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8.1.7 지역 셀 사역2024-04-23 16:28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새해 덕담 나누며 영적인 소망도 말해 보기.  

 
경배와 찬양 (WORSHOP)
내 주의 나라와 (찬송가 208장)
한라에서 백두까지 (복음성가)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 성서가 증언한 밑힘으로 든든히 서 가는 교회
● 본문 : 사도행전 6:1-6
1) 본문에서 사도들이 실수를 한 것을 일목요연하고 정리해 보자.
⓵ 구제에 관하여 – 설교를 참고하자.

⓶ 밑힘의 상실 – 사도들이 스스로 고백한 소홀히 여긴 밑힘은?   

2) 사도들이 돌이켰던 내용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였던 실제적 조치들
① 집사 임명과 관련하여

② 완전히 결별한 것들  

3) 적용하기
⓵ 2018년 나를 영적으로 지탱하게 해 줄 밑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결심해 보기(두 가지 이상)
② 2018년 셀 기도 제목 연합하여 나누고 기도하기
③ 제비뽑은 말씀 믿고 기도하기  

 
사역하기 (WORK)
● 주간 중보 제목
2018년 세인교회의 올바른 부흥과 승리를 위하여
제 10회 사무총회와 2018년 사업체 심방을 위하여
지역 셀이 건강한 소 날개 역할을 감당하여 교회 부흥의 진원지가 되도록 (새로 임명된 리더와 인턴들을 위하여)
교육기관을 담당할 교육 전도사 청빙을 위하여
환우들을 위하여
2018년 담임목사의 리더십과 목회 승리를 위하여  

 
설교요약 (SUMMARY)
2018년 1월 7일 신년감사주일 예배 설교
제목: 성서가 증언한 밑힘으로 든든히 서가는 교회
본문: 사도행전 6:1-6

    바울은 다메섹에서 이방 형제들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은 이후 로마에서 순교를 당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주 예수께 받은 사명 즉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바울이 붙들었던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저는 교우들에게 줄곧 표현한 단어로 다시 말한다면 그것이 바로 ‘본질’ 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2018년 이 ‘본질’이라는 단어를 다른 대치어로 사용할 것입니다. ‘밑힘’ 곧 ‘저력(底力)’입니다. 바울의 밑힘 즉 저력은 주군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초대교회가 부흥되자 예루살렘 교회가 집중했던 내적 사역은 교회 내의 과부와 고아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사역이 공평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본문 1절을 눈 여겨 보십시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여기에 기록된 단어 ‘제자’는 헬라어 ‘마세테스’의 번역입니다. 본문 1절에 기록된 ‘제자’는 사도 그룹에 이어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두 번째 그룹에 해당하는 선두 그룹에 있는 자에게 붙이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구제 논쟁이 일어난 현장은 제 2그룹의 제자들이 많아진 예루살렘 교회라는 점에서 그 의미의 심중함이 있습니다. 오늘의 언어로 설명하면 예수가 주님이심을 믿는 확실한 신앙 공동체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점을 염두 하여 본문을 접근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주류였던 히브리파 과부들은 교회에서 배려하는 구제에 적지 않은 혜택과 배려를 받은 반면, 헬라파 과부들은 어느 경우 매일 한 번씩 공급받아야 하는 구제에서 탈락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이 발생하자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유대인들의 행태에 대하여 원망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는 두 종류의 유대인들이 존재했습니다. 한 부류는 오늘 과부의 구제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었던 헬라파 유대인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나라를 잃고 팔레스타인을 떠나 인근 소아시아를 비롯한 헬라 지역에서 삶의 근거지를 삼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소위 말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당시 통용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이런 이유로 당연히 예루살렘 초대교회에서는 비주류에 속한 집단이었습니다. 또 한 부류는 고국을 떠나지 않고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고난의 굴곡을 통과한 그룹이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쓰는 자들이었고, 난국 중에서도 조국을 떠나지 않은 자들이었기에 당연히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터줏대감들이었고 주류였습니다. 더 주목할 것은 사도로 주님에게 임명받은 자의 대다수가 이 계통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은 예루살렘의 실질적인 권력들이었고, 요즈음의 단어로 말하면 실세들이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질적인 권력이었던 사도들이 오늘 본문에서 문제의 사단이 되었던 구제까지 도맡아 관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본문 2절을 나누어 보십시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이 구절은 아주 선명한 사도들의 오류들을 고발합니다. 12명의 사도들이 ‘구제’라는 사역을 포함한 일체의 ‘접대’까지 관할했다는 점입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는 베드로가 한 번 사자후를 토하면 하루에도 3,000명이 회심하는 강력한 성령 공동체였던 것을 추측한다면 그 살림의 규모는 오늘로 말하면 메가 처치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로 이런 대규모 공동체의 살림을 맡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상업주의의 형태요, 기업주의의 형태라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체 교회의 사도들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말씀을 제쳐 둔 접대하기’였습니다. ‘기도하기를 소홀히 한 구제’였습니다. 사도들은 교회가 구제로 인하여 심각한 내홍에 빠지자 이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재빠르게 돌이키기로 합니다. 본문 3절을 봅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사도들은 본인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이 일 즉 구제 및 접대의 일을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7명의 집사를 세워 그들에게 맡기기로 합니다. 여기에 기록한 ‘맡기다’로 번역된 헬라어 ‘카타스테쏘멘’은 원래의 의미가 ‘넘기다’의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소유권을 완전히 양도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어성경 NIV에서 이 대목을 적절하게 이렇게 번역한 것을 보았습니다. “We will turn this responsibility over to them.”(우리는 그들에게 이 모든 책임(권한)을 되돌릴 것입니다.)
    사도들이 많은 프리미엄을 받을 수 있는 세속적 가치일 수 있는 구제(접대)에 대하여 다시는 기웃거리지 않겠다는 결의가 보이는 해석입니다. 미련을 두고 기회가 되면 세상 사람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기득권적인 권력의 맛에 연연해하지 않겠다는 선포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본인들의 이런 단호한 선언을 말로 그치지 않았음을 본문이 제시합니다. 본문 5-6절을 읽겠습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우리가 잘 아는 초대교회 일곱 집사의 명단이 소개됩니다. 그런데 모두의 이름이 헬라식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일곱 명의 정체성은 헬라파 유대인들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도들이 정신을 차리자 예루살렘 초대교회 공동체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다시는 사도들은 구제나 접대와 같은 공궤에 빠지지 않겠다는 결의가 말이 아닌 삶의 결단이라는 혁명으로 승화되었음을 말입니다.

