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살면서 혼자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 제일 많이 의지하는 대상은? 나에게 중보자는 누구인가? | 경배와 찬양 (WORSHOP)● 찬송가 28장 – 복의 근원 강림하사 ● 복음성가 – 내 인생 여정 끝내어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메시테스 본문 : 히브리서 9:15-22 1) 본문 22절에 기록된 ‘피’에 대한 두 가지 의미를 나누어보자. ① 전반절: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서 정결하게 되나니 ⓶ 후반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
2) ‘메시테스’ 즉 ‘중보자’이신 예수께서 죽으신 이유를 15절에서 찾아보자. 15절 묵상 ⓵ 첫 언약의 불완전성을 극복 ⓶ 우리들이 얻게 된 기업의 정체성 |
3) 적용하기 ① 요한일서 2:1-2, 로마서 8:26절의 실례들을 간증해 보자. ⓶ 나는 누군가를 위한 중보자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 사역하기 (WORK)이번 주간 사역
1) 담임목사 부재 기간 공 예배 출석 최선 다하기 2) 수요 예배 설교 피드백 카톡으로 남기기 3) 펜데믹 기간 동안 무너진 셀 지체들의 이름을 부르며 중보하기 4) 교회 대청소 솔선수범하여 참여하기 독려 (대청소 일시: 6월 25일 토요일) 5) 담임목사를 위해 기도하기
셀 사역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2022년 피선교지 중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 설교요약 (SUMMARY)2022년 6월 12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성령강림주일 이후 첫 번째 설교) 본문: 히브리서 9:15-22 제목: 메시테스
본문 15절을 읽겠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현대인의 성경 번역 버전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새 계약의 중재자가 되셨습니다. 이것은 첫 계약 아래서 범한 죄를 속죄하시려고 죽으셔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약속한 영원한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재자라고 설명합니다.
15절을 시작하는 단어가 인과관계 접속사 ‘디아 투토’ 즉 ‘그러므로’입니다. 예수께서 중재자라고 지칭된 원인이 있습니다. 11-14절에서 살핀 대로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 오셔서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심으로 매년 행하여야 했던 속죄 제사를 연속해서 드리지 않아도 되는 영원한 속죄라는 대업을 이루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었던 담을 단번에 허물어 주신 분이었습니다. 12절은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후에 보게 될 히브리서 10:17-18절은 12절을 재 확인해 주는 복음입니다.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이 엄청난 은혜를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은혜의 위업을 이루신 예수님을 향하여 대단히 중요한 단어로 호칭합니다. ‘메시테스’ 즉 ‘중보자’라고 호칭했습니다. 주님이 중보자가 되었다는 것은 첫 언약 이후에 탄생한 우리들에게 복음 중의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 차례 말씀드렸던 것처럼 첫 언약은 완전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제정하신 언약은 무흠하지 않았던 불완전한 언약이었습니다.
8:7절을 복기해 볼까요?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예수께서 행하셨던 십자가 대속은 바로 둘째 것이었습니다. 둘째 언약은 완벽한 것이자, 0.1%의 흠도 없는 퍼펙트한 언약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으로 완성시킨 언약입니다. 이 언약의 정수를 저는 오늘 본문 22절이라고 적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하는 단어가 ‘거의’라는 부사입니다. 양용의 교수는 ‘거의’라는 부사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거의 모든 것은 피가 정결을 위한 주요한 수단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수단이 아니라는 점을 시사해 준다.” (양용의, “히브리서를 어떻게 읽을까?”, 성서유니온,p,240.) 왜 피가 완벽하게 정결을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고 하지 않고 ‘거의 모든’이라고 불완전한 여백의 단어를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했을까요? 답을 말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전자의 피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모세와 맺은 첫 언약에서 인용된 동물의 피입니다. 우리는 이 설명 이해를 위해 다시 출애굽기 24:6-8절을 복기해야 합니다. “모세가 피를 가지고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오늘 본문 19-21절도 출애굽기 24:6-8절을 지지해 줍니다.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두루마리와 온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또한 이와 같이 피를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첫 언약이 제정된 시대에 동물의 피를 뿌린 것은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선민 공동체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상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민 공동체의 죄를 용서하시는 유일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거의 모든’이라는 히브리서 저자의 표현은 시의적절한 표현입니다.
