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깨기 (WELCOME)우리 교회의 장점을 세 가지씩만 자랑해 보자. | 경배와 찬양 (WORSHOP)● 파송의 노래 (ccm) ●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찬송가 323장) | 말씀읽기와 적용 (WORD)● 제목: 부름 받은 이유 ● 본문 : 베드로전서 3:8-9 1) 본문에서 베드로가 제시한 소아시아 크리스천들이 부름 받은 이유 세 가지를 말해 보자. 2) 특히 위의 물음 중 1번의 답을 조금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자. ● 교회가 결코 양보하지 않고 다 마음을 같이 해야 하는 성서적 본질의 마지노선은 무엇이 있는가? ① 설교의 예: ② 셀 원들이 생각하는 영적 본질의 마지노선은? |
3) 부름 받은 이유의 2번과 3번의 답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누어 보자. ● 이타적인 삶: (본회퍼 목사의 말) ● 선을 행하는 삶: (팔덴 갸초의 예화) | 사역하기 (WORK)1) 중보기도 ① 환우들을 위해 (최정희 집사, 안동철 형제 등) ② 루존 교회의 이전을 위해 ③ 28일에 있을 장애우 섬김 사역을 위해 ④ 금요일에 실시되는 산상 기도회를 위해 ⑤ 여름 행사들을 위해 ⑥ 부교역자 사택 공사를 위하여(작은 정성이라도 함께 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⑦ 담임목사의 건강과 책 수정본 완성을 위해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 설교요약 (SUMMARY)6월 29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제목: 부름 받은 이유 본문: 베드로전서 3:8-9
성도는 하나님께 부름 받은 존재들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이사야 41:8-9절) 고 말했습니다. 신약으로 넘어오면 예수께서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6:8절). 이 구절에 기록된 ‘교회’라는 단어 ‘에클레시아’는 ‘불러 모으다.’ 라는 뜻의 ‘에칼레오’ (ἐκκαλεώ)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교회라고 번역된 ‘에클레시아’의 문자적인 원 뜻은 ‘밖으로 불러 모으다.’의 뜻을 갖고 있기에 세속적 가치의 무리에 있었던 자들을 불러내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가지고 사는 자들로 구성된 모임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본문 9절 하반절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에서 주목할 문구는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성도 공동체는 부르심을 받은 ‘에클레시아’ 즉 교회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 공동체는 ‘이를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데 베드로가 피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베드로 사도는 본문 8절에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부름을 받은 공동체라면 제일 먼저 함께 같이 하여야 할 내용이 있다고 말합니다.
1) 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다양성을 매우 중요하게 강조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자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부사인 ‘다’ 라는 단어가 ‘마음을 같이하여’ 라는 권면 앞에 붙어 있습니다. ‘다’로 번역된 헬라어 ‘탄테스’는 그 의미가 ‘all of things’(전부)입니다. 99.9%가 아니라 100%라는 말입니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것에 있어서는 예외가 없다는 강한 메시지입니다. 단 한 사람의 예외가 없이 모두가 다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본질에 대해서도 다양성을 인정하라고 요구한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4:6절 말씀을 빗대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는 이 구절을 가지고 누군가가 시비를 걸어 “목사님, 포스트모던의 시대라는 말을 아시지요? 포스트모던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획일화의 거부인 거 아시지요? 이 땅에 존재하는 그 어떤 사상, 철학, 종교적인 교리들도 유일한 것은 없다는 사상 말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14:6절을 폐기하든지 폐기할 수 없으면 더 이상 말하지 마십시오.”라고 한다거나, 로마서 1:26-27절의 말씀을 가지고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주후 1세기에 로마에 살고 있었던 로마 크리스천 남성들이 여성을 애 낳는 기계정도로 인식하는 상황에서 아내에게 성적인 만족을 주지 않았던 삶의 자리였기에 여성들이 동성에게 사랑을 느끼며 동성애를 하게 된 삶의 자리였는데 그것은 이해하지 않고 무조건 동성애를 하는 그들을 비판할 수 없다는 논리로 옹호를 하면서 바울이 이 사실을 간과했다고 비판하는 성서 해석학자도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로마서를 이해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동의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을 이해해야하기에 지금도 동성에게 성적인 매력을 느끼고 동성애를 즐기는 자들을 그냥 이해하고 그들을 인정하고 바울처럼 비판하지 말라고 한다면 그건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건 다양성의 포용이 아니라 성경의 본질적 의미를 포기하라는 말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본질은 다양성의 이해의 문제가 아니고 다 마음을 같이 해야 하는 절대적 순종의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교회는 본질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동의함이 요구되는 특수한 공동체입니다. 이것은 양보의 건이 아닙니다. 성서적 본질을 고집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은 순교적 각오를 가지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 베드로의 권면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다. 교회의 본질, 성서적 본질, 십자가의 본질은 다수결로 의결될 사항이 아니라 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하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2) 이타적 삶을 사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부름 받았습니다.
