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어떤 효도가 최고의 효도일까? 난 그 효도를 하고 살았을까? 그렇지 못하였을까? | 경배와 찬양 (WORSHOP) ●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 ● 찬송가 425장: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본문 : 아버지의 뜻 ● 제목 : 갈라디아서 1:4-5 1)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주님의 기도에 나타난 위기와 은혜를 나누어 보자. 2) 본문에서 바울이 확신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본문 4절을 참고하고, 더불어 설교의 주제도 참고하자. |
3) 적용하기 ① 아버지의 뜻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 들지 말자. ② 나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③ 그런 삶을 살아내는 신앙인이 되자. | 사역하기 (WORK)교회 주간 중보기도 제목
1) 12월 교회사역을 위해 2) 환우들을 위하여 3) 교회학교를 위하여 4) 12월 중에 부교역자 청빙을 위해
주중 사역
1) 재정 장부 확인하고 감사 준비 2) 이월금이 없도록 하고 남은 재정은 건축연보로. 3) 교회 행정적인 사역과 봉사에 모두가 협력할 것. 4) 사고 가정 파악하고 중보 할 것. 5) 사무총회 준비에 최선을 다해 합력할 것. | 설교요약 (SUMMARY)제목: 아버지의 뜻 본문: 갈라디아서 1:4-5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라는 두 가지의 개념이 충돌할 때 너무나 버젓이 내 뜻에 하나님의 뜻이 굴복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나름 괜찮은 신앙생활을 한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음에 경책해야 합니다. 내 뜻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 언제나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것이 마땅한 신앙인의 삶이요 방법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일은 우리는 그 반대를 요구할 때가 비일비재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뜻을 굽히셔서 내 뜻에 따라 주십사하는 기막힌 불신앙으로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차원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드린 절규에 가까운 기도는 어떤 면에서 우리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교리의 정수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 중요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의 한 자락인 겟세마네에 도착하셔서 어른이 돌을 던지면 도착할 정도의 거리를 제자들과 띠우시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42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여기에 기록된 헬라어 ‘블로마이’는 개역개정판에서 ‘뜻’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의도’(INTENTION)라는 단어로 번역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의도가 담겨 있는 목적’이라고 해석하면 더 적절합니다. 예수께서는 겟세마네에 도착하셔서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고통 앞에서 진정성이 있고 절절한 의도를 아버지 앞에 내놓았습니다.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혹시 이제 내가 짊어져야 하는 십자가를 피할 수 있을까?의 의도였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 이르면 인성을 갖고 계셨던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연약성을 가지고 계셨던 분이라는 아픔을 느끼곤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음이라는 객체 앞에 과연 누가 담대할 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인성을 갖고 계신 주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와 다르셨던 위대함을 바로 이 구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하셨지만 주님의 원(뜻)대로라는 단서를 달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42절 후반절에 있는 내 ‘원’과 아버지의 ‘원’대로 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델레마’는 ‘의지 혹은 선택’이라는 의미인 것을 감안할 때 이 단어가 의미하는 직설적인 표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지, 혹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택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이라도 당신의 뜻보다는 아버지의 뜻과 원하시는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제하고 이해할 때 본문 해석도 우리에게 더 감동적인 은혜를 선사합니다. 본문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웬만한 인사로 가장 간단하게 인사치레를 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곧바로 아주 직설적으로 전하고 싶은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터치하고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이름을 높였습니다. 주님께 영광이 세세무궁하기를 원한다고 노래합니다. 헌데 바울이 주님의 이름을 높인 이유가 분명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①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는 점입니다. ②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기 몸을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의 핵심적인 요점이 무엇입니까? 주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왜 우리 때문에 죽어야만 했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인데 그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인간을 대신하여 죽어야할 대속자로 주님이 선정되었고, 그 죽음은 바로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기초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중대한 복음의 핵심을 이렇게 핫 하게 표현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다고. 여기서 우리는 아주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세상에, 어떻게 아들을 죽이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원함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의 딜레마입니다. 패륜적인 아버지가 아닌 이상 어떻게 아들을 타인을 위해 죽일 수 있단 말입니까? 도무지 인간의 이성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차원의 이해를 신학이 요구합니다. 이렇게. 아버지의 뜻은 아들이 죽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저히 상식적이지 않은 이 신학의 정수가 말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오늘 갈라디아서 3번째의 강해를 통해 이렇게 정리하여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아들을 죽이는 것이 모두를 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강력하게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선포한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다시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이 내용을 바울만 알았습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재론하지만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아버지의 이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해서 주군은 이렇게 고백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22:42절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부전자전의 통함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고 있는 아들 예수님이 계셨기에 우리는 어떤 은혜를 받을 수 있었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6:6-7절에서 이렇게 그 은혜를 알려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두를 살리려는 뜻이었습니다. 이 뜻을 죽음으로 받아들인 예수께서 나의 주군이심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세인 교회 지체 여러분! 아들을 죽여야 하는 아버지의 뜻은 죄인 된 우리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 말고는 존재하지 않음을 아셨기에 그 아픔을 실천하신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아들이신 예수께서도 아버지의 아픈 뜻을 아셨기에 마땅히 죽기를 각오한 순종의 도를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주군이신 이 두 위(位)의 하나님으로부터 이 엄청난 아픈 사랑을 받은 대단한 존재들입니다. 그러기에 저는 김기석 목사의 책에 나오는 이 글이 너무나 엄청난 반향의 감동으로 날마다 나를 깨우쳐 줍니다. “우리는 신이 아픈 어느 날, 곧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는 그 날, 태어났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신의 상처’를 함께 아파하는 삶이다.”(김기석, 오래된 새 길, p,237.) 나는 우리 세인교회가 아버지의 뜻을 망각하지 않는 교회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 세인 지체들이 아버지의 뜻을 잃지 않는 성도들이기를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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