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2년 4월 10일 (둘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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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약 (SUMMARY)
2022년 4월 10일 주일 설교 (고난주일 설교)
본문: 누가복음 23:34            제목: 가상칠언 중 일언(一言)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일체의 대중들을 보며 중보 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립니다. 주님은 본문에 기록한 기도에서 ‘저들(아우토스)’이라는 불특정 다수를 말할 때 쓰는 대명사를 사용합니다. ‘저들’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를 장로교신학대학교의 김호경 교수는 이렇게 해제합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로 설명될 뿐,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불분명하다. 따라서 저들을 예수의 죽음에 관여한 모든 사람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김호경, “연세신학백주년 기념 주석-누가복음”, p,494.) 예수의 죽음에 관여한 자가 누구일까요? 유대 종교라는 강력한 권좌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던 제사장 가야바, 안나스일 수 있습니다. 무소불위의 막강한 종교 권력으로 부를 차지하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의 71명의 종교주의자들일 수 있습니다. 가뜩이나 종교적인 면에서 골치 아파하는 상황인데 자기들의 종교적인 헤게모니 싸움에 신경 쓰지 않겠다고 혀를 내두르는 로마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를 비롯한 기득권 정치세력일 수 있습니다. 오로지 자기들에게 할당된 필드에 손해를 끼치지 않으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긴 분봉 왕 헤롯의 일당일 수도 있습니다. 불과 5일 전에 로마라는 압제하에서 우리 유대를 완전히 독립시킬 정치적인 메시아로 알고 무화과나무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며 구원해 달라고 외쳤건만 기득권 종교와 로마 정치 집단에 무기력하게 무너진 힘없는 나사렛 촌뜨기가 예수라고 생각하여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예루살렘의 무리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과 함께 죽을 것입니다. 주님에게 어떤 불이익이나 해가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누구도 예외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현장에서 도망간 제자들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언급하면 왠지 위로됩니다. 나에게 소급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오늘 나는 열거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던 무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입니까? 그래서 위로를 받습니까? 찬송가 147장을 알고 있습니까? 아프리카에서 영문도 모르게 영국, 미국으로 끌려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한 채로 고통을 당하던 흑인들이 영혼의 아픔을 전제하며 부른 흑인영가 찬송가입니다. 1-4절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1.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님 그 십자가에 달릴 때
2.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님 그 나무 위에 달릴 때
3.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해가 그 밝은 빛을 잃을 때
4.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님 그 무덤 속에 뉘일 때
그런데 이 찬송의 후렴구가 의미심장합니다.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이 가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이 그 십자가에 달렸는데, 주님이 그 나무 위에 달렸는데, 해가 그 밝은 빛을 잃었는데, 주님이 그 무덤 속에 누우셨는데. 누구 때문입니까? 앞에서 열거한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면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사람들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사셨던 시공간을 뛰어넘어 살고 있는 우리이지만 찬송가 가사의 후렴구처럼 전혀 떨리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저들’에 해당하는 존재들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대속의 피를 흘려주신 것이 나하고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며 무감각하게 사는 자라면 나도 ‘저들’입니다. 그런 나를 바라보면서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일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구절에 대하여 약간의 주석 작업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이 보는 성경 관주를 보면 이렇게 기록한 성경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34절의 기록 중에 ‘예수께서 이르시되’라는 번역 앞에 반 괄호 문자로 1)이라고 쓴 뒤에 이렇게 관주를 달아놓았을 것입니다.
“1) 어떤 사본에는 ‘예수께서’부터 ‘하시더라’까지 없음.”
