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 사역

제목2016.06.12 셀 사역2024-04-22 16:16
작성자 Level 10

 

얼음 깨기 (WELCOME)
남편이 미워보였을 때는 언제였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나누어 보자.  

 
경배와 찬양 (WORSHOP)
● 예수 따라가며 (찬송가 449장)
●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찬송가 407장)  

 
말씀읽기와 적용 (WORD)
● 제목: 아내의 신앙이 가정을 바꾼다.②
● 본문: 베드로전서 3:1-6
1) 사라가 남편 아브라함을 믿을 만한 남편이라고 볼 수 없었던 실례들을 설교를 통하여 열거해 보자.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가 그런 남편을 호칭한 호칭은 무엇이었는가?
● 실례들: 

● 사라가 남편을 부른 호칭은? (본문 6절, 창세기 18:12절 참고):  

2) 믿지 않는 남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아내의 무기가 무엇이라고 베드로 사도는 적시했는가? 동시에 그 무기를 구체적으로 설교자는 무엇이라고 선포했는가?
● 본문 4절을 참고하십시오.

● 구체적으로 무기는 무엇이었나?  

3) 내가 남편에게 진정성이 있게 순종하였던 일들, 마음은 있지만 순종하지 못한 실례들을 나누어 보자.
● 순종한 일들 나누기
● 순종하지 못한 일 나누기
● 순종은 열등해서가 아니라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임을 각인하자.  

 
사역하기 (WORK)
1) 중보기도
① 환우들을 위해 (최정희 집사, 안동철 형제 등)
② 루존 교회의 이전을 위해
③ 6월 장애우들을 위한 봉사를 감당하기 위해
  (섬길 대상을 주옵소서)
④ 금요일에 실시되는 산상 기도회를 위해
⑤ 여름 행사들을 위해
⑥ 6.25기념 구국연합성회를 위해
⑦ 담임목사의 건강과 책 수정본 완성을 위해
2) 헌금
3) 광고:
4) 폐회: 주기도  

 
설교요약 (SUMMARY)
6월 12일 주일 오후 예배 설교 (베드로전서 20번째 강해)
제목: 아내의 신앙이 가정을 바꾼다.(2)
본문: 베드로전서 3:1-6

  불신자 남편을 둔 그리스도인 아내들은 그 남편을 구원하기 위하여 정결한 행실을 갖추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자는 교훈을 지난 주 나누었고, 오늘은 그 두 번째의 교훈입니다.

2) 불신자 남편이 변화를 받을 수 있는 두 번째의 아내의 태도는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입니다.