    저는 사도들의 이 결의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결의가 있었기에 사도들은 그 다음의 행보를 걸을 수 있었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4절을 읽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들이 결의한 그 다음의 행보는 기도하는 일, 말씀 사역에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저력(底力) 즉 밑힘입니다. 마가복음 9장을 보면 변화산상에서 내려오시자마자 제자들과 변론하고 있는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비를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지 못했는가에 대하여 주님께 질문하며 갑론을박할 때 주님이 선언하신 레마에 집중해 보십시다. 마가복음 9:29절입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제는 마태기자의 전언으로 눈길을 돌립시다. 마태복음 28:19-20절을 읽습니다.“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사역은 주님이 사도들에게 위임한 사역의 본질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이 지탱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사역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지지하시고 지탱하시는 사역이 무엇입니까? 밑힘 즉 저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세인교회가 2018년 절치부심하며 날마다 곱씹고 달려가야 하는 지침을 아로새겨야 합니다.
※ 성서가 증언한 밑힘으로 든든히 서 가는 교회가 우리 세인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목회를 하면서 현장에서 배우는 강력한 주님의 가르치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사람의 방법과 사람이 만든 스킬과 엔터테인먼트로 결코 서지 못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방법이 아니라 기초라는 사실 말입니다.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밑힘은 모두가 기초입니다. 뼈대입니다. 강원도 평창에 가면 겨울마다 얼음축제를 합니다. 조명과 어우러진 가지각색의 아름다운 얼음조각들로 만들어진 작품들이 관광객들을 매료시킵니다. 그런데 얼음축제를 볼 때마다 저에게 오는 소회가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자태의 유효기간은 겨울 내입니다. 온도가 올라가는 봄이 오면 이 얼음조각들은 산산이 부서집니다. 얼음은 얼음일 뿐 뼈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체 근력은 건강의 척도라고 말들 합니다. 그런데 이 공식은 영적 생활에도 정확하게 적용됩니다. 성서가 증언 한 밑힘은 나를 영적으로, 교회를 영적으로 견고하게 만드는 하체 근력입니다. 오뚝이를 부도옹이라고 말합니다. ‘부도옹’을 풀이하면 아니 不, 쓰러질 倒 늙을 翁입니다. 결코 쓰러지지 않는 노인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오뚝이가 쓰러지지 않습니까? 밑 정중에서 받쳐주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을 받쳐주는 밑힘은 예수께서 가르치시고 행하셨던 레마입니다. 그래서 저는 금년도 우리 교회 표어를 정하면서 밑힘이라는 단어 앞에 이렇게 수식어를 붙인 것입니다. ‘성서가 증언 한 밑힘’이라고.

    목양터 이야기 마당에 소개한 강수원 형제의 한 문장을 되새기십시다. “요즈음은 고린도전서 강해를 통하여 오랫동안 묵은 나의 영적 암 덩이가 떨어짐을 깨닫고 두서없이 편지를 씁니다.” 형제의 영적인 오래 묵은 암 덩이가 떨어져 나가게 해 준 것은 프로그램, 상담, 내적 치유, 임파테이션(축귀 사역), 찬양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영적으로 승리하도록 만들어 준 것은 밑힘 곧 고린도전서 강해였습니다. 어찌 고린도전서 강해뿐이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일체의 말씀인 밑힘 레마입니다, 나는 우리 세인 교우들이 2018년 한 해 동안 성서가 증언 한 밑힘으로 든든히 서 가는 교우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