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2년 7월 3일 (첫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32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누군가에게 비교를 당하는 불쾌한 경험이 있습니까?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93장: 예수는 나의 힘이요
●  복음성가 – 아침 안개 눈 앞 가리듯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예수 그리스도는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본문 : 히브리서 10:1-20
1) 설교에서 분석된 옛 언약의 무능함을 4가지로 말해보자.
⓵                                                ⓶
⓷                                                ⓸  

2) 옛 언약의 무능함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대안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4가지로 정리해 보자.
⓵                                                ⓶
⓷                                                ⓸  

3) 적용하기
예수 그리스도를 누군가와 그 무엇과 비교한 일이 있으면 돌이키고 회개하자.  

 
사역하기 (WORK)

이번 주간 사역

1) 공 예배 출석 최선 다하기
2) 수요 예배 설교 피드백 카톡으로 남기기
(셀 원들이 피드백은 리더가 받기 바람
3) 펜데믹 기간 동안 무너진 셀 지체들의 이름을 부르며 중보하기
4) 중보 제목 기도하기




셀 사역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2022년 피선교지 중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설교요약 (SUMMARY)
2022년 7월 3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성령강림주일 이후 네 번째 설교)
본문: 히브리서 10:1-20        제목: 예수 그리스도는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의 총 주제는 그 어떤 피조물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과는 그 어떤 존재도 비교할 수 없는 비교불가를 선언한 책입니다. 본문이 바로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1-4절을 보겠습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한 선 이해를 이미 8-9장에서 소상히 살펴보았습니다. 8-9장에 대한 요약이 1-4절에 담겨 있기에 다시 한 번 옛 언약 제사에 대한 그 한계성을 집어주는 텍스트입니다. 히브리서 전문가인 김성목 박사는 1-4절에 대한 신학적 함의를 아주 명확하게 요점 정리를 해 놓았는데 명쾌했습니다. 김 박사는 1-4절을 옛 언약 제사의 무능성이라고 제목을 달고 4가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김성목, “히브리서의 기독론”, CLC, 386-389.)
⓵ 반복적인 희생 제사다. 본문 1절 중반절입니다.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⓶ 온전함을 제공할 수 없는 희생제사다. 1절 하반절입니다.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⓷ 죄를 기억하게 하는 제사다. 3절입니다.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⓸ 진정한 속죄를 실현할 수 없는 희생동물을 소개한다. 본문 4절입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아론의 레위 지파 제사장들이 드려오던 구약의 제사법이 이렇게 무능하고 완전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불완전한 제사법에 종지부를 찍기로 결심하셨습니다. 그 결심의 결과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드리신 십자가의 희생 제사였습니다.