  본문 4절에서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이 구절을 유진 피터슨의 번역으로 보면, “내면의 아름다움을 계발하십시오. 내면을 온화하고 우아하게 가꾸십시오.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그것은 삶에 배어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성경 내증으로 살펴봅시다.
  본문 6절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했다는 말의 해석학적인 의미가 중요합니다.
  창세기 18장을 보면 마므레의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에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 나타나신 장면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 변장한 세 사람의 방문을 받고 그들을 지극한 정성으로 잘 섬깁니다. 이 섬김을 받은 사람으로 변장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 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러자 이미 생리가 끊어진 사라는 그 분들의 말을 듣고 비웃으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세기 18:12절). 사라는 아브라함을 ‘아돈’ (주인)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된 히브리어 ‘아돈’을 70인의 역(헬라어 번역 구약성경)에서 ‘큐리오스’라고 번역한 것은 탁월한 번역입니다. 사라는 법적인 아브라함의 첫 번째 아내입니다. 우리나라의 단어로 표한다면 조강지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자신의 남편을 ‘주’ 라고 호칭한 것은 족장 시대의 특수한 시대적인 문화가 가미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만큼 남편의 존재를 중요한 상대로 인정한다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사라가 이 고백을 한 것은 단순히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과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어 있는 상태의 여인이었습니다. 지금 그녀의 나이는 90세입니다. 남편의 나이는 100세입니다. 젊어서 사라의 남편은 자기 혼자 살겠다고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사라 자신을 누이로 속여 목숨을 바로에게 구걸했던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아내인 사라가 말 한 마디 했다고 마치 기다린 사람처럼 몸종 하갈에게로 들어가 그녀와 동침하여 하나님이 인정하신 아들이 아닌 이스마엘을 낳았던 육의 사람이었습니다. 이후에도 남편 아브라함은 못된 버릇 개 못준다는 말처럼 그랄 땅으로 내려갔을 때에는 애굽에서 그랬던 그 못된 방법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아내를 또 누이라고 속여 남의 남자에게 아내를 마치 판 것처럼 무책임한 일을 했던 자였습니다(창세기 20장). 그럼에도 사라는 이런 인간 말종 같은 남편을 나의 주인이라고 지칭했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이것을 에둘러서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라고 본문의 ‘주’라는 단어를 번역해 놓았습니다.
  진정성이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보입니다. 이제까지 읽은 글 중에서 믿지 않는 남편을 진정성이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변화시켜 이 땅 대한민국에 정말로 위대한 영적 영향력을 제시하는 인물로 변화시킨 아내를 한 명 제시하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홍성사 대표 이사로 있는 정애주 사장을 예로 들 것입니다.
  정애주 사장의 남편은 100주년 기념 교회의 담임목사인 이재철 목사입니다. 이재철 목사께서 회심을 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잘 나가는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편법과 술수로 도배하여 자신의 사업을 번창해 나가던 불신자였습니다. 그는 세속의 가치로 볼 때 평범한 것 같지만 영적으로 가장 추악한 일들을 자행하며 막 살던 자였습니다. 그렇게 랜덤으로 막 나가던 어느 날 새벽 늦은 시간에 흥청망청 집에 도착해 보니 아내가 엎드려 자고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 때의 일을 요한복음 강해 설교집인 ‘요한과 더불어 제 2권’ 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에 들어가자 아내가 엎드려 자고 있었습니다. 머리맡에 성경책이 있는 것을 보아 성경을 읽으며 저를 기다리다 잠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엎드린 아내의 얼굴 밑에 하얀 노트 한 권이 깔려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 노트가 보고 싶어 살며시 꺼내 보았습니다. ‘나는 오늘도 버스를 타고 수유리 너머로 갔다. 시골길을 하염없이 걸으면서 오늘도 어김없이 죽음을 생각했다. 약을 먹고 죽을까 아니면 손목을 그어서 죽을까. 그러나 그것은 내가 취할 길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돌아왔다. 나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께서 주님의 뜻을 위해 내게 주신 남편이므로 나는 사랑 해야만 한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께서 사랑하라 명령하시므로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 주님 도와주세요, 나의 약함을 주님께서 잘 아시잖아요.’ 노트는 여기저기 눈물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저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고, 귀에서는 커다란 북소리가 울렸습니다. 저는 노트를 내려놓고 서재로 들어가 소리를 죽여 가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자신의 적나라한 실상을 똑바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는 오직 저 한사람을 믿고 자신의 인생을 제게 맡겼습니다. 그러나 그 아내가 나로 인하여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 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아내가 죽음의 방법에 골몰하고 있을 때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가? 아내가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자신의 슬픔을 감추고 나를 웃음으로 대할 때, 나는 단 한 번이라도 진실함으로 아내를 대한 적이 있었던가? 제 마음속에서 마구 솟구쳐 오르는 질문들에 대하여 저는 한 마디의 대답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가 죽음을 생각하던 그 시간에 저는 환락가의 현장에서 오직 쾌락만을 탐닉하던 한심한 남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나야말로 이상적인 배우자, 멋진 남편, 괜찮은 남자, 능력 있는 청년,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이라 착각하며 스스로 자기도취에 빠져 있었으니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저는 제 아내가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남편 같지 않은 남편 탓에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우면서 울었을까? 죽음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내려누르는 절망감에 몸서리는 얼마나 쳤을까? 아내가 당해야만 했을 고통과 아픔이 고스란히 전이되어 제 마음을 난도질했기에 저는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결정적인 아내의 진정성이 있는 남편 사랑하기를 통하여 그는 온전히 회심하였고 지금 한국교회에 가장 지대한 영적 영향력을 제시하고 있는 선한 목자로서의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가 변한 것은 정애주 사모의 내면적인 아름다움을 기초로 한 진정성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6절 하반절의 유진 피터슨이 번역입니다. “여러분도 걱정과 두려움이 없이 그렇게 하면 사라의 참된 딸이 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상투적이지만 붙여주는 말이 ‘우리도 믿음으로 나아가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지칭된다’입니다.
  불신자 남편을 두어 고통을 받고 있는 아내들에게 베드로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처럼 진정성이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남편에게 보이는 자는 남편을 신앙의 틀로 인도하는 아주 강력한 아내가 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이런 여성들은 믿음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사라의 계보를 이어갈 수 있다는 영적인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아내가 불신자 남편에게 보여줄 수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순종함입니다. 분명히 순종함이라는 단어로 본문은 기록했습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본문 1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본문 6절). 그런데 이 ‘순종하라’는 단어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아내가 남편보다 열등한 존재이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것이 결코 아니라 질서의 차원입니다.
  가정에서 아들들이 있습니다. 아들들의 성장 과정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들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의 인격 형성에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남편은 아내들의 바람막이입니다. 아내들이 힘들고 외롭지 않게 하는 것은 남편들의 몫입니다. 아버지는 딸들의 기둥입니다. 어머니처럼 애잔하지는 않지만 영원한 바다 같은 품이 아버지의 품입니다. 아버지와 남편들은 그 중심에 있습니다. 가정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아버지가 가정의 질서 중심이 될 때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아내들은 남편이 해야 할 가정의 질서 유지를 위해 순종하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자신의 남편인 나발이 다윗을 선대하지 않아 가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직면했을 때 남편의 실수를 대신하여 사죄함으로 가족 진멸의 위기를 벗어납니다. 이 일은 아비가일의 몫이 아니라 나발의 몫이어야 했습니다. 역할이 바뀐 가정은 불행한 가정입니다. 잠언 기자는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잠 14:1)고 했습니다. 아내가 순종하는 것은 열등해서가 아니라 가정의 질서를 위해서입니다.

  세인의 아내들이여! 진정성이 있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가꾸어 나감으로 가정을 살리고 남편을 살리는 지혜로운 여인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