허나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본문 22절 후반절에 대한 질문입니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이 단문은 전반절에 비해 조금의 빈틈이나 여백이 없어 보입니다. 그냥 문장 하나로 완벽한 결론을 맺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피흘림의 완벽성입니다. 다른 방법은 없어 보입니다. ‘거의 모든’이라는 표현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피흘림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습니다. 도대체 후반절이 피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단호해졌습니까? 이 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입니다. 이 피는 동물의 피처럼 불완전한 피가 아닙니다. ‘사함’(아페시스)을 불러 오는 정결의 피입니다. 주께서 흘리신 이 피는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며 인간이 쌓아올린 담을 허무는 능력입니다. 그러기에 이 피를 흘리신 주님은 오늘 설교 제목 그대로 ’메시테스‘ 즉 ’중보자‘가 되시는 가장 우월하신 존재인 것입니다. 이 해석을 전제로 다시 15절을 강조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신 대속의 의미를 본문 16-17절에서 아주 효과적인 언어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피흘리심의 압권은 그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그 분의 피는 효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피흘리신 대속의 은총들이 모든 인류에게 공급된 것입니다. 재론할 것은 ’거의 모든 자‘라는 한계가 아니라 주님이 죽으심으로 이제는 단 한 사람의 예외없는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에 해당되는 수여자가 되었음을 본문 저자가 강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 내 인생 여정에 임한 가장 위대한 복은 주님의 나의 ’메시테스‘(중보자)되심입니다.
제가 거듭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첫 걸음을 띠었을 때 이전에는 그냥 건조하게 불렀던 이 찬양이 얼마나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왔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다시 울컥하게 됩니다.
내 인생 여정 끝내어/강 건너 언덕 이를 때/하늘 문 향해 말하리/예수 인도하셨네 이 가시밭길 인생을/허덕이면서 갈 때에/시험과 환란 많으나/예수 인도하시네. 내 밟은 발걸음마다/주 예수 보살피시사/승리의 개가 부르며/주를 찬송하리라
후렴) 매일 발걸음마다/예수 인도하시네/나의 무거운 죄 짐을 모두 벗고 하는 말/예수 인도하셨네.
누가 이 찬양을 영혼이 담긴 찬양으로 부를 수 있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인생 여정의 중보자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자만이 진정성을 갖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 확신을 갖고 있었던 요한은 그래서 요한일서 2:1-2절에서 이렇게 담대하게 선언했던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로마서 8:26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에서 그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감격적인 언어들을 동원하여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기다리다가 지치는 순간에, 하나님의 영이 바로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어떻게 또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기도를 하십니다. 할 말을 잃어버린 우리의 탄식, 우리의 아픈 신음소리를 기도로 만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메시지 번역 8:26) 할 말을 잊게 하는 감동의 번역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이토록 엄청난 은혜로 무장하셔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우리의 기도를 해 주시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제 2위의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먼저 저와 여러분을 위한 대언자이시자 중보자의 사역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대신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제 삼위의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지속적인 은혜를 공급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몇 주 전, 권순미 권사로부터 친정 오빠를 위한 중보 요청을 받았습니다. 지난 주간, 장희진 집사로부터 친정 아버지의 수술을 앞두고 중보 요청을 받았습니다. 또 며칠 전, 권미숙 집사에게 시댁 식구들의 어려운 상황을 제목으로 한 중보 요청을 받았습니다. 목회 현장은 한시도 긴장을 놓을 수 없는 영적 전쟁터이자 정글입니다. 중보 요청을 받고 세밀하게 중보했습니다. 교우들에게 여러 차례 소개한 한희철 목사가 오래 전에 기록한 소박한 산문에서 이런 문장을 만나 소리 죽여 흐느낀 적이 있습니다. 洛書(1) “형도 울고 싶을 때가 있어?/응/언제?/아무 때나/형은 언제나 웃었잖아?/응/근데 언제 울고 싶단 말야?/세 번 웃기 위해 두 번은 울었어.” (한희철, “내가 선 이곳은”, 소망사, p,11.) 저는 이것을 믿고 목회의 현장에서 살았습니다. “목사가 강단에서 한 번 울면서 기도하면 교우들의 현장이 울음의 현장에서 웃음의 현장으로 바뀐다. 목사가 강단에서 두 번 울면, 성도가 두 번 울 것을 한 번으로 줄일 수 있다.” 한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의 기도도 교우들에 적지 않은 힘이 되고 위력이 되며, 무기가 됩니다. 하물며 오늘 본문에서 말한 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와 여러분을 위해 피흘려 죽으심으로 인한 최고의 중보자가 되어 주셨는데 이 어찌 우리들이 잊을 수 있는 가벼운 일이겠습니까? 레마로 말씀드린 대로 내 인생 여정에 임한 가장 위대한 복은 주님이 나의 ’메시테스‘(중보자)되심임을 기억하고 주님께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범죄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이 대노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2:9-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 개인에게는 대단히 큰 영광이었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에게는 재앙 그 자체의 메시지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 곧바로 엎드려 이렇게 중보합니다. 출애굽기 32:31-32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생명을 건 모세의 중보 기도로 이스라엘은 멸문지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한 메시테스였습니다. 모세가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한 메시테스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와 당신을 위해 여전히 중보자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은혜 안에서 이탈하지 않기를 바라며 나 또한 모세처럼 작은 ’메시테스‘가 되기를 결단하는 사랑하는 세인 교우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