본문 8절 하반절에서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이 구절에 기록된 ‘동정하며’ 라는 단어 ‘쉼파데이에스’는 영어 단어로 ‘COMPASSION’ 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영어단어 컴패션은 어원적으로 ‘COM’(∼함께) 과 ‘PASSION’(감정을 느끼다, 열정을 느끼다.)이 붙어 있는 복합어입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을 느낀다. 같은 열정을 느낀다. 같이 불쌍한 마음을 갖는다.’의 의미로 사용되기에 어떤 경우에는 ‘동정’, 혹은 ‘체휼’이라는 명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동정한다는 의미는 상대방에 대해서 같은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대방에 대하여 같은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면 마땅히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더불어 불쌍히 여겨 상대방에 대하여 겸손한 마음을 견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을 이타적인 삶을 목적하며 살게 되는데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름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역자들은 이것을 망각하지 않고 사역합니다. 미국의 우드랜즈 펠로우십 교회의 담임목사 케리 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각자의 삶은 세상을 향한 메시지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속에 품고 다니는 복음 자체이다. 이 복음은 세상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메시지이다.” 1944년 테겔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할 때 본회퍼 목사가 유언과도 같이 남긴 절규가 있습니다. “교회는 타인을 위해 존재할 때만 교회다.” 본회퍼가 죽음을 앞두고 외친 이 절규에 우리의 반응이 냉담하다면 우리는 교회의 문을 열어놓았다고 하더라도 그 문을 닫는 편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그건 교회가 아니라 애물단지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웃을 동정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을 향하여 겸손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의 그레고리 비일 교수는 「예배자인가? 우상숭배자인가?」 에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정신이다. 교회를 세우기 전에 그리스도의 정신을 먼저 세워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교회는 신의 무덤일 뿐이다.”라고 갈파했습니다. 어떤 합리적인 변명을 내놓아도 타인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교회는 교회일 수 없고, 성도일 수 없습니다. 우리 세인 교회의 성도들은 이타적 삶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임을 잊지 말고 이웃을 위한 삶을 위해서는 물질과 시간과 몸을 드릴 수 있는 자들이 됩시다.
3) 선을 행하는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십니다.
본문 9절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참 쉽지 않은 명령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율법적인 사상입니다. 욕을 욕으로 갚는 것은 율법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욕을 하는 자에게 복을 빌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복을 빌라는 것은 율법적 사고가 아니라 복음적 사고입니다. 예수님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산상수훈의 백미라고 볼 수 있는 마태복음은 5:41-46절을 보면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일들을 주님이 제기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도대체 이런 말씀을 어떻게 순종하라는 것일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안 되면 주의 성령께 간구하고 응원 받아 해야 합니다. 작가 공지영은 「수도원 기행 (2)」에서 이런 감동의 글을 남겨 놓았습니다. [팔덴 갸초(Palden Gyatso) 는 티베트의 최장기수 정치법이었고, 고통 받고 있는 티베트의 현실을 국제연합에서 최초로 증언한 티베트인입니다. 중국에서 고문과 박해를 받고 삼십 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한 후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망명한 뒤 다람살라에서 달라이라마를 만난 팔덴 갸초는 울기만 했습니다. 그간의 사정을 묻는 달라이라마에게 그는 울면서 말했습니다. “대단히 위험했습니다.” 달라이라마가 다시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가장 위험하던 것이 무엇이던가?” 그러자 팔덴 갸초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하마터면 중국인들을 미워할 뻔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타종교적 현자들이나, 생각하는 자들도 이렇게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저들에 비해 정말 중요한 확신을 받았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본문 9절).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복을 이어 받을 수 있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은 엄청난 특권입니다. 이 특권을 놓치지 말고 부름 받은 자로 합당한 삶을 살아갑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