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2년 2월 27일 (넷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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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요약 (SUMMARY)
2022년 2월 27일 주일 오전 예배 설교 (히브리서 강해 20)
본문: 히브리서 5:11-6:2            제목: 초보운전자이십니까?

본문 12절입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히브리서 저자는 본인의 이 설교문을 읽고 있을 수신자들이 유대인이지만 헬라화 되어 있는 디아스포라 크리스천들임을 감안하면서 매우 유감스러워하며 아쉬워하는 점을 숨기지 않고 지적합니다.

12절 전반부에 기록된 ‘때가 오래되었다’고 말한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히브리서는 주후 60년대 초반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제하였습니다. 주후 60년대라 함은 두 가지 추측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수님 사후 약 30년이 지난 시기라는 점과 사도 바울이 회심하여 제 3차 전도여행을 끝내고 로마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투옥된 시기와 맞물려 있는 시기라는 추측입니다. 그렇다면 특히 이방 사도로 역할을 감당한 바울의 혁혁한 사역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편만하게 증거 된 이후일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첨가할 내용은 수신자가 헬라화 되어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는 것을 전제할 때 이들 모두는 유대 율법에 능통해 있었을 것이라는 예측도 가능하게 합니다. 결국, 이 설교문의 수신자들은 율법과 복음 둘 다에 나름 익숙해져 있는 자들이라는 가설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저자는 때가 이미 오래되었기에 이미 이 설교문을 읽고 있을 수신자들은 선생이 되었어도 벌써 되었을 시기가 지났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에 대해 매우 유감스러워 하고 있음을 피력한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저자는 5:1-10절 텍스트를 통해 멜기세덱을 인용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멜기세덱처럼 대제사장의 신분이셨다고 피력했습니다. 이렇게 멜기세덱을 피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를 읽고 있는 수신자들은 멜기세덱에 대하여 잘 이해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전한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적시합니다. ‘듣는 것이 둔하기 때문이다.’ 듣는 것이 서투른 자들은 당연히 신앙의 초보에 머무를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적절한 비유를 남깁니다. 13-14절입니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흔히 심리학에서 정의하는 단어 중에 ‘어른 아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신체는 어른인데 정신적인 상태가 어린이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는 비정상적인 미성숙의 상태를 의미하는 용어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절에서 이렇게 수신자들이 어른 아이로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씀 듣는 것에 둔하였기 때문이라고 표현했는데, 한 발 더 나아가 13절에서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때문이라고 11절을 지지합니다.

사정이 이러니 율법이라는 초등학문에 머무르고 복음이라는 고등학문으로 나아가는 것을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신앙의 초보자로 굳어져 있음을 히브리서 저자는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의 초보자들은 복음이라는 단단한 음식을 먹고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 제로 상태임을 저자는 역설한 것입니다. 적어도 지금 이 설교문을 읽고 있는 수신자들이라면 단단한 음식을 먹고 잘 소화해서 자기들이 갖고 있는 지각을 사용함으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자리까지 자라나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함에 대해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었던 저자는 본문 6:1-2절에서 이렇게 강하게 역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를 버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를 6가지로 열거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① 죽은 행실을 회개함 ② 하나님께 대한 신앙 ③ 세례들 ④ 안수 ⑤ 죽은 자의 부활 ⑥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
이 여섯 가지는 다음 주에 교우들과 조금 더 세심하게 곱씹으려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해석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개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천로역정의 도로 주행에서 초보운전 딱지를 벗는 방법입니다. 무엇일까요?

※ 말씀 들음에 둔감하지 말고 민감해야 초보딱지를 뗄 수 있습니다.

11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조재천 교수의 주석을 소개합니다. “듣는 데에 둔함은 청력 감퇴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해력과 의지 면에서의 고집을 포함한다. 삶의 지향성에 있어서 잘 반응하지 않는 상태 그것이 곧 둔함이다.” (조재천, “히브리서”, pp,157-158) 조 교수의 이 주석적인 글을 읽다가 절절한 마음의 동의가 제게 임했습니다. 대한민국처럼 성경 번역이 완벽한 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볼 때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된 성경은 지천이고, 주석 성경 역시 넘쳐납니다.

