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2년 11월 6일 (첫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46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나는 젊은 시절에 어떤 꿈을 꾸는 사람이었을까?  

 
경배와 찬양 (WORSHIP)
● 찬송가 516장: 옳은 길 따르라 
●  복음성가: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길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
본문 : 히브리서 12:12-13
1)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경주를 잘 하기 위해 고쳐야 하는 신체 기관을 무엇이라 했나?




  

2) 주님이 만들어 걸으셨던 곧은길을 가기 위해 주님도 포기하셔야 했던 길은?
⓵ 요한복음 6:45-46절을 중심으로 설명해 보자.

⓶ 포기하신 뒤에 주님이 선택하신 길은?  

3) 적용하기
⓵ 나는 곧은길을 걷고 있는가? 편안한 길을 걷고 있는가? 

⓶ 마크 부캐넌 목사의 일갈처럼 나의 최고의 관심사는?

⓷ 내가 곧은길을 걷기 위해 노력해야 할 가장 시급한 것은?
  

 
사역하기 (WORK)
셀 예배 순서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2022년 피선교지 중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사역 내용

1. 추수감사주일에 실시되는 전 교우 재회의 날 사역을 위해 (2주차 사역을 위해)
2. 11월 17일 실시되는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들을 위해
3. 2022년 후반기 특별새벽기도회를 위하여
4. 환우들의 회복을 위해
5. 담임목사의 목양을 위해
  

 
설교요약 (SUMMARY)
  오늘 본문을 곱씹으며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브리서 저자가 이렇게 독자들에게 전한 본문 정황을 먼저 살펴보십시다. 본문은 히브리서 저자의 독창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12절의 出典은 이사야 35:3절이고, 13절은 잠언 4:26절이기 때문입니다. 두 개의 구약 성경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사야 35:3절입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잠언 4:26절입니다. “네 발이 행할 길을 평탄하게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이 구약성경을 인용한 히브리서 저자는 12:1절에서 표현한 그대로 성도는 믿음의 경주를 하는 자들인데, 그 경주하는 자가 꾸불꾸불한 길을 뛰어서야 좋은 성적을 거두겠느냐는 부가의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그런 경주를 하는 선수는 결코 이길 수 없음을 본문에서 강하게 역설한 셈입니다.

  천로역정의 길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올바르게 펴서 뛰고 걸어야 하며, 만에 하나 다리를 저는 일이 있으면 그 다리도 고치고, 더불어 뛰기 좋은 곧은길을 반드시 만들어 뛰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경주하는 자가 승리하기 위해 전제로 해야 하는 곧은길이 무엇인지는 다음 주일에 교우들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주일에 교우들과 심도 있게 나누려고 하는 것은 길을 만들기 위한 당위(當爲)입니다.

※ 곧은길을 만들려면 편안한 길 만들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6:45-46절을 귀담아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이 구절은 예수께서 벳세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이후, 제자들에게 내리신 후속 담화입니다. 두 단어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재촉하사’와 ‘작별하신’이라는 단어입니다. 전자는 제자들에게 내리신 추상같은 명령이었고, 후자는 본인에게 던진 채찍입니다. 오병이어의 축제가 끝이 나자 주님을 제외한 모든 벳세다 빈들에 있었던 사람들은 사뭇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들었습니다. 이 흥분은 주님의 제자들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벳세다의 분위기는 정치적인 일변도로 흘러가는 추세였습니다.