이런 사족을 달아놓은 것은 시내산 사본과 같은 오래된 사본에 34절에 소개된 예수님의 일성이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들이 너무 잘 아는 사도행전 7:60절에서 스데반 집사가 드렸던 기도가 동일하다는 것을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주지하다시피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저술한 저자입니다. 결국 누가는 적절한 필요가 있어 오늘 본문과 사도행전 7:60절에 공히 같이 나오는 기도를 직접 만들어 삽입했다고 학자들이 주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 하셨다는 십자가상에서의 일성은 주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 누가의 창작품이라고 주장하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미국 에모리 대학교 프레드 크레독 교수의 해제를 소개하겠습니다. “누가는 십자가 처형에 있어서 유대인들과 로마인들을 포괄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저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만약에 ‘저희’가 그처럼 포괄적이라면 그 ‘저희’는 용서와 원수 사랑에 대한 예수의 교훈을 이미 선포하신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을 것이 분명하다.” (프레드 B, 크레독, “현대성서주석”, 한국장로교출판사, p,342.) 무슨 말입니까? ‘저희’라는 대명사의 언급을 주님이 직접 하신 것이기에 본문의 일성 역시 누가의 창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일성이자 외침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신 일성을 통해 고난주일에 받아들여야 할 은혜를 교훈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 주님이 선언한 일성에 오늘을 사는 나는 여전히 해당되는 사람인가에 대해 답해야 합니다.

본문을 한 번만 더 살피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본문 전반절에 기록된 주님의 일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사가 후반절에 삽입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주님이 언급하신 ‘저들’이 ‘그들’입니다. 지금 저들(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들입니다. 옷을 나눠 가졌다는 기록은 시편 22:18절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그러나 살펴볼 메시지는 단순히 구약 시편의 성취로만 국한한 것일까에 대한 재고입니다. 한발만 더 나아 가십시다.
옷이 무엇입니까? 설교자인 저는 이렇게 해석하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영적인 무감각의 대명사라고. 영국 브리스톨 대학의 신약학 존 놀랜드 교수는 제비뽑는 군사들의 상황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대비되고 있는 것은 자신을 처형한 자들에 대한 예수의 관심과 예수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이다. (존 놀랜드, ”WBC 주석-누가복음 하“,p,499.) 제비뽑는 자들은 예수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영적 무감각으로 무장한 일련의 무리를 의미하는 대명사입니다. 지금 주님은 옷을 나눠 갖고 있는 자들을 위해 몸을 찢기고 계십니다. 옷을 제비뽑아 나누고 있는 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몸을 던지셨습니다. 하지만 정작 대속의 은혜 대상자들은 주님의 옷을 찢어 나누어 갖습니다. 무섭도록 서늘한 영적인 무감각입니다. 주군께서 나를 용서하고 계시는데 그것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냐는 뻣뻣함이 나를 완전히 포위했는데도 조금도 감각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거나 울지 않습니다. 도리어 예수를 통해 얻어지는 이해타산에 골몰합니다.

21세기를 사는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획득할 수 있는 이익과 플러스 요인의 상징어인 옷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지려고 계산합니다. 예수는 나를 위해 몸을 던졌는데 나는 그 예수가 입고 있었던 옷 즉 빈 껍데기인 비본질적인 내용에만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오늘도 주님이 언급하신 자기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바로 그 ‘저들’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1992년 4월 30일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원로 목사님들이 손을 얹어 안수하는 시간에 지금은 소천하신 고 여진헌 목사께서 대표로 목사직을 허락한다는 기도문을 낭독하며 안수할 때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날, 그 시간 세 가지를 하나님께 약속하며 드렸습니다. ⓵ 하나님, 갈라디아서 1:11절 말씀대로 사는 목사가 되겠습니다. ⓶ 하나님, 물질에 굴복하는 목사가 되지 않겠습니다. ⓷ 하나님, 정치하는 목사가 되지 않겠습니다. 이번 주 화요일에 우리 교회 이상민 전도사가 교단 총회에서 안수를 받습니다. 30년 전 목사 안수를 먼저 받은 담임목사가 부목사가 될 전도사에게 선물을 주고 싶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서원하며 약속한 세 가지입니다. 허나 30년이 지난 오늘 중요한 것을 첨가하고 싶습니다. 