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9년 11월 24일 (넷째 주) 지역 셀 사역2024-04-23 17:04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무엇인가요? 그 선물을 받고 싶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 복음성가: 다시 일어섭니다.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일어나는 교회
● 본문 : 사도행전 3:1-10
1)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 구하는 것과 그에게 제자들이 주고자 하는 것의 차이점을 알아봅시다.
⓵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 구한 것은 무엇입니까?(3절, 5절)
⓶ 베드로와 요한이 이 사람에게 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입니까?(6절)  

2) 베드로와 요한이 주고자 한 것을 받은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을 살펴봅시다.
⓵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의 신체적인 변화는 무엇인가요?(7절, 8절 상반절)
⓶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의 행동의 변화는 무엇인가요?(8절 하반절)
⓷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의 행동의 변화를 통해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무엇이라고 밝혀집니까?
  - 이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 본다면?
  - 이 사람의 행동의 원인을 통해서 본다면?  

3) 적용하기
⓵ 설교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는 무엇인가?
⓶ 깨달은 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사역하기 (WORK)
주간 중보기도

1) 12월 사역을 위하여 
2) 2019년 각 지역 셀에서 섬기는 태신자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3) 환우들을 위해
4) 수험생들이 대학 입시의 관문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5)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대학원 강의, 후반기 사역의 승리)   


셀 사역

1) 공 예배 준수하기
2) 셀 원들의 범사 파악하여 중보하기
3) 셀 예배 책임감을 갖고 진정성이 있게 드리기
4) 리더와 인턴을 위해 중보하기
5) 담임목사의 사역을 위해 기도하기   

 
설교요약 (SUMMARY)
설교요약
제목: 일어나는 교회
본문: 사도행전 3:1-10 

  서론)
  기독교인들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고전 중의 고전으로 알려진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를 보면 다음의 명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지를 탐구하지 않고 사는 것이 초자연적인 맹목이라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악하게 사는 것은 가공할 맹목이다.”(블레즈 파스칼, “팡세”,민음사.p,358.) 파스칼의 지론대로라면 오늘 우리 주변에는 가공할만한 맹목으로 살아가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부지기수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그 교회가 나약해지고, 힘이 없어지고, 심지어는 상식에 눈감은 것 같아 미워지기까지 했지만 그러나 다시 그 교회는 내가 결코 피할 수 없는 영원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교회를 향해 이렇게 읊조리며 소리치고 싶습니다. ‘교회여, 일어나라’고. 