    어떤 정치적인 면이었을까요? 이 대목을 요한복음 6:15절에 기록되어 있는 오병이어 축제의 병행구절이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벳세다 빈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엄청난 영향력을 제시하신 예수님의 행보는 이제 결과론적으로 유대 백성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되는 막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벳세다의 빈들에 모여든 사람들의 상당수는 예수께서 주변 지역에서 행하셨던 수많은 기적의 모습을 눈으로 본 사람들과 또 그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주 자연스럽게 그들은 주님이 구약에서 예언한 정치적인 메시아일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던 바 오병이어의 기적을 눈으로 보면서 그들은 확신하기에 이릅니다. 이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옹립하게 되면 지긋지긋한 정치적인 노예의 굴레에서 해방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 차서 주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주님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강제적인 움직임들이 있었음을 요한이 보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그래서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다음의 단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  '억지로 붙들어' 여기에 억지로 '붙들다.'의 의미로 번역된 헬라어 '할파조‘는 그냥 붙드는 것이 아니라 '탐욕을 가지고 붙들다'는 의미입니다. 목적을 갖고 붙드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벳세다의 사람들의 의도가 불순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제자들의 태도입니다. 주님을 정치적인 메시아로 여기고 강제적으로 왕으로 옹립하려는 벳세다 민초들의 태도에 대하여 제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소개한 마가복음 6:45절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주님은 제자들을 종용하였습니다. 오병이어의 축제로 인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예수님의 인기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고 있는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의 기쁨을 누리고 있었던 벳세다의 빈들에 거하고 있던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이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 벳세다로 가라고 명령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명령의 강도는 아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더 솔직한 말로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있으면 예수님이 왕으로 추대될 것이고 왕으로 추대되는 주님으로 인하여 적어도 제자들 역시 내각에 각료 정도로는 임명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모를 리가 없습니다. 정치적인 출세의 가도를 달릴 수 있다고 믿으면서 벳세다에 머물러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그 벳세다를 떠날 것을 강력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단어의 함축적인 단어가 '재촉하사'입니다. 원어 성경에 기록된 '재촉하사'의 번역인 '아낭카조‘는 '강제로 무엇인가를 하도록 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적용하여 해석한다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곳을 억지로 떠나도록 강요하셨다는 말입니다. 벳세다에서 빠르게 떠날 것을 강제하신 것입니다.

    또 하나의 단어에 집중해 보십시다. 제자들에게만 벳세다를 떠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더 적극적인 자세로 벳세다와 작별하셨습니다. ‘작별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탓소마이’는 어떤 그룹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것’,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영어성경 NLT 번역이 정말로 통쾌합니다. “After telling everyone good-bye” “모든 사람들과 ‘good-bye’라고 말씀하신 뒤에” 주님이 결별하신 것에는 예외가 없었습니다. 조금의 여지를 남겨두시지 않았음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주님은 당신이 걸어야하는 올곧은 길을 만들어내기 위해 편안한 길을 포기하신 것입니다. 편안한 길도 가고 올곧은 길도 가는 방법은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의 길은 포기해야 합니다. 주님이 벳세다를 포기하시고 가신 곳을 주목하십시오.

  주님은 산으로 홀로 가셨습니다. 이후 주님은 벳세다 건너편인 게네사렛으로 건너온 제자들과 합류하셔서 그곳에 있는 민초들을 돌보셨습니다. 마가복음 6:53-56절은 독자들인 우리에게 숙연한 감동을 줍니다.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째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주님은 화려했던 벳세다의 길을 포기하셨습니다. 동시에 산으로 올라가셔서 외롭게 홀로 기도하신 뒤에 게네사렛으로 내려오셔서 다시 아픔을 당하고 있는 자들과 함께 하시며 그들을 치료하시는 사역을 지속하셨습니다. 결국 편안하지 않은 길을 만들어내신 것입니다.