목회자와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을 위한 원어 해석 성경은 다른 나라에 비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수준이 높게 제작되어서 출간되어 있습니다. 어디 이뿐입니까? 신학서적, 신앙서적들은 클릭 한 번 하면 언제든지 내 앞에 도착합니다. 성경 이해를 위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의 도구들은 가히 백화점에 있는 물건들이나 도서관에 있는 책들처럼 즐비합니다. 중세 암흑기의 가톨릭 천하처럼 라틴어를 알지 못하면 무방비로 당하는 시대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평신도들도 목회자나 신학자 못지않은 성경적인 지식을 취득할 수 있는 시대가 바로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2022년입니다. 그런데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 대한 정보와 자료들이 넘쳐나는 천국과도 같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인데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왜 살지 않습니까?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는 자료가 지천에 깔려 있어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읽는데 내 것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무감각으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본문 11절에서 히브리서 저자가 표현한 그대로 적용하자면 말씀 듣기에 둔감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간 목요일 소그룹 모임인 구원 그 이후 반 두 번째 강의의 본문이 공교롭게 오늘 읽은 6:1-2절이었습니다.역시 저자인 박영선 목사는 이 텍스트에서 신앙인의 ‘자의식’이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역설하였습니다. 박 목사는 신앙인이 경계해야 할 독소 중에 하나를 자조적인 신앙인이 되는 것과 망나니 신앙인 되는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성경을 둔감하게 읽으면 이런 괴물들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괴물이고, 후자는 내가 꽤나 잘난 그럴듯한 신앙생활을 감당하는 자라고 착각하는 괴물입니다. 이런 자들의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 것에 둔감하다는 공통점입니다. 해서 듣고 읽은 말씀을 언제나 2인칭, 3인칭화 하고, 결코 1인칭화 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경종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려면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대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따져야 합니다. 어떤 가치가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고 전 인생을 걸어놓고 하나님 앞에 나의 신분, 나의 가치, 내 생애의 의미를 물어야 합니다.” (박영선, “구원 그 이후”, 새순출판사, pp,49-50.) 이런 질문은 누가 할 수 있습니까? 말씀 들음에 민감한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11-12절을 소개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셔서 사명을 주시기에 앞서 예레미야에게 경험하게 하신 한 실례를 소개합니다. 예레미야를 부르신 뒤에 예레미야를 살구나무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신 뒤에 물으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살구나무 가지를 본다고 대답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잘 보았도다 이는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하시니라” 이 구절이 주는 영적 의미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예레미야가 보았던 ‘살구나무’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솨케드’입니다. 의미가 있는 것을 ‘지켜보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히브리어 단어는 ‘솨카드’입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인 은유가 예레미야 1:11-12절에 담겨 있습니다. 살구나무는 겨울을 견디는 나무입니다. 이른 봄에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히브리 문화에서 살구나무는 언제나 깨어 있는 나무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살구나무는 겨울에도 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살구나무에 대한 메타포를 동원하여 나도 네가 나의 말을 잘 실천하고 있는지를 살구나무처럼 지켜보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천명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주군이신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들이 들은 말씀대로 살고 있나 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에 대하여 예민하시다면 우리들이 말씀 듣기에 예민해야 함은 두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 1:3절을 주목하십시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계시록의 이 선언을 묵상할 때마다 섬뜩해지는 경종의 울림으로 다가올 때가 상당히 많습니다. 예언의 말씀은 읽으라고 주어졌습니다. 또 들으라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복을 받은 자들의 연관성이 마지막 단어에서 밝혀졌다는 것은 무게감으로 다가옵니다. 읽는 것으로, 듣는 것으로 완벽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읽고, 예민하게 듣는 자의 결정체는 그 가운데 기록된 것을 지킬 때 완성됨을 선언합니다. 말씀을 예민하게 들었다는 증거는 그 말씀을 1인칭화 하여 지켰는가로 증명됩니다. 

이제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김기석 목사의 글 하나 소개합니다. “나의 묵상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묵상하면 보통은 촛불을 밝혀 놓고 눈을 지그시 감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 자세를 연상하게 마련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그렇게 식물적이지 않다. 묵상은 마치 사자가 먹을 것을 앞에 두고 그르렁 거리면서 냄새를 맡기도 하고, 혀로 맛보기도 하고, 씹기도 하는 것처럼 텍스트와 오감으로 만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묵상은 동물적이다. 묵상의 초고 형태는 어쩌면 그 텍스트를 삼켜서 자기화하는 것, 다시 말해 삶으로 번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김기석,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꽃자리,pp,4-5.) 그렇습니다. 말씀 듣기에 예민한 그리스도인은 읽은 말씀을 철저히 1인칭화 하여 내 삶의 현장에서 번역하여 사는 삶의 주인공들입니다. 이렇게 사는 자만이 신앙의 초보딱지를 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이미 알았던 바울도 그래서 이렇게 에베소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권면한 것입니다.

에베소서 4:13-15절입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말씀 듣기에 최선의 예민함을 추구하여 그 분에게까지 자라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