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460장: 뜻 없이 무릎 꿇는 ● 복음성가: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 올곧음(1) ● 본문 : 마태복음 4:1-11 1) 첫 번째 시험 ⓵ 첫 번째 시험은 무엇이었으며, 주님은 어떻게 시험을 이기시는가? ⓶ 여기에서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
2) 두 번째 시험 ⓵ 두 번째 시험은 무엇이었으며, 주님은 어떻게 시험을 이기시는가? ⓶ 여기에서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
3) 세 번째 시험 ⓵ 세 번째 시험은 무엇이었으며, 주님은 어떻게 시험을 이기시는가? ⓶ 여기에서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
4)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 사역하기 (WORK)주간 중보기도
1) 12월 사역을 위하여 (성탄절, 송구영신 예배) 2) 제 12회 사무총회를 위하여 (1월 5일) 3) 2019년 각 지역 셀에서 섬기는 태신자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4) 환우들을 위해 5)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셀 사역
1) 공 예배 준수하기 2)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3)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4)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5) 12월 사역에 적극 동참하기 6)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 설교요약 (SUMMARY)설교요약 제목: 올곧음(1) - 대림절 두 번째 길목에서 본문: 마태복음 4:1-11 서론) 종교개혁자들은 라틴어 ‘ad fontes’(아드 폰테스)를 종교 개혁의 슬로건으로 세웠습니다. 왜냐하면 이 단어를 의역하면 ‘근본으로’라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혀 성서와는 상관이 없는 교리주의와 교권주의 그리고 교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적인 종교적 계급주의에 물들어 성서를 내 팽개쳐 버렸던 당시의 암울했던 종교를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으로 돌이켜 하나님 정신을 회복하자는 종교개혁자들의 열망이 이 슬로건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근본으로 돌아가려면 당시 가톨릭 권력에 맞서야했고 곧 그것은 목을 내놓는 일이었기에 ‘ad fontes’를 외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다음과 같은 어록이 있습니다. “Vor Gott ohne Gott”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본회퍼 목사가 독일에서 고난을 당할 때 독일의 루터교회(국가 교회)는 거의 모두 다 국가권력에 아부하는 교회 같지 않은 권력 교회였습니다. 당시 본회퍼는 국가교회였던 루터교회의 지도자들이 자기들이 맘대로 만든 하나님이라는 거짓된 신을 섬겼던 것을 맹비난하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천명합니다. 그런 자기가 만든 거짓되고, 자기만족에 충실한 하나님을 제거해야 진짜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우리는 대림절 두 번째 주일에 키워드를 나누려고 합니다. 그것은 ‘올곧음’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자기의 길을 걸으심에 있어서 결코 환경과 타협하지 않으셨다는 키워드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본문 1절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이 구절만 놓고 보면 예수께서 곧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 성령이 순수하게 인도하신 대로 광야로 나간 것처럼 이해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12을 보면 이 구절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즉 예수님을 광야로 강제로 몰아넣으신 분은 바로 성령님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광야 시험의 프로젝트는 삼위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영적 힌트를 얻게 됩니다. 광야에서 일어날 일체의 일들에 대하여 삼위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라는 교훈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고, 예수님이 실천하시며, 성령 하나님이 이루실 그 어떤 위대한 일을 광야 시험에 만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저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마귀가 던진 시험을 ‘아드 폰테스’ 즉 가장 근본적인 의미로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의미는 곧 성도가 지켜 나아가야할 신앙적 올곧음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는 것이 신앙적인 올곧음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마귀가 주님에게 요구한 것이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요구였습니다. 하나님이 돌을 돌로 만드신 이유는 돌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돌만이 갖고 있는 특징을 통해 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돌을 만드신 것입니다. 또한 떡은 떡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돌을 떡으로 만드는 마술과도 같은 그 무언가를 세상이 요구하고, 또 그 요구에 부합하는 자들이 주목을 받고 성공을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를 혼돈의 무질서로 변질시키는 것에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든다는 데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시대의 비극이 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담임목사의 해석을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분명하게 저는 동성애를 반대합니다. 이유는 오늘 첫 번째 주제와 전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성애를 지지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를 무질서의 차원으로 변질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을 이용하여 떡을 만들라는 요구에 상응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회 안에 있는 남편 그리고 아내를 총망라하여 강력하게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영적 질서를 무너뜨리지 말 것을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습니다. (로마서 1:24-27)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변질시킨 결과가 하나님이 제정하신 질서를 무너뜨린 동성애 창궐로 이어졌습니다. 