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22년 2월 6일 (첫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09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름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나누어 보십시다.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495장 – 익은 곡식 거둘 자가
●  복음성가: 주님 보좌로 나아갈 때에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아시죠? 주님
● 본문 : 히브리서 4:14-16
1) 히브리서 저자가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 세 가지와 세 번째 의미를 나누어 보자.
①   

③ 믿는 도리나누어 보자.  

2) 연약함이 있는 내가 그 연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16절에서 찾아보자.
16절 참고   

3) 적용하기
⓵ 당신이 느끼고 체험하는 하나님의 임재는 어떤 경우인가? 
⓶ 예배에서 대체할 수 없는 기름부음을 느끼는가? 느낀다면 언제인가?
③ 압도하시는 하나님의 만지심을 경험하여 연약성을 이기도록 한 목소리로 기도하자.  

 
사역하기 (WORK)


이번 주간 셀 사역

1) 주일 대면 심방에 참여하지 않은 셀 지체 파악
2) 주일 대면 예배에 참석하지 않은 지체 심방하기(전화 심방, 대면 심방)
3) 지역 셀 안에 있는 지체들의 기도제목을 위해 중보하기
4) 특새 광고하고 스케줄 정하기




셀 사역

※ 찬양하기 : 찬송가 부르기
※ 얼음 깨기 나누기
※ 찬양하기 : 복음성가 부르기
※ 예배기도 : 맡은 이
※ 말씀 증거와 문제 내용 나누기
※ 적용하기
※ 기도제목 중보하기 - 2022년 피선교지 중보
※ 헌금 봉헌
※ 헌금 기도: 셀 리더
※ 피선교지 중보하기: 다 같이
※ 폐회 : 주기도문
※ 교제하기


  

 
설교요약 (SUMMARY)
오늘 본문인 4:14부터 5:10절까지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군이신 예수님이 갖고 계신 또 다른 정체성을 히브리서 설교자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본문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주저함 없이, 거침없이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를 세 가지의 정체성으로 정의합니다.
① 큰 대제사장 ② 하나님의 아들 ③ 믿는 도리
이어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우리 믿는 자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제가 오늘 교우들과 함께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세 번째의 정체성인 믿는 도리이신 예수입니다. 믿는 ‘도리’로 번역된 헬라어 ‘호몰로기아’를 바른 성경 번역에서 이렇게 색다르게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계시니, 신앙고백을 굳게 붙잡자.” (바른 성경 번역 히브리서 4:14) 주님은 저와 여러분의 신앙고백 자체이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들의 신앙고백이 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문 15절을 주목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개역 판에서는 15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지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조금 전에 읽어드린 개역개정판은 그래도 나름 보강한 번역이라 위로가 되기는 하지만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다.” ‘동정하다’로 번역된 ‘숨파데싸이’를 적절하게 오늘의 언어로 번역한 ‘메시지’ 번역을 소개합니다. “그 분은 우리의 현실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닙니다.” 왜 우리가 주님을 나의 신앙의 대상자로 고백해야 합니까? 주님은 나의 약함을 아시고 결코 그 약함에 대하여 무관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5절 후반절은 적어도 제게는 엄청난 감동을 준 말씀입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 구절이 주는 위력이 어떤 점입니까? ‘똑같이’입니다. 하와이 옆에 있는 몰로카이 섬을 선교 사역지로 삼은 데미안 신부의 일화는 다시 복기해도 은혜의 절정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 일컬어지는 카라우파파는 지금은 수많은 산악자전거 마니아들의 천국으로 여겨지는 관광 섬으로 유명하지만 이곳은 한때 미국 정부가 한센 병 환자들을 강제로 수용한 악명 높은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데미안 신부가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지만 버림  받은 자라는 상처투성이의 환자들의 마음을 여는 데 실패합니다. 동질감이 없는 이유라는 것을 안 데미안은 하나님께 스스로 한센 병자가 되기를 기도했고, 결국 한센병자가 된 데미안은 환자들의 마음을 열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승리합니다. ‘똑같이’ 당한 연약함이 만들어낸 기적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위로의 말을 전할 때, 가장 속상하고 심지어 화가 나는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상투적인 위로의 말을 전할 때입니다. 반대로 내게 진정한 위로를 주는 메시지는 어떤 경우입니까? 같은 아픔을 경험한 자가 함께 울어주며 안아 줄 때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15절 후반절은 적지 않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다.” (15절 2f)