5-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이 구절은 구약성경 시편 40:6-8절 말씀의 인용입니다. 먼저 시편 시인의 고백을 참고해 보십시다.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인이 먼저 고백한 이 구절을 왜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했을까요? 8절에는 대단히 주목할 만한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시인은 주의 뜻을 받들어 행하는 것을 즐긴다고 고백했습니다. ‘즐긴다’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하페쯔’는 원래의 의미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마음이 굳혀진 상태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시인이 고백한 ‘하페쯔’를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를 통해 이렇게 부연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십자가라는 희생을 짊어지는 것에 대해 이미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는 해석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는 완전한 희생 제사에 대해 쉽지는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흔쾌히 감당하셨다고 해석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희생제사의 제물이 되시는 것을 흔쾌히 감당하셨을까요? 김성목 박사가 지적한 4가지 옛 언약에 대한 그 반대의 의미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하늘성소에 들어가셔서 당신의 몸을 드리신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옛 언약의 불완전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습니다.
Ⓐ 반복적인 희생 제사가 아니라 주님이 몸을 드린 희생 제사는 단 한 번의 제사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10절은 이렇게 보고합니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14절도 이를 증명합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 온전함을 제공할 수 있는 희생제사가 바로 예수님의 몸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2-14절을 봅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게 하는 제사였습니다. 17-18절을 읽겠습니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 진정한 속죄를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제물이 주님의 몸이었습니다. 본문 19-20절을 나눕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교우들에게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증언한 이 메시지를 자세히 부연 설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국소적인 문자적 의미로 말한다면 예수님의 제물 되심과 옛 언약에서 실시되던 동물의 피로 드렸던 제물과는 비교가 안 되는 일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가 이렇게 협의(狹義)의 의미이겠습니까? 본문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강력한 메시지는 단순히 구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제물의 우월성 정도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정말 히브리서 저자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는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비교 불가는 상대가 있을 때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 본문에 있는 메시지를 옛 언약의 제물과 예수님의 제물 되심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단 말입니까? 주님은 비교 상대가 없습니다. 아니 없어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 설교를 통해 잠시 언급했지만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세 번에 걸쳐 하나님이 주신 미션인 애굽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라는 명령을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수용하지 않으려고 모세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나는 이스라엘을 구원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손 사레를 치면서 하나님께 질문했던 첫 번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3:13절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바로에게 말할 자신이 없다는 맥 풀린 반응이었습니다. 믿음이라고는 1도 없는 회피요 궁색한 자기 합리화였습니다. 이것을 알고 계셨던 하나님이 모세에게 알려주신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었습니까? 이어지는 출애굽기 2:14절은 보고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모세에게 일러주신 하나님의 정체성이 무엇이었습니까? 가장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는 해석은 ‘나는 나다.’ (I AM THAT I AM.)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해석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소개한 내용에 동의하면서 또 하나, 한 발 더 나아간 해석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미국 루터신학대학교 구약학 교수인 T,E 프레다임은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예흐예 아쉐르 예흐예(나는 스스로 있는 자)는 내가 보기에는 이 번역이 제일 적합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는 있는 자로 있을 것이다/나는 있을 자이다’(I will be who I am/I am who I will be.)” (프레다임, “현대성서주석-출애굽기”, 한국장로교출판사, 114.)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해 계셨고, 계시는 분을 뛰어 넘어 앞으로도 계속 존재하실 하나님이라는 것을 제시하는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왜 프레다임 교수의 글을 교우들에게 인용했습니까? 주님이 정체성이 이러신데 더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를 되묻고 싶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누구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탐구를 해도 누구인지를 완벽히 알 수 없는 그냥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영원한 속죄를 위해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신 주님이심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고백하며 서야 합니다. 주님은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님 되심 이 한 가지로 충분하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변화산상에 올라가시는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베드로는 변화산상에서 광채가 나며 빨래가 필요 없을 만큼 순백으로 변형되신 주님을 보고 황홀경에 빠져 엘리야와 모세와 주님을 위한 초막 셋을 짓겠다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흥분되어 고백할 때 구름이 몰려와 주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감추어 버립니다. 이후 결과를 마가는 9:7-8절에서 이렇게 보고합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보이는 것은 ‘오직 예수’뿐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볼 때 김샌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이 주는 영적 시사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적 황홀경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정녕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입니다. 오직 예수만 보이는 것은 편협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만 보이는 것은 은혜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지금 그대는 무엇으로 만족을 채우고 있습니까?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근래 주례가 없는 결혼식이 이제는 상식이 되었습니다. 몇 주 전, 결혼식을 올린 처조카도 주례가 없는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성혼선언문을 사회자가 발표하고, 혼인 서약은 신랑 신부가 직접 작성한 글을 읽었습니다. 작년 친가 조카의 결혼식도 매일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례도 하나의 사역으로 여기며 감당하던 목사의 눈에는 주례 없는 결혼이 곱게 보일 리 없습니다. 처조카 부부가 모든 촬영을 마치고 식당으로 하객들에게 인사하러 올라왔습니다. 하객이 많아 인사를 하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조카부부가 제게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자리에 앉으라고 권한 뒤 머리를 숙이게 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 머리에 차례로 손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공히 두 사람에게 이렇게 강복하며 안수했습니다. “하나님, 아들과 딸이 부부로 출발하는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옵소서. 언제나 주님이 두 사람의 심장 안에 거하여 주옵소서.” 기도를 마쳤는데 조카 부부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혼식의 화려함, 하객들의 박수와 축하 함성, 학교 선배인 성악가가 부른 결점 없는 축가가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조카 부부에게 이것만이 그들에게 복을 주는 통로라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날, 안수기도를 하면 저들에게 제가 선포한 내용이 없다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이 두 사람의 심장 안에 거하여 주옵소서.” 언젠가 친구 목사가 제게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 목사, 주례가 없는 교우 자녀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니?” 친구에게 단호하게 답했습니다. “아니, 참석하지 않아! 가면 기쁘지 않고 아프거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이 없으면 다 있어도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계시면 하나도 없는 것 같아도 다 있는 것이기에 말입니다. 여러분은 주님 한분이면 됩니까? 정말 주님이면 됩니까? 주님은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