이 세 가지를 지켜가는 것은 분명히 한 가지가 전제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목회하는 내내 영적 무감각과 싸워야 합니다. 옷가지에 목을 걸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이 내던지신 몸에 집중해야 합니다. 목사와 성도가 목을 걸어야 하는 것은 주님이 입으셨던 옷이 아니라 주님이 보여주셨던 삶이라는 본질입니다. 이 본질을 민감하게 체휼하고 있습니까? 영적인 무감각과 싸우고 있습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신학생 시절에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읽었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금서로 지정하여 매우 불온한 책이라고 평가했기에 블랙리스트에 올린 책이지만 저는 오히려 당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카잔차키스의 풍부한 상상력에 놀라움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작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을 초점으로 삼아 완전히 숨이 끊어지기 직전, 신체적인 쇼크로 기절한 것으로 각색하여 소설가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소설의 후반을 써 내려갑니다. 아마도 이 내용을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제도권 안에 있는 교회에서는 신성모독이라고 재단하여 금서로 지정한 것이 분명합니다. 십자가에서 기절한 예수는 꿈으로 환상을 봅니다. 그 환상에는 천사가 등장하여 예수의 삶이 대단히 아름답고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와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행복한 삶을 사는 장밋빛 청사진을 보여줍니다. 평범하고 행복한 한 남자의 인생으로 예수의 삶이 이어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맡기신 인류 대속을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고 환상이었습니다. 이윽고 시간이 지난 뒤에 예수에게 나타나 아름다운 삶을 보여준 천사는 사탄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예수는 인류 구원의 역사를 방해하려 했던 사탄의 계책을 깨닫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와 구원을 위한 대속의 죽음을 완성하는 것으로 이 작품은 막을 내립니다. 제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말 그대로 뜨악했던 부분이 있습니다. 마지막 엔딩 부분입니다. 행복한 인간의 모습으로 살면서 아버지께서 맡기신 인류 대속의 꿈을 잊고 있었던 예수에게 나타나 던진 가롯 유다의 한 마디가 충격이었습니다. “당신은 부끄러운 인간이죠? 당신이 다윗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인 당신이 이런 꼴이 되었나요! 이 땅에서의 삶이 의미하는 건 빵을 먹어 그것을 날개로 변형시키고, 물을 마셔 그 물로 날개를 만드는 거예요. 이 땅에서의 삶이 의미하는 바는 날개가 돋아나는 과정입니다. 그건 당신이 우리에게 한 이야기에요. 배반자! 그건 내 얘기가 아니라 당신의 얘기에요. 혹시 잃어버리셨을지 모르니까 내가 기억을 일깨워 드리지요.”(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고려원,p,545.) 소설에서 인류 구원이라는 아버지의 계획을 포기하고 지극히 인간적인 행복에 젖어 사는 예수는 배신자로 그려진 것입니다. 이런 무감각으로 살고 있던 예수에게 본질의 사명을 깨우쳐 준 자가 가롯 유다로 각색되었다는 것은 소설이었지만 충격적인 압권이었습니다. 소설의 내용이 이러하기에 기존의 판을 엎은 이 소설을 조직이 곱게 볼 리 만무였던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발칵 뒤집혔고, 그리스 정교회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출교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소설이 모티브가 된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가 전국에서 개봉되었습니다. 당시 각 교단에서 개봉 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내며 싸웠지만 패소하여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는 개봉되었습니다. 저는 원작은 책으로 섭렵하고 내용은 영화를 통해 접하면서 보통의 교회에서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른 생각을 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국교회의 맷집이 이 정도로 약하다면 정말로 큰 문제라는 생각 말입니다. 도리어 반전의 은혜가 제게 임했습니다. 작가의 상상력으로 성경을 비튼 것처럼 보이지만 도리어 저는 이 영화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인류 구원의 파노라마에 민감하게 사역했는지를 은혜로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주님은 십자가에서도 일하셨습니다.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우리는 나를 위해 일하신 주님을 얼마나 민감한 집중력을 갖고 따라가고 있습니까? 오히려 펜데믹을 핑계로 철저하게 옷을 나눠 갖는 부류에 속해 무감각을 빠져 있는 명목적 신자로 굳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철저히 민감하게 감각하십시다. 주님의 그 사랑에 철저히 녹아내리십니다. 오늘 십자가상에서 던지신 주님의 일성이 큰 공명으로 울립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