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목회 현장에서 말씀 읽기를 세 가지를 병행한다. ⓵ 교회력에 맞추어 『물이 여기 있다』 포맷으로 조금은 세밀하게 말씀 묵상에 임한다. 오늘까지 921쪽을 넘겼다. 팔불출인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대견하다. ⓶ 맥체인 성경 읽기를 통한 성경 일과를 묵상하면서 하나님 말씀과 깊이 연애한다. 말씀으로 조명받을 수 있는 통로이기에 내게는 또 하나의 기쁨이다. ⓷ 새벽에 교우와 나누는 묵상 『생명의 삶』 성서 일과다. 복음주의 교회의 목사 회중들과 나누기에 대단히 안전한(?) 일과다. 실제로 편집부의 노력이 실로 눈물겹다.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일일 큐티 자료를 만들기에 최선을 다한 모습과 열정이 칭찬받을 만하다. 하지만 한 가지 유감이 있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편집부의 성서 해석 편차가 나와 너무 다른 것을 발견할 때다. 예를 들자면 지난 주간, 이번 주간, 성서 일과가 그렇다. 5월 텍스트가 열왕기상 12〜22장이다. 특히 지난 주간부터 이번 주간까지의 텍스트가 유다 왕 아사의 치세 기간에 일어났던 북 왕국 이스라엘 왕조의 격동을 기록한 역사와 동시에 여로보암 왕조의 종말을 가져온 오므리 왕조의 시작과 한복판에 있었던 아합 치세와 그 대척점에서 강력한 카운터파트였던 엘리야의 활약상이 펼쳐지는 대서사시다. 문제는 열왕기 역사서가 신명기 역사서라는 데에 있다. 완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던 역대기 역사서 사관들에 비해서도 조금은 양호하다고 여겨지기는 하지만, 북쪽에 대한 편파적 폄훼와 다분히 친 남 유다적인 역사 기록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신명기 역사서도 도찐개찐이다. 상황이 이러니 신명기 역사가들이 본 열왕기상 기록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생명의 삶』 집필부의 나이브 한 기록을 비평적 성찰 없이 교우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이 목사의 양심상 심히 괴롭고 고민스럽다. 아주 오래 전, 목원대학교 이희학 교수가 쓴 『북 이스라엘 역사와 종교』 (프리칭 아카데미 간, 2009)와의 여행을 마치고 난 뒤, 너무 귀한 공부를 하고 났기에 그 감격이 커서 북쪽 이스라엘의 종교성과 왕들에 대한 균형적 성찰로 인해 행복했는데 지난 주간, 또 이번 주간, 그리고 다음 주간까지 교우들과 나눌 『생명의 삶 5월호』 교재 안에 있는 내용들은 내가 갖고 있는 북쪽 이스라엘에 대한 신학적 함의들을 주저 없이 깔아뭉개는 일방적 편향성 때문에 고민이 더해져 간다. 이희학 교수의 일갈을 하나만 보자. “분열 왕국의 역사는 주전 926년에 시작되었다. 그런데 야훼 종교 전승의 진정한 계승자가 남 왕국이 아니라 북 왕국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북 왕국의 역사에는 분명히 야훼 종교의 역동적인 생명력이 흘러넘치고 있다. 신명기사가의 친 예루살렘적 내지는 친 유다적 신학으로 인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야훼 종교는 홀대당하기 일쑤였지만 말이다.” (위의 책, 8쪽)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지만 학문적인 주장에 대해 존중받아야 할 개진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정이 이런 데도 이런 이 교수의 학술적 논증은 대부분의 보수적 공동체 안에서는 존중받지 못하고 묵살 된다. 대단히 씁쓸한 무시함이다. 이런 맥락에서 진행하고 있는 새벽 큐티를 ⓷번 교재로 이어가려니 조금은 지친다. 양심상 아파서. 아직도 2주는 더 나누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고민이 커 간다. 사족 하나) 아주 오래 전에, 차준희 교수가 모 기독교 텔레비전 방송 설교자로 부족한 사람을 추천했는데 방송국 측에서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한 목사는 이념적으로 불온해서 배제해야 했기에 탈락 되었다는 전언을 받은 적이 있다. 차 박사도 연대 대학원에 공부했는데 이 무슨 궤변(ㅎㅎ)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떨어진 게 다행이다. 나도 내가 안다. 내가 얼마나 까칠한 지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소회는 양보할 수 없다. 북쪽 이스라엘의 종교적 상태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목사, 신학자가 불온하다고 평가당한다면 유구무언이다. 왜? 목사에게 공부하지 말라는 협박과도 같기에 말이다. |