우리가 5장을 연구할 때 다시 다루겠지만 5:7절은 제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구절 중에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주님도 인성을 갖고 이 땅에 오셨기에 이렇게 치열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이렇게 당신의 연약함을 통해 아픔과 고통을 느끼셨기에 우리들이 당하는 고통과 아픔을 보듬어 주시며 우리들 편이 되어 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 목사의 말대로 주님은 우리들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주군이시자 신앙고백이 되시는 분입니다. 로마서 8:26절을 보십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기에 기록된 ‘연약함’이 오늘 본문 15절에 기록된 단어 ‘아스데네이아’와 같은 단어입니다. 조재천 교수는 ‘아스데네이아’ 즉 ‘연약함’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인간의 실존 혹은 본성을 묘사하는 철학적, 신학적 용어로 ‘연약함’은 심리적 연약함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적이고 총체적인 한계, 약점을 표현한 것이다.” (조재천, “히브리서”, 홍성사,p,106.) 다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본성의 악함과 연약함을 극복할 수 없어 넘어지는 때가 수도 없이 많음을 경험합니다.
중세 위대한 영성가였던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래서 이미 이렇게 경계했습니다. “저의 정욕은 의지보다 강해 제가 내켜하지 않을지라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런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무척이나 힘겹습니다. 저는 저의 약함을 알고 있습니다. 시험이 물러가는 것보다 훨씬 더 쉽게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믿음 있는 영혼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종의 수고와 고통을 살피셔서 이후로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함께 하소서. 하늘의 용기를 내려주셔서 강하게 하시고 주님의 영께 아직 제대로 복종하지 않은 옛사람, 즉 고통스러운 육신과 맞서 싸울 수 있게 하소서.” (토마스 아켐피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브니엘,pp,134-135.)  토마스 아켐피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도 동일한 연약함을 갖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 연약함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절대적인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이런 난처함에 빠져 있는 우리들을 주님이 알고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 15절과 로마서 8:26절이 어찌 감동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감동과 은혜를 받은 자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히브리서 설교자는 이 설교를 읽고 듣고 있는 독자들과 청자들에게 본문 마지막 16절에서 귀한 감동의 메시지를 남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 구절은 주후 60년대 로마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닌 2022년을 살고 있는 우리 세인교회 지체들에게도 엄청난 도전과 교훈을 줍니다. 나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제시합니다. 그냥 침묵하거나 움직이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은혜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나의 연약함을 잘 아시기에 도와주시고, 긍휼을 주시며, 때를 따라 은혜를 주시는 그 감동을 경험하기 위해서 반드시 우리들이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분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머뭇거리게 하며, 확신에서 수없이 흔들리게 하는 사탄의 불화살과 같은 맹렬한 공격을 부숴버릴 수 있는 살아 있는 말씀의 검으로 무장하고 주님의 보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좌로 담대히 나아가는 자가 연약함을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보좌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입니다. 아이든 토저는 모세가 시내 산에 보았던 가시떨기나무 앞에서의 행위를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불을 붙었으되 소멸되지 않은 떨기나무 불꽃을 보았을 때 그는 주저없이 그 떨기나무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그는 떨기나무를 예배한 것이 아니라 그 떨기나무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에 예배한 것입니다.” (아이든 토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짜 예배자”, 생명의 말씀사“, p,160.)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십니까? 그 분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연약하십니까? 나약하십니까? 내 마음대로 내 정욕이 절제가 되지 않습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서 헤어 나올 능력이 없습니까? 그러기에 이 말씀을 더 붙잡으십시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고 최정희 집사께서 하나님의 부름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집에 와서 여러 가지를 정리하는 날, 마침 심방요청이 있어서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소파에 앉기도 불편한 육신이었지만 그날 단어만 달랐지 임종예배를 드려달라고 종을 부른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마지막 기도를 드린 다음, 도무지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더 이상을 견딜 수가 없어서 강지숙 전도사에게 뒷마무리를 도와주라고 지시한 뒤에 차가 파킹되어 있는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서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으며 간신히 차로 돌아왔습니다. 차 안에서 하나님께 한바탕 삿대질을 하며 울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하나님께 대들며 울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항의하는 데 제 귀에 또렷이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공명되었습니다. “정희는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흐르던 눈물을 멈추고 하나님께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딸의 영혼을 주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정답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주님의 전율하게 하시는 임재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또 다른 감동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 여러분! 슬프십니까? 외로우십니까? 흔들리십니까? 담이 너무 높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십시다. 주께서는 저와 여러분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우리를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