성도가 누구입니까? 신앙인이 누구입니까? 정말로 중요한 것은 내가 주군으로 믿고 따르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그 근본을 사수하며 살고 있는가? 의 질문에 yes 의 답을 하고 살아내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이요 성도임을 명심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같은 것이라는 유사(類似) 신앙의 방향에서 떠나는 영적 올곧음입니다. 마귀는 두 번째 유혹은 성전에서 뛰어 내려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천사들 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보호할 것이라고 도전한 것입니다. 주님은 단호하게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십니다. 두 번째 시험에 방어기제로 사용하신 7절을 만나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주지했듯이 이 구절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가 맛사(므리바)에서 물이 없어 모세를 공격하고 하나님께 대들던 그들을 향하여 모세가 회고하며 선포했던 신명기 6:16절의 인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전’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탄이 주님을 데리고 간 성전은 헤롯 성전이었습니다. 솔로몬 제 1성전과 스룹바벨 제 2성전의 터 위에 세워진 헤롯 성전은 허울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명목적인 성전이었지 실상은 하나님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우상 숭배의 진원지나 다름없는 강도의 소굴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의 아들의 진면목을 보이라는 사탄의 요구는 전형적인 성전 중심적인 제왕적인 권위와 면모를 드러내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주님은 사탄의 이런 술책과 간계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런 사탄의 간교함에 대하여 공격적으로 방어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짜 의도를 변질시키거나 왜곡하지 말라는 준엄한 선언이었습니다. 본질이시며 ‘폰테’ (근본)이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적극적으로 주님이 사용하신 도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두 번째의 영적 올곧음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 세인교회는 언제나 유사 신앙의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성전을 우상의 볼모로 삼아 성전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올곧음을 견지하고 흔들리지 않는 영적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3) 세속적인 일체의 것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 영적인 올곧음입니다. 세 번째 시험을 살펴보십시다. 본문 8-9절입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는 예수님에게 천하만국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천하만국의 면모를 보여준 사탄의 간교함에 혀를 내들릴 정도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하만국이 가장하고 있는 그 모습 때문입니다. 본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독싼 아우톤’ 번역하면 ‘그 영광’입니다. 다시 말해 천하만국의 영광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유의할 것은 헬라어 단어 ‘dovxa’(도크싸)는 ‘천박한 영광이나 값싼 영광’을 말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 단어가 의미하는 영광은 거룩한 영광 즉 영적인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천하만국의 영광을 종교적인 영광으로 위장시켰다는 말이 됩니다. 가끔은 헷갈리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들입니까? 나는 가장 종교적인 사람으로 산다는 이유로 진짜로 괜찮은 기독교인이라고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마치 시내산 밑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이제 내가 하나님께 번제도 드리고 화목제도 드릴 테니 나를 간섭하지 말고 무조건 축복이나 하라고 하나님을 겁박하는 그런 나의 모습이 나의 종교적인 행동을 통해서 과시되는 경우입니다. 아모스와 미가 시대에 갖은 반 신앙적인 이들을 자행하면서 하나님께 최고의 제사를 드릴 테니 눈감아 달라는 영적인 뻔뻔함이 우리들에게 나타나는 경우입니다.(미가 6:6-8,아모스 5:21-24) 내가 하나님 신앙의 올곧음으로 바로 서 가기 위해서는 종교성으로 위장한 세속적 영광과 결코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마치 여호수아가 유언을 남긴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여호수아 24:14-15)
결론) 워싱톤 사귐의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김영봉 목사께서 ‘나는 왜 믿는가?’에서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믿음을 보험 상품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지금 들고 있는 패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올인하는 사람처럼, 진짜 믿는 사람이 되도록 이 믿음의 길에 당신의 인생을 거시기를 바랍니다.”(김영봉, “나는 왜 믿는가?”, 복 있는 사람, p,83.) 사랑하는 세인 지체들이여! 진짜 믿음의 길에서 흔들리지 마십시다. 주님이 이기셨던 그 삶을 본받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고, 하나님 같은 것이라는 유사(類似) 신앙의 방향에서 떠나며, 세속적인 일체의 것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 영적인 올곧음으로 무장하는 대림절 두 번째 주간으로 보냄으로 아기 예수를 진정성 있게 기다라는 우리 세인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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