    마크 뷰캐넌의 일침이 폐부를 찌릅니다. “안전한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안전한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안전하지 않은 하나님은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덩달아 좋아하시지도,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덩달아 싫어하시지도 않는다.”(마크 뷰캐넌, “열렬함”, 84.) 하나님이 이러신데 어찌 그리스도인들이 편안한 길을 사수한단 말입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를 하면서 안전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목회를 해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쓴 소리도 해야 하는 경우, 부족하지만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보수화되려는 경향이 있다는 심리학자들의 지론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나름 몸부림치며 사역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 또한 인간인지라 나이가 더 들어가면서 하나님은 안전하지 않으신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편안한 길을 만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이제는 편안하지 않은 것이 불편해 보여 가급적이면 부딪치지 않으려는 상업적인 마인드로 바뀌어 가는 것을 느낄 때 섬뜩해져 마음을 다잡이하곤 합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마크 부캐넌 목사가 동일한 책에서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에 최대의 관심을 갖고 계신다. 우리 심령이 집중하는 것, 저 깊은 곳에서 우리를 동요시키는 것, 우리를 절정에 이르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계신다. 우리는 지금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가?”(마크 뷰캐넌, “열렬함”, 81.)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을 해야 하는 것이 목사의 사명이라고 믿었기에 그의 글에 밑줄을 긋고 새겨왔습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최근 이태원에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은 무언가를 말할 때가 아니라 자중하고 침묵하며 유명을 달리한 우리의 아들딸들을 위해 아파하고 우는 자와 함께 하라고 말한 바울의 권면대로 함께 울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소리를 죽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아닌 것을 자꾸만 인정하라는 작금의 사태에 맞물려 종용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기가 쉽지 않아 목사로서 저항하기로 했던 일이 있어 소개하고 설교를 맺겠습니다. 애도 기간의 어간, 한 젊은 드라마 작가 겸 소설가가 날린 일침이 일간 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기사는 침묵해야 하겠다는 목사의 비겁한 양심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 젊은 소설가가 본인의 SNS(인스타그램)에서 이런 쓴 소리를 날렸습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젊음을 즐기는 것이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도 꼰대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게 왜 거길 가?'앞뒤 꽉 막힌 소리를 내뱉는다. 2002년 꼰대들 당신의 젊음은 어땠나. 수천 만 명이 거리에 나왔던 시절에 거리에서 시원한 맥주를 즐기며 월드컵을 응원했던 당신들이 꼰대들이지 않나? 거리를 나간 것이 잘못이 아니다. 꼰대들의 주둥이는 훈수랍시고 떠들지 말길 바란다.”

      오래 전, 길벗이자 글벗인 동역자 선배 목사의 글에 인용된 송기숙 선생의 『마을, 그 아름다운 공화국』에 소개된 다섯 부류를 소개받고 무릎을 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동네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동네 어른, 늘 말썽만 부리거나 버릇없는 후레자식, 일삼아서 이 집, 저 집으로 말을 물어 나르는 입이 잰 여자, 틈만 있으면 우스갯소리로 사람들을 웃기는 익살꾼, 좀 모자란 半偏이라 몸이 부실한 장애인’ (김기석,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 청림출판, 54.)

후레자식은 무슨 말을 해도 용인되어야 하고, 동네에서 존경받은 어른은 존재하지 말아야 함을 강요받는 시대야 말로 진짜 말세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나도 이유 없이 죽어간 이들에 대해 비난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의 총체가 영적 랜덤이라는 집단적 광기라고 해석하는 다름에 대해 입 닥치라고 말하는 후레자식들의 버릇없음에 분노한다. 완전히 자기 신념이 우상화된 자들 때문에 나는 그냥 운다. 목사가 딱히 할 다른 시위(Demonstration)가 없기에 그렇다. 그렇게 아작 난 마비된 인격과 무슨 대화가 필요할까 싶어서다. 이래저래 작금의 대한민국 광장과 거리는 울음바다다. 그런데… 아모스가 말한 이 선언에 오금이 저려온다.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울음바다 한 복판으로 지나가시는 하나님, 그래서 나는 또 운다. 뜨겁고 뜨거운 서늘함 때문에.”

    나는 이 글을 쓰면서 후레질 하는 버릇없는 이들에게 끝까지 훈수질 하는 꼰대로 남기로 결심했습니다.  나의 주군은 대중적인 인기영합주의에 빠지지 않으셨습니다. 안전한 산헤드린 공회와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편안했던 벳세다에서 올곧은 게네사렛으로 옮기셨습니다. 너무 어렵고 힘든 길을 만들어내신 뒤에 그 길을 가셨기에 주님은 이렇게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요한복음 14: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유대인 철학자 아브라함 죠수아 헤셀의 말로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이 그 분을 바로 인식하지 못한다니 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인가!”(아브라함 죠수아 헤셀, “누가 사람인가”, 144)
    사랑하는 세인 교회 교우 여러분 사탄은 올곧은 길을 만드는 것에 대해 신경질적으로 반응합니다. 올곧은 길을 만들어 걸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반면 편안한 길을 가려는 자에게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박수를 쳐줍니다. 그 길에 서 있는 자는 하나님의 형상에 눈감고 있기에 막 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올곧은 길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저는 다리로 천로역정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찬양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