체가 진행, 3-5분을 넘지 않게 한다.
5. 간증: 사역자가 있으면 실시 (없으면 하지 않아도 됨)
6. 말씀 증거: 수요일 저녁 예배 설교 피드백
7. 적용: 말씀에 비추어 한 주간 살아야 할 내용을 간단하게 제시. 셀 리더 교육 시간에 정해진 지침 진행
8. 중보기도
⓵ 태신자 섬김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에게 성령의 감동이 임하도록
⓶ 셀 원들의 기도 제목을 위한 중보
⓷ 세인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
⓸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위한 중보기도
9. 치유기도 : 합심치유기도 - 대상자 앞으로 초청
10. 헌금 및 헌금 기도 : 셀 리더
11. 축복기도 : 셀 리더

사역 내용

1. 정해진 태신자 구원을 위해 중보하기.
2. 2월 사역을 위해 : 사순절 사역 순종하기 
3. 섬기는 피선교지 위해 합심 기도하기
4. 주일 셀 사역을 위해 서로 격려하기
5. 공 예배 범하지 않기 독려하기
6. 담임목사의 목회 승리를 위해 중보하기
  

 
설교요약 (SUMMARY)
본론) 이삭이 그랄 사람들의 심각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한 곳에 이르러 땅을 팠을 때 우물이 발견되었고 그곳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명했음을 지난 수요일 설교를 통해 나누었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던 르호봇에서 머물지 않고 북동쪽으로 약 30km에 위치해 있었던 브엘세바로 이동합니다. 브엘세바는 이삭의 가정에 있어서는 대단히 의미 있는 장소였습니다.

  창세기 21장에서 살폈던 것처럼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랄 왕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 장관이었던 비골과 함께 서로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장소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선조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인준받은 땅이 바로 브엘세바라는 말입니다. 이곳에 정착하자 하나님이 이삭에게 다시 오셔서 아버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재삼 상기시켜 주십니다. 본문 23-25절입니다.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하나님이 이삭의 아버지에게 약속했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줄 것이라는 재 확신을 주시자 이삭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세바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곳에 장막을 쳤다고 기자는 보고합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창세기 21장을 다시 기억하게 하는 듯한 일이 일어납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자기 수하에 있는 친구 아훗삿과 군대 장관인 비골을 데리고 이삭을 찾아 온 것입니다. 이삭이 반색하며 내가 너희들이 나에게 행한 일을 곱게 여기지 않아 이곳으로 왔는데 또 어떤 트집을 잡으려고 나에게 왔느냐를 따지자 아비멜렉 일행이 이전에 아버지 아브라함에 했던 계약을 다시 언급하며 그 계약의 유효함을 요구합니다. 본문 29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역시 아브라함과 맺었던 계약의 재계약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런 요구를 한 아비멜렉 일행에게 그들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의미로 이삭은 그들을 선대하는 잔치를 베풀었고, 계약이 체결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아비멜렉 일행이 돌아간 후에 이삭의 종들이 주인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는데 지금 이삭의 일행이 머무르기로 작정하고 팠던 세바 땅에서 우물이 발견되었다는 보고였습니다. 이삭은 이후 그 땅의 이름을 아버지가 정한 대로 계속하여 브엘세바 즉 ‘일곱 맹세’라는 의미로 부르기로 했음을 밝힘으로 해피엔딩 스토리는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이상의 본문 이해를 중심으로 오늘 이 본문이 나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찾아보려 합니다. 제게 본문 구절 중에 가장 눈에 띈 구절이 있었습니다. 다시 본문 29절을 나누겠습니다.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다시 말하지만 이삭에게 말한 아비멜렉의 요구였습니다. 전반절은 자신들이 행한 일을 자화자찬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의 말은 거짓이었습니다. 그랄 사람들과 아비멜렉 본인도 이삭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땅을 파면 나온 우물들을 힘으로 갈취했습니다. 빼앗아 버렸습니다. 힘의 논리로 약한 자의 것을 편취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다.”는 주장은 억지 춘향이었습니다. 그러나 29절 후반절에 기록한 아비멜렉의 말은 의미심장한 발언입니다.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 구절을 보면서 영적인 통쾌함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삭만 놓고 보면 언제나 그랄 왕 아비멜렉은 이삭을 유린할 수 있는 물리력이 있었던 자입니다. 그를 농락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물리력을 갖고 있었던 아비멜렉이 물리력에 있어서 힘이 없어 상대가 되지
않는 이삭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해하지 말라” 무슨 말입니까? 빌고 있는 것입니다. 애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답은 기막힌 감동을 줍니다.
 