  본론)
  본문은 전인격적으로 오신 성령 하나님을 체험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일으켰던 기적을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이들은 제 구시(오후 세 시) 기도 시간에 성전 미문(美門)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이 문을 미문 즉 ‘beautiful gate’라고 호칭한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 문들 중에서 금과 은으로 도배한 화려한 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이 두 사람은 뜻밖의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라는 불행을 안고 태어난 걸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22절을 소개합니다.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이 걸인은 지난 40여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날도 미문에서 성전에 방문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구걸 행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남자가 있는 지점을 통과하던 베드로와 요한에게 걸인은 다른 여타 사람에게 했던 그대로 몇 푼의 물질을 구걸했습니다. 그의 소리를 들은 베드로와 요한은 그 남자가 구걸하고 있는 그 장소에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물질에만 집중하던 걸인이 두 사람의 소리를 듣고 반색했습니다. 그 동안 미문으로 들어가던 사람들 중에 능동적으로 반응한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이 두 사람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해서 걸인은 맹목의 소리 지름에서 의도가 있는 시선 멈춤으로 두 사람을 보게 되었다고 누가는 보고합니다.
  본문 3절입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여기에 소개된 ‘보고’는 헬라어 ‘에이도’의 번역입니다. 이 단어는 가장 단순하게 누군가를 볼 때 쓰는 단어인 ‘see’의 의미입니다. 헌데 ‘우리를 보라’는 두 사람의 소리를 들은 걸인이 두 사람을 보았다고 기록한 누가의 표현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여기에 기록된 ‘바라보거늘’은 헬라어 단어 ‘에페코’는 ‘집중하다.’는 뜻입니다. 걸인의 태도가 수동적인 구걸에서 능동적 집중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바뀐 것입니다. 걸인이었던 이 남자는 두 사람의 인격적인 의지로 선포한 외침을 인격적인 의지로 반응한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의지 對 의지로 소통한 이 두 부류의 만남 과정을 움직이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단 1%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틱한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의 절정을 만나보기를 원합니다. 집중하여 베드로와 요한을 바라보던 걸인에게 두 사람 중 베드로가 이렇게 선언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걸인이 아마도 기대했던 은과 금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을 걸인에게 주었다는 말입니다. ‘나사렛 예수’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베드로의 선언 내용을 누가가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사렛 예수’  무슨 의미입니까? 경멸의 의미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냐는 비아냥이 예수에 대한 당시 세속적 인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 판을 뒤집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기독교 신앙의 정수는 이 문장의 자구를 절대로 가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예수, 시골 촌뜨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평가절하 했던 예수, 그 분이 오늘 너를 일으켜 세우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베드로는 강력하게 선포한 것입니다. 누가가 결론을 맺은 본문 기사의 정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7-10절을 가슴 벅찬 심정으로 다시 읽겠습니다.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40년 동안 빌어먹어야 했던 고루한 인생이 일어났다고 누가는 보고합니다. 누가의 감격은 단순히 일어난 감격으로 마무리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누가는 겹 감격의 보고를 남깁니다. 일어난 자는 그토록 자기도 학수고대하며 바라고 바랐던 성전으로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들어간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다고도 했습니다.
  김인국 신부가 ‘기자와 목사, 두 바보의 이야기’라는 책에 대한 리뷰 글을 실었는데 그 때 읽은 그의 글이 저를 후려쳤던 기억이 있어 한 대목만 소개하고자 합니다. “교회가 밥값을 못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는지 아시시의 성인 역시 십자가를 바라보다가 ‘프란체스코야, 내 집 좀 고쳐 다오. 너도 보듯이 내 집이 다 망가졌단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때에 그가 십자가의 눈물과 한숨 사이사이에서 손과 발과 옆구리의 상처에 입 맞추며 불렀던 노래가 이렇게 전해집니다.”(손석춘, 김기석, “기자와 목사, 두 바보 이야기”, 꽃자리, p,342)
  조금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 제가 사랑하고, 여러분이 사랑하는 교회가 망가졌고, 또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런 우리 교회가 참 못생겼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또 하나 절대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그 교회가 아무리 고개를 돌리고 부인하고 싶으나 부인할 수 없는 내 사랑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값을 주고 사신 가장 존귀한 주님의 교회라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오늘 추수감사주일 이 시간에 참 못생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대로 고개를 돌릴 수 없는 내 사랑하는 교회를 향한 심기일전의 메시지를 함께 나누고 설교를 맺을까 합니다. 저는 내 사랑하는 교회가 다시 일어서기를 기대합니다. 일어나서 성전을 향하여 뛰어 들어가 찬양했던 본문의 앉은뱅이처럼 그 감격을 다시 교회가 회복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려면 오늘 추수감사주일, 저와 여러분이 섬기는 세인 교회와 세인교회를 포스트로 하여 고향 교회의 기도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에게 권면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의 본질을 상실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내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 본질에 대하여 눈을 감은지 오래된 것 같아 매우 유감입니다. 교회가 이 본질에 대하여 눈을 감자마자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형적인 비본질인 은과 금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교회만이 그렇다고 힐난한다고 착각하면 그것이야 말로 더 큰 착각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은과 금에 혈안이 된 비본질의 교회에 나타나는 최고의 비극은 그 교회의 구성원들 역시 똑같이 은과 금에 목적을 두는 괴물 신자로 변질된다는 것입니다. 은과 금에 목적을 두는 교회와 신자는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축복을 쏟아부어주는 사유물로 여긴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교회의 본질은 물질이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함으로 나타나는 능력으로 대 사회를 섬기는 일이며, 그 복음을 세상을 바꾸어 나가는 일입니다. 동시에 이 능력을 공급받은 주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예수께서 행하셨던 그 삶을 반드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없으면 일어날 수 없습니다. 40년 동안 앉은뱅이로 미문에서 구걸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았던 본문의 걸인처럼 전락해 버린 조국교회가 아픕니다. 그냥 아픈 것이 아니라 몹시 아픕니다.   

  결론)
  저는 이제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금년은 세인 교회 창립 1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지난 10년을 뒤돌아봅니다. 세인교회 역시 조국교회가 아파하는 현실 한 복판에서 지난 10년을 달려왔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 10년, 우리 교회는 이 아픔과 맞서 싸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비본질적인 것으로 무너진 한국교회와 또 싸우며 달려갈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그럴 만한 여유도 없습니다. 그게 우리 세인의 운명이요, 사명이자 삶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지체들이여! 그리고 세인의 기도로 살아가는 가족들이여!
이 주존감에서 후퇴하지 맙시다. 우리 교회도 일어서고, 조국교회도 일으켜 세웁시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다시 일어서도록 전진합시다. 주님이 도우실 것이며, 성령 하나님이 앞서실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 3:6) 내게 있는 그것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잃지 않는 우리 세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