  이삭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이삭의 뒤에서 이삭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삭을 보호하시며 응원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이삭의 권위를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아비멜렉은 이삭 뒤에 있는 하나님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섭도록 경책되는 대목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교훈에서 눈을 떼면 안 됩니다.

※ 세상이 인정하는 권위가 진짜 권위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분석하면 정확한 시도일 것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세상이 보고 있습니다. 그것도 눈을 부릅뜨고 살펴보고 있습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은혜로 덮어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베드로전서 5:8절을 읽어보십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세상이 우리들을 향해 지켜보고 있는 관점이 이렇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태세가 세상입니다. 그런 상이 우리에게 너그럽겠습니까? 결코 너그럽지 않습니다. 그런 세상이 도저히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권위가 어떤 권위일까요? 저는 단언합니다. 조작된 권위가 아니라 진짜 권위입니다. 세상의 권위는 여론조사에 목을 겁니다. 그것이 표면적으로 보이는 권위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여론조사는 얼마든지 왜곡되고 조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과 그를 따르던 자들이 고백했던 ‘이는 참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한 권위는 만들어진 권위가 아니라 진심으로 인정된 권위입니다. 도널드 헤그너가 백부장의 토로를 기막힌 글로 주석했습니다. “백부장의 고백은 예수의 무죄함과 로마의 죄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도널드 헤이그, WBC 주석-창세기, p,1277) 이 문장이 의미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의 권위를 세상이 묵살시키려고 했지만, 도리어 세상을 통해 그 진짜 권위가 인정받았다는 증언이지 않겠습니까?

  지난 설 명절 연휴에 경남 MBC에서 방송한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가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저도 유튜브 방송을 통해 접했는데 한 동안 먹먹함의 감동 때문에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습니다. 어려웠던 시절, 한의사로 인정받아 수많은 돈을 번 김장하씨는 자신이 번 돈을 다시 사회에 환원하는 일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음을 방송은 부각시켰습니다. 하지만 방송에서 부각시킨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의 진실함이라는 권위를 세상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내가 돈을 벌었다면 결국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을 상대로해서 번 건데, 그 소중한 돈을 함부로 쓸 수 없었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뿌려 버리면 거름이 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이런 김장하 선생의 철학은 그가 갖고 있는 범접하기 쉽지 않은 권위로 세상 사람들에게서 피어났습니다. 저는 이 다큐를 보면서 느꼈던 도전은 그가 벌었던 물질을 세상에 환원하는 아름다움보다 더 분명히 도전이었습니다. 세상보다 못한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세상보다 못한 목사가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세상보다 못한 그리스도인이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그렇습니다. 이 땅에 반드시 존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교회와 성도는 세상이 그 교회와 성도가 갖고 있는 권위를 인정해주는 교회와 성도입니다. 우리 세인교회도 무섭도록 경성해야 할 목소리입니다.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제가 소그룹에서 사역을 마치고 항상 지체들과 함께 인사를 나눌 때, 이런 멘트로 인사를 나누곤 합니다.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 문안합니다.” 혹시 교우들은 상투적으로 참 좋은 인사 같다고 따라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인사 멘트의 의미는 그것보다는 훨씬 더 무게감이 있는 인사법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이 인사를 풀면 ‘당신을 존중합니다.’ 혹은 ‘당신 안에 있는 신에게 내 안에 있는 신이 인사합니다.’라는 의미의 인사입니다. 어떤 이는 타종교의 인사를 기독교에서 빌려 쓴다고 해서 거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정도의 편협함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대화불가입니다. 잘 새겨보십시다. 만에 하나,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상대방 안에 있는 그리스도에게 반갑게 인사를 한다고 전제할 때,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께서 거주할 영적 심령의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전제입니다.

  그러려면 나는 그리스도께서 기뻐하는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며 거주하는 삶을 사는 백성은 내가 갖고 있는 권위를 세상이 인정해 주는 삶을 사는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마스떼’라고 인사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에게 너는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야! 라는 칭찬도 들어야 하겠지만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상투적이 될 가능성과 의례적인 인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적어도 내가 진짜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지만 네 삶을 보면 예수를 믿고 싶어져. 네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로 살아계시는 것 같아!” 이런 수준에 올라서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행전 11:26절은 우리 세인교회가 존재하게 만든 성경적 근거이기도 합니다.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저는 우리 세인교회에 속해 있는 모든 성도들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제천에 살고 있는 자들이 불러주고 인정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세인 교회가 이렇게 세상에서 인정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1:21-28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진짜 권위는 예수님이셨습니다. 진짜 권위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세상이 만든 조작된 권위는 상대할 수 없는 권위였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세인교회에 이 권위가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기는 우리 세인 교회 강단에서 이 권위가 선포되기를 바랍니다. 이 진짜 권위로 무장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우리 교우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